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개 5

59. 보드 게임으로 보는 신라인 청나라 조상설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자기가 신라인의 후손이라고 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멸망 후 신라인이 중국 북부로 이동해 발해가 있던 지역의 여진족을 통합해 금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금나라가 망했다가 17세기 다시 후금을 세웠으니 바로 청나라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시대까지 왕족만 키울 수 있던 삽살개와 청나라 황족만 키울 수 있던 사자개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기원전 14세기 키푸로스에서 신성한 개를 믿던 지배 세력이 스키타이와 흉노로 이동했고 흉노는 계속 갈라져 신라와 금, 청나라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모든 기마 유목민이 인종과 언어를 제외하고 같은 문화를 지녔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증명을 해보라고? 단서는 의외로 사소한 데 있을 수 있다. 보드 게임이..

유목사 2019.03.30

58. 백제는 일본을 지배했나? 만주는?

임나일본부설, 한반도 일본 지배설은 별 의미 없다고 본다. 아마 당시 한반도와 일본을 지배한 계층은 기마 유목 왕조인 제 3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기마 유목 왕조의 국제 커넥션이 6~7세기 중국 선비족 왕조와 백제, 신라, 일본을 반가사유상으로 연결해주었을 수 있다. 특유의 기마 유목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신성한 개를 믿는 관념이다. 신성한 개는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믿은 알타이 샤먼 즉 텡그리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텡그리 신앙은 빛을 믿는 신앙이다. 빛의 종교에서 개는 신의 사자이거나 신 그 자체, 혹은 지상의 왕을 상징한다. 하늘에 있는 신이므로 개에게는 날개가 있다. 날개 달린 개는 곧 신이다. 날개 달린 신성한 개를 믿은 지역을 보자. 중앙아시아 대륙으로 국한해서 봤을 때 고대 중국을 제외한 ..

43 개고기 대신 로또 기원, 명나라 도교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약 60년 동안 중국 대륙은 선비족 미친 고 씨 패밀리 가 날뛰던 남북조 시대보다 더 정신없었다.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북부에는 다섯 개 왕조가, 중국 남부에는 열 개 왕조가 들어서는 오대십국 시대가 된 것이다. 나라가 망했다 세워지는 혼란기였으니 중국 사람들은 다시 개고기를 먹었을까? 스위스 산간벽지 사람들처럼 정말 굶주린 사람들은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정서는 이미 몇 백 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당 왕조와 함께 경교와 마니교가 망했어도 아직 불교와 도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대십국 시대부터 청 왕조가 망하는 순간까지 중국 도교에서는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개고기를 먹으면 죽어서 벌을 받는다고도 믿었다. 중국 도교 트렌드가 ..

종교 2019.02.19

39. 아르미안의 네 딸들 속 '개 머리 새'

여불위가 진시황 아버지라면 진시황도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문란한 성생활으로 악명 높은 진시황 엄마는 억울하다. 왕성한 성생활을 통해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은 기마유목민의 미덕이었다. 그래서인지 진시황 시대 유물을 보면 티베트탄 마스티프 석상이 있다. 사자개는 유목 왕조에게는 마치 옥새와도 같다 했다. 이런 개 석상이 중국 진왕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생뚱맞다. 진 왕조가 받은 석상이거나 과거 초나라 영토 안에 사자 개 석상을 가진 유목 왕족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든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를 열 받게 했다. 흉노를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 흉노의 침입을 더 초래했다. 그 전까지는 겨울이 되어 천랑성(늑대의별 혹은 개의 별)이 뜨면 풀이 얼어 죽..

종교 2019.02.09

27.신라가 일본에 개고기를 수출했다고?

2001년 개고기 불간섭 선언 이후 한겨레, 오마이뉴스, 중앙일보, MBC 등 온 언론이 하나가 되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조상이 농경민이라면 신라 토우 인형에게는 고대 애니미즘적 의미밖에 부여할 수 없다. 다복을 기원하는 고대 토속 신앙의 상징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신라가 유목 왕조였다면 실제 신라의 성 문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성 행위는 신성한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유목민의 성 도덕은 농경민과 달랐다. 유목민은 일상이 전쟁이었다. 약탈혼도 흔했다. 태어난 아이를 두고 “이 애가 내 애 맞아?”라고 따지는 건 불가능했다. 칭기즈칸 큰 아들 이름은 주치다. 손님이라는 뜻이다. 칭기즈칸 부인이 납치당한 기간에 생긴 아이였다. 조선 시대처럼 정절을 잃었다고 여자를 죽이고 열녀문을 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