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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초원길, 비단길, 아편길과 삼합회(4)

중국 속 유목사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는 싼 값의 노동력을 제공해 물건을 생산하고 또 그 물건을 소비해야 했다. 즉, 공장과 소비 시장이 되어야 했다. 식민지 생산품 중 홍차와 같이 비싼 물건은 유럽 등지로 가져와 비싼 값에 팔았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진 영국 왕 미치광이 조지 3세>

요즘으로 치면 OEM(위탁 생산 시스템)이었다. 미국은 홍차 관세로 영국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중국 직수입이 아니라 일단 영국에 한 번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왔으니 미국 홍차 값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 아편굴, 1896년>

홍차 값에 발끈해 영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달리 청나라는 영국의 아편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졌다. 아편을 사려고 낸 돈(은)은 영국으로 흘러들어갔고 영국은 부자가 되었다. 


<몰수한 영국 동인도 회사 아편을 처리하는 청나라 관리, 1839년>

대신 청나라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 상선에서 아편을 몰수해 태워 버렸다. 청나라 조정에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성적으로 국제 정세를 판단할 인재가 없었다.

<상하이에 정박한 영국의 아편운반선, 1908년>

아직도 잘 나가던 건륭제 시절인 줄  착각하고 영국을 얕잡아 본 것이다. 신나게 아편장사를 하던 영국 놈들은 아편을 빼앗기자 영국 군함을 불러왔다.


이게 아편전쟁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중국은 영국을 상대로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중국과 유럽을 연결한 무역로를 장악한 민족이 사실 상 지배했다. 

그게 흉노, 선비, 돌궐, 위그르, 거란, 여진, 몽골, 청이었다. 초원길, 비단길에 이어 아편길이 뚫렸으니 영국이 중국을 지배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제 2차 아편전쟁에서 도망치는 청나라 군대, 1860년 >

그런데 아편전쟁에서 이긴 영국은 의외로 홍콩(마카오는 덤으로) 하나 받고 청나라 황실 개는 납치하는 데 만족하고 중국에서 물러났다. 영국은 프랑스와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중일전쟁 당시 청나라 총리와 관리들, 1894년>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인도 차이나 반도 등에서 누가 더 많이 식민지 땅을 먹느냐로 영국과 프랑스는 사사건건 싸웠다. 대신 중국을 침략한 건 일본이었다. 

이런 걸 전문용어로 어부리지라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최신식 군함을 건조해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을까? 

<중일전쟁 당시 일본 군함, 1894년>

미국이 돈을 빌려주고 영국이 군함 제조 기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청나라와 아편전쟁 때 싸운 영국제 군함이 일본에 수출돼 청나라와 다시 싸운 것이다. 진 놈과 또 싸우니 청나라가 질 수 밖에. 


청일 전쟁 때는 확실치 않지만 러일 전쟁 때는 영국 군함을 수입하는 돈을 미국이 빌려줬다. 일본은 어부리지에 손짚고 어린이 풀장에서 헤엄치기로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을 식민지배 한 것이다.  


<19세기 삼합회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장>

영국 동인도 회사 놈들에게 아편을 떼온 청나라 아편 도, 소매상이 신나게 아편을 팔아먹고 있을 때 국제 사회 이면에서는 이렇게 쿵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 누가 청나라에 아편을 유통시켰을까? 

아편을 중국 전역에 퍼트릴 만한 조직력을 가진 이들은 누굴까? 공교롭게도 이 시기부터 삼합회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청 왕조의 탄압으로 지리멸렬 지하에 숨은 삼합회는 19세기를 기점으로 확 일어났다.

<프랑스의 청나라 식 아편굴, 1904년>

 막대한 조직, 재산은 갑자기 어디에서 생겼을까? 참고로 지금도 삼합회의 주요 사업은 마약 판매다. 삼합회든 누구든 청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해 아편을 뿌린 거라면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약 400만 명의 청나라 사람들이 아편중독이 되었다. 그런데 청나라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중국의 아편굴이 유행했다.  

