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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백제는 일본을 지배했나? 만주는?

한국 속 유목사

임나일본부설, 한반도 일본 지배설은 별 의미 없다고 본다. 아마 당시 한반도와 일본을 지배한 계층은 기마 유목 왕조인 제 3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기마 유목 왕조의 국제 커넥션이 6~7세기 중국 선비족 왕조와 백제, 신라, 일본을 반가사유상으로 연결해주었을 수 있다. 

특유의 기마 유목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신성한 개를 믿는 관념이다. 신성한 개는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믿은 알타이 샤먼 즉 텡그리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날개 달린 개 신앙과 한민족의 치우 신앙>


텡그리 신앙은 빛을 믿는 신앙이다. 빛의 종교에서 개는 신의 사자이거나 신 그 자체, 혹은 지상의 왕을 상징한다. 하늘에 있는 신이므로 개에게는 날개가 있다. 날개 달린 개는 곧 신이다. 날개 달린 신성한 개를 믿은 지역을 보자. 

중앙아시아 대륙으로 국한해서 봤을 때 고대 중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포함된다. 이 고대 빛의 종교는 고대 4대 문명권에서 각자 다른 신앙으로 발전했다. 중국 황하 문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개와 개고기로 보는 세계 5대 문명권>

패권을 장악한 기마 유목 왕조에게는 왕조를 상징하는 신성한 개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지배층에게도 신성한 개가 있었다. 그 신성한 개가 티베트탄 마스티프에서 유래되는 마스티프 계열의 사자 개다.

신라 왕조에서 왕족만 키울 수 있던 삽살개는 단군과 함께 제단에 모셔진 신성한 개였다. 그 신성한 삽살개를 일본 만주군은 개 가죽 군복으로 만들어 멸종시켰다. 그런데도 현재 한국인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산수도깨비 문양 벽돌, 백제, 6세기 추정>

또 삽살개가 단군과 함께 할 정도로 신성했다는 사실과 신라 왕족들만 키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삽살개든 뭐든 한국에 사는 모든 개는 언제든 때려잡아 먹을 수 있는 식자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심한 비약이라고?

애지중지 키우던 내 개를 이웃이 납치해 때려죽여 먹어도 고작 벌금 몇 푼만 내면 되는 되는 것이 현재 한국 실정이다. 신성한 개를 둘러싼 고대 기마 유목 왕조와 한반도, 일본의 역학 관계는 당나라가 멸망 하면서 깨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


신라 성골 시대가 막을 내리고 진골 시대를 연 통일신라가 국풍(신라 문화)를 버리고 화풍(중국 문화)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한반도의 중국화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망한 왕조의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낙랑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대사 학계는 고구려, 신라, 백제 영토가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속 시원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520~534년, 국보>

홍산문명권에서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면서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 한국 왕조 영토에 만주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지만 국뽕이라고 비난받았다.

정작 국뽕 한 사발 마신 건 중화사상을 발전시킨 고대 중국인인데 말이다. 분명한 것은 통일신라 영토가 고구려, 백제, 신라 땅을 합친 것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 땅은 그대로 발해가 가져갔다. 그럼 백제 영토는?

 <7세 통일신라 이후 국제 관계와 개에 대한 개념

663년 백제가 멸망하고 그 지배층은 어디로 갔을까? 의자왕과 삼천궁녀처럼 전부 다 물에 퐁당했을까? 나라를 잃으면 왕이 목을 잘리는 것은 중국 농경민적인 관점이다. 

말 타고 배 타고 이동하는 것이 업인 유목민은 여차하면 튈 수 있다. 백제의 경우 중국 대륙과 요서 지방,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교역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국제 교역로를 따라 배 타고 도망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매 사냥하는 거란 혹은 몽골 족, 9~10세기>

전 왕조의 모든 왕족을 다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전 왕족을 전멸시킨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 튈 놈은 튀고 남을 놈은 남고 잡힐 놈은 잡히는 것이 유목 왕조의 특성이다. 

