인조반정 2

50. 소현세자는 왜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나?

청나라는 인조를 생포해 머리를 찧게 하는 항복을 받는 선에서 병자호란을 끝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로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청나라가 다른 전쟁에서 한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초원의 패권을 다툴 당시 몽골족 남자는 설령 아기일지라도 죽였다. 죽일 때도 그냥 안 죽였다. 나무 말에 앉힌 후 정수리부터 정을 박아 죽였다. 적에게 공포심을 주는 사형 퍼포먼스다. 반역을 꾀한 위그르를 응징하고 끌고 온 포로들 행진을 보면 당시 청 왕조가 포로취급을 어떻게 했는지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포로들을 동물원 구경거리로 삼았다. 인조는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 원래대로라면 인조도 청나라로 끌려가 저 꼴을 당했어야 했다. 심지어 위그르는 저 굴욕을 당하고 2년 뒤, 건륭제에..

조선 2019.03.09

49. 조선의 중국 사대주의와 만주 벌판 개장사

선조와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 국경으로 튀었다. 당연히 명나라가 망명을 허락할 거라고 여겼지만 끝내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 나라로 섬긴다고 설레발을 떨더니 실제로는 총독부 관리 취급도 못 받은 것이다. 조선 백성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소년과 개, 신광현, 19세기, 조선>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도 전쟁사에서 임진왜란과 같은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성주가 도망을 친 상황에서 농민과 노예들이 곡괭이 들고 적과 싸운 격이다. 그 난리 통에 선조는 또 다 늙은 나이에 어린 정비를 맞아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의병들과 함께 싸워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광해군을 중국 조선 총독부는 견제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광해군은 서자라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2019.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