<아편을 하는 홍콩 여인, 1915년>

더 이상한 건 어떻게 1874년에 청나라 사람이 영국 런던까지 가서 아편굴을 운영할 수 있었는냐는 거다. 영국 사람과 손을 잡은 청나라 인이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아편 장사를 허용한 영국 측 배후는 누구고 중국 측 배후는 누구일까? 100년 간 영국에 조차된 홍콩에서 삼합회와 마약이 기승을 부린 근원도 따지고 보면 결국 청나라 마약상과 영국의 협력관계에 있지 않을까? 

61. 홍차 한 잔이 불러온 청나라 아편 전쟁(2)

중국 속 유목사

황실 개를 옥새처럼 사랑한 청나라는 아편으로 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향긋한 홍차 한잔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그 개호로로 잡*들이 홍차 대신 아편을 줬기 때문이다. 

<A cup of tea, Mary Cassatt작, 1880~1년, 미국>

그러고 보면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서 죽자 사자 독립한 것도 영국이 차에 관세를 너무 비싸게 부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차는 17~8세기 이후 영국 사회에서 중요했다. 


<사냥 후 쉬는 남자와 개들, 1781~1850년,  William Westall>

이 그림을 보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영국남자가 총을 옆에 세워두고 졸고 있다. 남자 곁에서는 하녀가 홍차를 준비하고 있다. 은 산업화에 성공한 후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주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국 식민지 무역의 정수를 보여주는 1787년의 일러스트 >

18~19세기 영국 식민지 무역의 정수를 좀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을 보자. 흑인 하인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으로 헐값에 사왔을 것이다. 

최신 스타일로 꾸민 여자의 옷은 인도산 모슬린이다. 그리고 여자가 마시는 차는 아마도 당시 가장 인기있던 중국 산 홍차였을 것이다.

<영국식 아침식사, 1785, Gerard Vidal작, 프랑스>

아프리카 흑인 노예, 인도산 모슬린, 홍차는 영국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다. 이 중 중국산 홍차가 질량과 견적 대비 가격 면에서 제일 비쌌다. 


18세기~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한 듯한 영국식 아침 식사에는 반드시 홍차가 포함되었다. 

<이른 아침의 방문객, 1778 년, 런던>

영국 런던에 살던 상류층 가정을 방문한 손님에게 대접할 홍차를 내오는 하녀가 그려진 그림이다. 영국인은 적어도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애프터눈 티)은 반드시 홍차를 마셨다. 

온 영국인들이 매일 금붕어처럼 마셔대던 그 많은 홍차는 어디에서 왔을까? 식민지에서 왔다. 지금도 세계 3대 홍차로 다즐링과 우바, 기문 홍차를 꼽는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런던 상류층을 풍자한 그림, 1804년 > 

 

다즐링은 인도에서 우바는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데 둘 다 영국 식민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는 무단으로 차 농사를 지으면 사형을 시킬 정도로 엄하게 차 생산을 통제했다. 

<원숭이가 찻잎을 따게 해서 만든 영국 식민지 산 홍차, Rudolph Ackermann 작품, 1821년>

오직 중국 홍차만 공정 무역을 해야 했다. 즉, 식민지 경제 원리가 아닌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야 했다. 기문 홍차만 식민지가 아닌 지역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찻집에서 차를 판매하는 모습, 청, 1801~1850년>

지금도 중국 안휘성 휘주에서 생산되는 최상품 기문 홍차는 소량의 주문 생산만 하거나 판매하는 시기에 맞춰 현지에 직접 가야만 살 수 있다.


휘주의 기문 홍차 상인에 의하면 그 옛날 영국 상인들이 차를 사갈 때도 휘주산 기문 홍차만은 직접 품에 품고 가져갔다고 한다. 