도망치는 전 왕조의 왕족은 언제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끊임없이 왕조 부흥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전 왕조 부흥 운동을 일으키지 않은 건 고려가 유일했다. 왜? 이성계가 다 죽였으니까. 


<날개 달린 개와 피닉스 신앙 지역>

자, 그럼 어디로 튀었나? 우리 역사학계는 멸망한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지배했다는 가설은 신나게 떠든다. 그런데 중국 대륙이나 요서 지방으로 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또 입을 다문다. 

중국으로 튀어서 거기를 휘젖고 다녔을 가능성 자체가 국뽕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중국만 나오면 국뽕이라는 이름으로 입을 틀어막는지 모르겠다. (중국 뽕을 말아 드셨나?)

<백제의 산수봉황무늬 벽돌, 6세기 추정>

백제 지배층이 중국 북부나 만주 지역으로 갔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기존 기마 유목 왕조와 합류하거나 또 다른 왕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존 왕조에 합류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결혼이다. 같은 기마 유목 왕족이니 적어도 결혼 상대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57. 임나일본부? 그래서 만주는 누구 땅?

한국 속 유목사

이름도 생소한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전쟁이 치열하다. 전방 후원분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3~6세기 일본과 한반도 남부에서 유행한 독특한 무덤 양식이다.

이 무덤이 4~5세기 일본에서 떼로 건설되면서 임나일본부 설의 근거가 되었다. 왜냐? 전라도 광주 등지에서도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 개 석상, 19세기, 일본>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째 크기나 숫자, 상태로 봤을 때 일본 무덤보다 못한 거 같았다. 이게 고대 한반도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중 하나이다. 흠, 과연 그럴까?

일본 역사교과사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역사학자가 유물을 미리 심어놓고 발굴했다고 뻥친 사건은 유명하다. 일본은 그 전방후원분을 거의 발굴하지 않는다. 추측은 난무하지만 이유는 대충 하나로 모아진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가짜 유물 사건, 2000년 11월>


유물이 한반도 고대 왕조와 너무 유사해서 차마 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기마유목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임나일본부설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누가 지배 했으면 뭐 어쩔건가?

지배 영토가 중요하다. 앞서 기마유목민의 정의를 설명하면서 언어와 인종을 제외한 모든 문화가 같다고 했다. 홍산문명은 아직 의견이 분분하니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밝혀진 우리 역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는 낙랑이 아닐까 싶다.

<왕의 상징인  개 황금 장식, 기원전4~3세기, 스키타이 혹은 흉노>

그러나 낙랑 역시 갈 길은 멀다. 우리 고대사 학계는 아직도 낙랑의 위치만 가지고도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냐, 중국 요서에 있었냐, 이걸로 싸우는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고대 중국 북부 역사를 낙랑이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물로 보면 중국 북부는 기마유목 왕조(흉노)가 지배했다. 만약 낙랑이 흉노와 관계있다면 흉노가 지배한 영역도 한국인의 조상 땅이 된다. 

<요서와 늑도, 일본을 연결하는 1~2세기 고대 한반도  해상 추정 교역로 >

조상 땅 찾기로 제일 성공한(욕 먹는) 나라 이스라엘 못지 않은 조상 땅을 낙랑 요서설로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요서는 즉 만주다. 다시 만주 벌판 개장사 얘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낙랑 요서설이 맞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로 소장하고 있는 벨트 유물이 그 근거다. 우리나라 역사계는 국보인 이 금제 허리띠 고리를 두고도 연대 추정조차 못하고 있다.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가도 낙랑 혹은 삼한 이렇게 모호하게 되어 있다. 연대는 더 기가찬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란다. 600년의 차가 있다. 개나소나 다 하는 탄소연대측정이라도 해보지, 아예 연대를 밝히겠다는 의지가 없다. 


 

일부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우리 국보인 금제 허리띠가 가짜라고까지 주장하는 형편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금제 허리띠 유물과 똑같은 신수문 금제 허리띠 유물이 중국 북부, 즉 요서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외국 학계에서는 친절하게 연대를 밝혀주었다. 1세~2세기 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세기에서 2세기 사이 낙랑의 지배층은 중국 요서 지방과 교류했다고 볼  수 있다.

