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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120. 토머스 제퍼슨의 흑인 첩과 복날 개고기

조선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농촌 일꾼에게 복날 개고기를 먹도록 강요한 것은 결국 조선의 노비제도였다. 조선 노비 제도는 미국 노예제도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미국 노예제는 남부에서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조선 전체에 적용되었다. 둘 째, 미국의 노예제도는 남북 전쟁 후 1863년 종료되었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장장 500을 이어갔으며 지금도 북한에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노예 국가로 알려진 북한은 조선 사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북한은 유교적인 나라라는 송영길 더물어민주당 의원>

조선 신분 사회의 근간은 노비제도였다. 북한 김 씨 일가와 평양 상류층을 제외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조선 시대 노비처럼 살고 있다. 그러니까 김 씨 일가는 조선의 왕이다. 평양 상류층은 조선 시대 양반이다. 대다수 북한 주민은 노비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 시대보다 노비 비율은 증가한 셈이다. 어쨌든 이들 모두 조선은 중국이라고 떠들며 고대 중국인이 복날 먹은 개고기를 자신들의 전통이라며 신나게 먹고 있다. 물론, 식량과 약이 없으니 북한인은 개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


<개고기는 전통적인 민족 요리라고 한 김정일, 자유아시아 방송, 2018년 7월 27일>

사회주의 독재의 변형인 주체 사상으로 인해 조선 시대 존재한 개고기 금기도 사라진 마당이니 북한에서 개고기를 막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노비 국가 북한은 개고기 천국이다.

셋째, 미국의 노예 제도는 조선의 노비제도에 비해 덜 폐쇄적이었고 관대했다. 미국 노예는 조선 노비에 비해 해방될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도 조선보다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John Trumbull, 미국, 1788년>

미국의 노예제도 하면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인물이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이다. 한국의 노비제도 하면? 개고기 술을 조선에 퍼트린 이황이다. 토머스 제퍼슨과 이황은 각각 전통 있는 미국 상류층과 한국 상류층을 상징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대통령인 그는 흑인 소녀를 첩으로 두고 자식까지 낳았다는 혐의를 받았다북한이었다면 최고 존엄의 정부인 흑인 소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죽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지배층의 상징적 인물인 이황>

한국이었다면 핸드폰 문자로 유서를 남기고 조용히 자살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의 흑인 첩은 자식도 일곱인가 다섯인가를 낳고 잘 먹고 잘 살다 늙어 죽었다. 자손들은 일가를 이루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딸이 모두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기 때문이다. 이황은 죽기 직전 뭘 했을까? 자식들에게 노비는 양인과 결혼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노비 수를 펑펑 늘려 재산을 불리라는 조언이었다


<해방된 흑인 노예가 수영을 즐기고 있다, Winslow Homer, 미국, 1899년>

이런 이황에게 노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식이 있었다면 해방시켜 주었을까? 이 황이 노비를 사들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해방시켜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14살에 토머스 제퍼슨의 첩이 되었다는 샐리 헤밍스는 토머스 제퍼슨의 이복 처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장인은 흑인 노예 여성을 유린해 아이들을 낳았고 그 중 한 명이 샐리 해밍스다. 사돈까지 집안이 아주 샹샹바다. 그래봤자 조선 시대 기생충 양반보다는 낫다. 샐리 해밍스와 형제들은 모두 집안 노예로 분류되었지만 농장에서 일을 하지도 않았고 교육도 받았다


<조선 시대 교육, 언론, 사상의 중심지인 이황의 도산 서원, 정선>

어린 샐리 해밍스는 집안 노예들과 함께 토머스 제퍼슨의 부인의 결혼 지참금이 되어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인이 죽고 나서 샐리 해밍스가 14살이 되던 해부터 토머스 제퍼슨은 샐리 해밍스을 첩으로 두었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고 샐리 해밍스는 14살 흑인 혼혈 노예 소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아무리 봐도 샹샹바다. 평생 결혼 한 적 없는 샐리 해밍스는 줄줄이 아이들을 낳았고 하필 다들 백인 혼혈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쓴 미국 독립선언서 낭독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John Trumbull, 미국, 1817~1819년>

그리고 어쩐 일인지 토머스 재퍼슨은 샐리 해밍스의 아이들을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게 해주었다. 죽기 직전에는 엄마인 샐리 해밍스를 제외한 모두를 해방시켜 주었다그 샐리 해밍스조차 재산을 물려받은 토머스 제퍼슨의 딸이 바로 해방시켜 주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딸이나 조선 시대 기생충 양반들보다는 인간적이었다. 조선 시대였으면 다른 기생충 양반들이 나서 제퍼슨 가문을 멸문시켰을 수도 있다하나라도 예외를 두었다가는 노비제도(양반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이 여종과 낳은 아이는 노비였다, 건곤일회첩, 신윤복, 조선, 18~19세기 추정>

일가를 이룬 샐리 해밍스의 자손들은 끈질기게 자신들이 토머스 제퍼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DNA검사까지 받았다. DNA검사 결과 그들은 제퍼슨가 후손이 맞았다토머스 제퍼슨인지 토머스 제퍼슨의 남자의 친척 후손인지 몰라도 말이다

샐리 헤밍스의 후손이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만 보아도 미국 노예제도는 조선 시대 노비제도보다 관대하다. 넷 째, 미국은 노예 제도를 지금도 반성한다. 그러나 한국은 노비제도를 찬양한다. 복날 개고기를 통해서 말이다. 조선 시대 개고기는 저주받은 음식이었으므로 복날 개고기를 먹은 행위는 자발적이지 않다자발적이지 않다면?