<중국 상인 모양 Tea caddy (차 보관 통)도자기, 영국, 1745-50년

가장 인기 있고 값비싼 중국 홍차의 생산과 가격 통제가 불가능하자 영국은 당황했다. 비싸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라 막대한 은(당시 돈)을 청나라에  줘야 했다.  

<영국이 찻값으로 청나라에 지불했을 은괴, 청, 1828년>

제국주의 시대 영국 식민지 무역은 곧 시장 독점권을 가진 동인도 회사의 실적을 의미했다. 왜 동인도 회사냐면 배를 대기 쉽도록 인도 동부 해안가 항구에 세운 회사였기 때문이다.

<인도 캘터타 항구를 출발한 아편 운반 용 쾌속선, 1856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세운 목적은 간단하다. 사실 상 영국 정부, 대 상인, 군대의 합작품인 얘들은 인도 동인도 항을 기점으로 버마, 차이나 반도, 중국까지 다 식민지로 만들 심산이었다. 

<인도의 아편 공장, 1900년>

그 기세 등등하던 대영제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 홍차 하나로 삐끗한 것이다. 그래서 한 짓이 쌩 양아치 짓인 아편 장사였다. 그러면 청나라에 판 그 많은 아편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도에서 왔다. 아예 인도에 아편 공장을 세운 영국 동인도 회사는 쾌속선을 타고 중국 남부와 동부 해안으로 신나게 아편을 퍼다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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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주나라 왕비가 흉노족인데 웬 중화사상 뽕?

중국 속 유목사

비단 찢을 때마다 왕을 홀리는 웃음을 지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포사는 결국 왕비 자리를 꿰찼다. 그러자 열 받은 전직 왕비가 북방 기마 유목민인 견융을 끌어들여 주 왕조를 멸망시켰다.


여자 하나 잘못 만나 나라가 망한 건 맞지만 정확히는 비단 찢다 망한 게 아니라 흉노의 침입으로 망한 것이다. 견융, 개 견 자를 쓰는 것부터 범상치 않다. 개를 섬기는 오랑캐, 즉 흉노다.

 

<흉노 혹은 선비족 인형, 기원전 4~3세기>


여불위와 진시황의 민족인 초나라 묘족도 조상이 개였다. 주 나라 마지막 왕이 쫓아낸 왕비 역시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중국 유물에 개와 불새와 같은 북방 기마 유목 왕조의 상징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나라부터 따지자면 모든 고대 중국 왕조가 북방 기마 유목민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셈이다. 날개달린 말과 신성한 나무, 그리고 불새는 전형적인 북방 기마 유목민의 상징이다. 

<불새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불새는 개 머리를 한 새 혹은 사자나 남자 얼굴을 한 새로도 변한다. 즉 신성한 나무와 빛의 왕국을 믿는 기마 유목 민족의 종교다.


한 왕조 유물 중에 신성한 나무 위에 앉은 불새를 활로 쏘는 남자 모습이 있는 걸로 봐서는 키푸로스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내부에 잔존한 흉노 세력을 마침내 몰아냈다고 선포한 것 같다. 

<한 왕조의 천마와 기원전 1세기 흉노의 천마>



쫓겨난 왕비의 한풀이로 주나라가 망하자 무려 550년 간 중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세워졌다 망했다는 춘추전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약 3년 여간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 국민이 얼마나 배고팠는지 떠올려 보자.

<불새를 겨냥하는 궁수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최소 그 상태로 550년을 서로 죽이며 지냈다면 살아남은 사람들 상태가 정상일 수 있을까? 재물 가진 지배층이야 살 길이 있다 쳐도 백성들은 달랐다.

육체적인 고통과 당장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처절한 배고픔 속에 지배층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당연했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중화사상 개념도>

그래서인지 이 시기 학자들은 중화사상을 퍼트렸다. “중국인 외의 모든 인간은 모두 짐승(오랑캐)! 그러니까 우리 중국 최고!” 라는 믿음이다. 이집트는 앗시리아와 싸웠고 고구려도 당나라와 싸웠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외교도 하고 교역도 했다. 중국 안은 인간 세계, 중국 밖은 짐승 세계라는 이분법적 믿음은 굶어 죽는 백성들에게 뽕 맞은 거 같은 정신적 만족감을 줄 수는 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는 중국인이니까 훗, 그나마 짐승 같은 저 놈들보다는 백 번 나아.”라고 자뻑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주나라 마지막 왕비가 정말 흉노족이라면 이 중화사상 뽕은 완전 헛소리다.

이런 선전·선동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것이 유교였고 그 대표 주자가 맹자와 공자였다. 늙어 죽을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한 공자는 한나라 유방이 유교를 국가 정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책, 청,  17~20세기>


중화사상 역시 20세기 모택동이 국가정책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것이다. 한편, 중화사상 뽕으로 버티던 550년의 춘추전국 시대를 흉노설이 떠도는 진시황이 통일 했지만 얼마 안 가 내란이 터졌다.

고대 중국 역사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내란 아니면 북방기마유목민이 쳐들어왔다. 결론은 중화사상 뽕이든 뭐든 백성들은 마음 편히 농사조차 짓지 못했다. 그래서? 또 굶어죽었다. 계속 굶어죽었다.

<부엌 목매달아 잡은 개 추정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여차하면 짐 싸 짊어지고 멀리 떠날 수 있는 유목민과 달리 농경민인 중국인 농사를 못 지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식량이 부족하면 뭐든 먹는다.

쥐 고기도 먹고 개고기도 먹고 사람 고기도 먹는다. 산둥성에서는 책상 다리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중국 역사에는 가뭄이나 전쟁으로 성 안 인구가 반으로 줄었다는 기록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유민도, 명, 16~17세기>

 

시체를 먹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사냥해 잡아먹어 인구가 반으로  준 것이다. 한나라 유방이 적장의 고기를 먹거나 공자가 사람 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긴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당시 법 상 반드시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사람고기도 좋아했고 개고기도 좋아했다. (모택동도 개고기는 좋아했다)

<장막 안에서 여인과 함께 있는 황제, 한, 기원전 232 경 추정>

백성들은 미국 드라마 ‘워킹데이’ 속 좀비들처럼 서로를 잡아먹고 먹혔지만 지배층은 달랐다황금과 권력을 쥔 그들은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지금과 같은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헤맸고 황제들은 금단을 먹거나 한식산을 먹었다. 초기 도교 도사들의 주요 고객도 이 황제, 귀족, 부호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치료를 할 때나 만났다. 한의사도 겸한 그들은 개고기를 약으로 썼다. 

<목줄한 개 석상, 한, 1~2세기>

 

고대 개고기를 약으로 쓴 건 중국 한족만이 아니었다. 앞서 살펴봤듯 ‘개 새’를 믿은 지역 즉 개를 죽음의 신 아누비스로 숭배한 이집트, 여신 굴라와 신성한 개를 믿은 바빌로니아에서도 개고기를 약으로 썼다.

그러나 중국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신전의 관리 하에 아주 엄격히 개고기를 약으로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아무런 제제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개를 잡아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농'의 처방대로 약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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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당나라를 접수한 개숭파 소그드 상인

중국 속 유목사

7세기 초에서 8세기 사이 당나라 왕족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허리띠 장식은 호탄  옥으로 만들었다. 허리띠 문양을 자세히 보면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듯한 악사가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아시아 타림 분지에 위치한 호탄은 지금의 위그르 자치구 허텐 지역에 있던 도시 왕국이다. 우리나라에도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호탄 산 옥은 아주 유명했다. 호탄 하면 옥이었다. 