<확률적으로 이들 중 몇 명은 노비다, 풍속도첩, 김홍도, 조선, 19~20세기>

기생충 양반이 시킨 거다. 실제 모 교수님의 책에 의하면 복날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양반의 지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복날 가난한 농촌 일꾼들을 찬양하며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주장 중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기 바란다

노비제도에 대한 통렬한 반성 없이 양반이 강요한 개고기만을 찬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 노예제도보다 끔찍한 노비제도를 500년이나 유지하며 고혈을 빤 기생충 양반들의 뜻을 따르는 셈이기 때문이다

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조선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구역 별로 분리되어 살던 한양 모습, 1900년 1월 1일>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급제였다집안에 3대 째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에서 제외되었으니 남자 양반은 죽자 사자 글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개고기를 먹은 양반은 상가집에 갈 수 없었다, 1900년 1월 1일>

대신 양반가 아녀자들이 뒷구멍으로 알바를 구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럼 지지리도 가난했던 남산골샌님들은 복날 개고기를 먹었을까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양반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였다.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집안 제사는 물론 마을 제사, 산신제, 기우제 등등 모든 제사를 못 지냈다. 장례식에도 못 갔고 아기가 태어난 집에도 못 갔다양반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중 제사를 지내지 않은 양반은 오직 천주교 신자였다.


<개고기 술은 한반도에 남긴 퇴계 이황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양반을 제외하고 양반이 개고기를 먹은 기록은 퇴계 이황 정도로 한정된다도산서원이라는 조선 최고 권력 기관을 소유한 이황은 개고기 술인 무술주를 담가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 서원의 면세 혜택을 바탕으로 노비 장사를 해 떼돈을 번 퇴계 이황은 명나라 왕자 주권이 쓴 활인심방을 표지만 바꿔서 출판했다. 번역을 했다느니 필사를 했다느니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책 표지에 자기 이름만 써서 냈다. 


<명나라 왕주 주권이 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국에 개고기 술을 퍼트린 이 황이 노비 장사에 열을 올린 건 자기도 한양 권문세가처럼 부를 누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선 말기 한양 양반 라 불리는 가문이 소유한 부의 수준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양 양반는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본사 같은 개념이었다. 전국에 걸쳐 소유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장원에서 나오는 수확물이 한양 양반 저택으로 모였다. 조선 시대에는 쌀, 보리, , 심지어 명태까지 화폐 단위로 간주되었다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늘린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화폐(엽전)가 있었지만 실물 시장은 물물 교환으로 돌아갔다. 뭐든 수확물을 가진 사람이 부자였다. 부의 근원은 땅이었다. 조선 시대 거부를 묘사할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소유한 장원에는 주인 양반 의 성 씨를 딴 노비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어마어마한 농지에서 수확물을 생산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이 노예(노비)였다


<가슴을 드러낸 여자 노비 혹은 양민, 1900년 1월 1일>

성이 없는 가축과 같은 신분인 노비는 보통 주인인 양반 집 성을 따라 집성촌을 이뤄 외거 노비로 살았다양반 가 저택 안에서 살면서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주인이 집과 땅을 내줘서(빌려줘서) 저택 밖 노비 집성촌에서 살게 해주는 식이었다

집 안 노비인 내거 노비는 크게 여자 노비, 남자 노비로 나뉘었고 각각의 구역, 역할에 따라 노비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예를 들어 안잠자기라는 여자 노비가 있었다. 구들이 깔리지 않은 윗방에서 먹고 자며 주로 바닥청소만 하는 노비였다


<1593년 당시 젊은 여자 노비 한 명 가격이 목면 25필,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요즘으로 치면 로봇 청소기다. 그런 이유로 보통 안잠자기는 안채에만 두었다점잖은 가문에서 사랑채 청소는 안방마님이나 딸, 며느리가 직접 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별당도 그 댁 따님인 아가씨가 머무는 거처가 아니라 첩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별당을 만들 정도의 재력가라면 본처와 첩이 얼굴을 마주보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별당 수가 곧 첩실 수였다. 어느 댁 저택에 별당이 열 채라면 첩이 열 명이라는 소리였다. 각각의 별당에도 노비가 딸려 있었다.


<기생인지 첩입지 모를 여인이 살던 조선 시대 상류층의 방, 1900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한 개의 한양 양반 가문이 소유한 노비 수는 전국 적으로 수 천~수 만 명에 이렀다. 결국 조선은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였다. 이 노비들을 관리하는 상위 직급도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노비들 중 똑똑한 인간은 회계, 경영, 대외 활동(일종의 정치), 자치(내부 경찰) 등의 전문 분야에서 일했다. 수 천, 수만 명의 노비들을 전문직 노비가 관리한 것이다. 주인 대감이나 마님은 상급 노비들만 상대했다


<삼복 더위에 농사를 짓는 백성들과 개, 조선 김홍도 풍속도첩, 19~20세기 초>

, 그럼 이 많은 노비들이 모두 복날이면 개를 끌고 나가 잡아먹었을까? 아니. 일제 시대에 태어난 한양 권문세가의 후손 분 증언에 의하면 복날 개를 먹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 분은 아예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 분의 유모들 중 한 명은 몰락한 가문 출신의 양반이었는데, 개는 조상신이니 절대 먹으면 안 된다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귀신 쫓는 개로 믿은 삽살개, 1743년>

역시 일제 시대에 태어난 명망 있는 개성 양반가 후손 분의 증언도 비슷했다.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고 하셨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르신들 중에 오직 1960년대까지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는 분만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분은 복날 개고기를 먹는 것은 전통이라고 열변을 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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