 

<투르크 호탄 산 옥으로 만든 옥 허리띠 장식, 당나라, 7세기초~8세기> 

당시 당나라 전역에는 호탄  옥이 크게 유행했다. 여성들은 호탄 산 옥으로 빗을 만들었고 고위 관리들은 호탄 산 옥으로  허리띠 장식을 만들었다. 호탄, 쿠차, 고창 등 실크로드 길목에 있는 거점 도시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공교롭게도 세 도시 모두 현재 위그르 지역에 위치한다. 위그르 타림 분지를 중심으로 남쪽이 호탄, 북쪽이 쿠차와 고창이었다. 언뜻 굉장히 멀어보이지만 중앙아시아 대륙 전체 면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 정도 거리는 이웃 사촌이다. 

<7세기 초~10세기 초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국제 관계>

패권을 잡은 모든 기마 유목 왕조는 반드시 이 지역을 지배했다. 당 시기인 7세기 초에서 10세기 초, 이 지역을 지배한 왕조는 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리던 돌궐과 위그르였다. 

호탄 산 옥으로 만든 허리띠가 당나라에서 유행하고 있었을 때도 호탄과 쿠차는 돌궐과 위그르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 호탄 산 옥을 수입해 당나라 전역에 유통시킨 사람들이 소그드 상인이었다. 소그드 상인은 국제 문화 교류 전문가였다.

<위그르 고창 왕국에서 활동하던 소드드 상인, 9세기>

소그드 상인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가 따라갔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개숭(배하는) 파였다. 5~6세기 이후 그들이 믿은 종교는 마즈다 교(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불교, 경교(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였다. 

주르르 늘어 놓으니 뭔가 되게 많아 보이는데 결국 마니교 하나로 정리된다.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기독교를 섞어 놓은 것이 마니교이기 때문이다. 마니교는 시리아 교회 계통인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와 매우 밀접하다.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것이 경교다. 중국 무협 소설에서는 선악 구분이 분명하다. 정파와 사파가 있다. 배화교(조로아스터교)와 경교는 언제나 사파의 대표 주자로 나온다. 그만큼 원한이 깊다는 얘기다. 

<위그르 고창 왕국의빚 독촉 편지. 마니교 신자가 소그드 글자로 작성, 9~13세기>

어느 날 갑자기 종교도 다른 외국인들이 막 들어와서 상권 다 장악하고 돈놀이까지 한다면 미워할 수밖에 없다. 견된 유물에 의하면 마니교 신자인 소그드 상인은  사채 놀이도 같이 한 것 같다. 

한편, 경교는 기독교인지라 기독교 역사에 포함된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종교학자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종교학적 교리가 아닌 역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니교와 경교는 같다.

<위그르 고창 왕국의 위그르  귀족, 8~9세기>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아후라 마즈다가 조로아스터의 몽골 식 이름이듯 네스토리우스파와 경교, 마니교는 같다. 위그르 지역을 여행한 탐험가와 학자들은 14세기 경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마니교와 경교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니교가 당나라에 전해질 때 경교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긴 이유는 무시무시한 박해 때문으로 추정된다. 3세기 처음 마니라는 사람이 마니교를 만들었을 때 페르시아 제국 황제는 기꺼이 포교를 허락해 주었다. 

<페르시아 파르티아 제국이던 파키스탄 지역에서 발견된 그릇. 파르티안 기법. 5세기>

마니의 어머니가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제국에서 아주 높은 신분이었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니 집안의 뒷배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좀 무시한 느낌이다. 

"뭐? 마니교? 그게 뭔데? 그냥 하게 둬." 하는 느낌. 마니교는 기존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초기 기독교, 불교를 모두 깠다. 마니가 이 종교들을 비판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니들 다 틀렸대." 

"종교 지도자들이 신과 인간 사이에 껴서 제 멋대로 이상한 종교로 만들어 버렸대. 이제 걔네 버리고 내가 전하는 진짜 신의 말씀을 듣고 나를 따라와.” 이거였다. 간단한 만큼 파격적이었다.

<위그르 고창 왕국의 마니 교회 터에서 발견된 마니교 신자, 10세기>

마니는 조로아스터와 기독교, 불교를 완전히 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기존 종교가 발끈한 건 당연했다. 인류 이래 모든 종교는 권력과 결탁한다. 원시 샤먼조차 종교 지도자는 최고 권력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마니교가 커져도 너무 커졌다는 거였다. 마니가 죽은 후 마니교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을 휩쓸었다. 로마 카톨릭 교리의 기초를 만든 아우구스티누스 조차도 원래는 마니교 신자였다. 

<위그르 고창 왕국에서 발견된 마니교 신자, 10세기>

페르시아 제국 황제 중에도 마니교 신자가 있었다. 마니교가 너무 커지자 페르시아 제국은 당연히히 위기를 느꼈다. 포교 허용에서 금지로 정책이 바뀌었고 마니교 신자는 무조건 죽였다. 

로마 제국에서는  콜롯세움에서 던져 사자 먹이로 주는 처형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마니교 신자라고 하면 죽으니 마니교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종교로 위장할  밖에 없다

<당나라 황실에서 키우던 페키니즈, 9세기>

쌍둥이 종교가 시리아 안티오크  기독교인 것 같다. 313년 로마 제국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해 주기 전까지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는 마니교와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무사했다. 

초기 기독교 중 유독 페르시아 제국과 가까운 시리아 안티오크 파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가 발전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시리아 안티오크 파 기독교가 4세기 이후 네스토리우스 파가 된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에 전해진 경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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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양귀비와 신발 물어뜯는 당나라 황실 개

중국 속 유목사

신라와 밀접한 관계인 당나라에는 개 전용 사원이 있었다고 했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양귀비일 것이다. 지난 갑자기 실종이 되어 세계의 관심을 받은 판빙빙이 주연한 양귀비를 보면 궁정 여인이 나오는 장면은 쇄골 아래부터 화면이 잘려있다


제작진은 나름 충실하게 당나라 시대 의복을 고증 했는데 결과물이 너무 외설스러워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거액을 투자한 제작진 측은 화면에서 여성의 가슴 바로 위를 자르는 방법을 택했다

<바둑 두는 당나라 미인, 7~10세기>

따지고 보면 가녀린 판빙빙 몸매 자체가 고증 실패다당나라 시대 여성 복식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항아리처럼 둥근 몸매와 터질듯이 풍만한 가슴, 통통한 볼을 가진 여인이 미인이었다

당 대 최고 미인 양귀비 자태는 아마 많이 포동포동 했 것이다말타는 양귀비 그림만 봐도 육중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진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송 시대 그려진 당 황실 연회 그림을 보자.

<양귀비와 현종의 연애를 그린 오대 혹은 북송 시대 그림 10~12세기 >

다른 궁정 여인들은 사랑이 이뤄지길 기원하며 칠월칠석 연회를 즐기고 있는데 양귀비로 추정되는 여주인은 자고 있다. 저 위로 살짝 문을 열어주는 시종들이 보인다. 

한밤중에 현종이 몰래 찾아와 자는 양귀비를 시녀가 깨우는 장면이다. 이렇게 역사에 남을 만큼 티 나게 물고 빨던 현종은 반란군을 피해 도망치던 중에 제 손으로 양귀비를 죽였다

<말 타는 양귀비와 지켜보는 현종, 13세기>

호위부대가 저 여자 안 죽이면 당신 안 데려간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755 도망치던 현종 행렬 그림을 보면 행렬 뒤쪽에 죽은 모습의 현종이 보인다. 방금 양귀비를 죽인 현종이다

행렬 앞에는 주인 없이 빈 안장을 태운 말 한 마리가 있다. 양귀비가 타던 말이다. 호위부대가 결사거부할 만큼 양귀비는 현종 말년에 나라를 망하게 요물로 욕을 먹었다.  

<755년 피난길에 양귀비를 죽이고 도망치는 현종,  남송(1127–1279)>

그런데 정말 나라를 망칠 만큼 사랑했는지 의심스럽다. 그랬다면 가차없이 죽이는 대신 호위부대를 죽이든지(불가능) 양귀비와 같이 자살을 했을 것 같다. 또 만약 그랬다 해도 당나라가 망한 건 양귀비 탓이 아니다

책임은 오너가 지는 법이다. 현종은 무능했고 뒷배인 위그르가 약해지자 국방과 경제가 무너지면서 나라가 망했다신라 선덕여왕에게 나비없는 모란 꽃 그림을 보내 모욕했다는 태종 이세민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소용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그르와 왕조는 쌍둥이 같은 관계였다당나라 군사는 위그르 기마 부대가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도 위그르 군대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경제는 위그르와 한팀인 소그드 상인이 맡았다. 위그르의 거점은 당시 실크로드를 장악한 쿠차왕국과 호탄 왕국이었다. 즉, 당나라의 군사와 경제 거점이 위그르 제국의 수도였다. 당나라는 시작부터 위그르 돌궐 기마부대 도움을 받았다

<실크로드 쿠차와 호탄 왕국에서 활약한 귀족 기마 무사, 6~7세기)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위그르는  왕조를 도와 줬을까? 학자들은 건국 초기 당 황실 세력이 투르크 계 유목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 왕조에는 황족만 키울 수 있던 사자개가 있었다. 8세기 자유로운 모습의 당 황실 여인을 보자.  

풍만한 자태에 편안한 모습이다. 한 쪽 신발을 벗어 무릎에 걸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벗어 놓은 신발 옆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고 강아지는 주인 신발을 신나게 물어뜯고 있다. 1300년 전에도 개는 주인 신발 물어 뜯기를 좋아했나 보다. 

<편안한 자세로 앉은 황실 여인과 개, 8세기>

이런 작은 개를 소매 속에 넣을 수 있는 개라 하여 랩독(Lapdog : 소매 개)이라 한다. 당나라 시대 황실 여인 소매 속에서 자란 이 개들은 페키니즈로 추정되는 사자개다. 사자개는 유목 왕조들 사이에서 마치 옥새와 같다 했다. 

당 건국 세력이 사자개를 키울 수 있던 유목 왕족인 것이다.  늑대 머리 깃발 휘날리던 돌궐이 망하고 역시 늑대머리 깃발 휘날리던 위그르가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자 당나라도 위그르 밑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당 황실 여인의 신발을 물어뜯는 강아지,  8세기>

변한 것은 종교 외에 거의 없었다현종 들어 당나라는 망하기 직전까지 적이 있다. 때마다 위구르 기마 부대가 출동해 구사일생 살아났다. 대가는 2 필의 비단과 당나라 공주였다.  

시기 강대국이던 티베트가 당나라 장안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위그르 기마 부대가 출동해 구해주었다. 대가는 역시 당나라 공주와 비단이었다 밖에도 위그르는 견마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고창 왕국 지역을 지나는 당나라 상인 행진 7~8세기  추정>

견마무역은 중국 비단과 초원의 말을 교환하는 무역이다. 장사를 누가 했다? 소그드 상인. 소그드 상인은 누구다? 마니교도. 위그르 국교는 뭐다? 마니교마니교의 근거지는 어디다? 위그르 제국인 쿠차와 호탄. 

당나라 비단은 거미줄처럼 촘촘한 소그드 유통 망을 타고 중앙아시아와 유럽(비잔틴 제국)으로 팔려나갔다 왕조의 모든 국가 시스템이 위그르, 소그드와 얽혀있었다하나가 무너졌고 나머지도 우르르 망했을 뿐이다.  양귀비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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