<흉노 추정 신수문 금 허리띠 1~2세기, 북부 중국 >

고대에 금은 왕을 상징했다. 같은 금제 허리띠를 착용한 왕이 낙랑과 요서지방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낙랑은 요서지방에 위치했다. 여기에 강아지 유물과 유적을 더해보자.

1세기 한반도 경상남도 늑도에서는 개에게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고대 해상왕국 페키니아도 수많은 개 무덤을 만들었다. 늑도와 페키니아의 개 무덤은 중국 앙소문명권에서 발견된 개 뼈 무덤과 다르다.

<기원전 600~500년 페키니아의 개 무덤과 개 토우 발견 지역> 

잡아먹고 발라낸 뼈를 쓰레기처럼 묻은 것이 아니라 죽은 개를 온전한 형태로 장례를 치러준 것이다. 늑도와 페키니아에서는 개를 숭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흉노는 개와 관련 많은 유물을 남겼다.

낙랑을 사이에 두고 흉노와 한반도, 일본이 해상 무역로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든 뭐든 간에 고대 한반도와 일본은 교류를 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4세기 후반부터다. 중국 역사서에 의하면 일본에는 말이 없었다.

<말 병풍, 토사 히로치카 작, 일본, 17세기>

원래 없었으니 쭉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4세기가 되면서 일본 고분에서 말과 관련된 부장품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민망스런 신라의 토우 인형 같은 토기 부장품들과 함께 말이다.

당연히 4세기 후반 기마 유목민이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을 정복했다고 보는 가설이 생긴다. 그 기마민족 정권이 야마토 정권이라고 한다면 5세기 이후 일본의 지배층은 기마 유목 왕조라는 말이 된다. 신라가 일본에 개를 배에 태워 보낸 이유다.

<일본 국보 1호 고류지 목조미륵보살상, 623년, 일본>

같은 기마 유목 왕조니 옥새와 같은 신성한 개를 선물한 것이다. 앞서 6세기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3호를 예로 들어 중국 선비족 왕조와 백제, 일본의 지배층이 교류했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류지는 신라인이 세웠으며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도 신라에서 왔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선비족 왕조, 백제, 신라, 일본 지배층이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6~7세기 중국 선비족 왕조인 북위와 백제, 일본, 신라의 반가사유상을 비교한 것이다. 

<6~7세기 선비족, 백제, 일본 반가사유상 비교> 

고도로 숙련된 이 불상 제조 기법은 이후로 명맥이 끊겼다. 지배층이 바뀌었거나 기술자들이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백제는 해상 무역로를 통해, 고구려는 만주를 기점으로 한 육로를 통해 중국 대륙(중앙아시아)과 교류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승려는 신라방이라는 해상 무역로(조직)를 통해 당나라 유학을 갔다. 세 나라가 협력 관계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쇼토쿠 태자는 44세가 되면 개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일본에 개고기를 수출했을 가능성?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혀 없다.


금동여래반가사유상 83호, 낙랑요서설, 낙랑평양설, 백제방, 신라방, 일보 국보 1호, 일본 목조미륵보살상, 임나일본부, 전방후원분, 평양석암리금제 띠고리, 후지무라 가짜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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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 큐에 신선이 될 수 있던 한국 도교

한국 속 유목사

고려 유물을 보면 유독 청동 거울이 많다. 잘 닦으면 또렷이 보이는 은제 거울도 아니고 청동 거울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거울은 왕을 상징하거나 제사에 사용했다.

교역을 많이 한 고려 시대 청동 거울도 제사에 사용했다. 배를 타기 전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반드시 청동 거울을 바다에 던졌다. 청동 거울을 던지던 고려의 제사는 조선 시대 제사와는 다르다.

<황비창천명형 청동 거울,  고려, 918~1392>

유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 고대부터 존재한 한민족 고유의 도교와 무교, 불교가 합쳐진 형태의 제사라고 본다. 조선 지배층은 전통 도교 뿐 아니라 1392년 조선 건국 이전의 역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조선 지배층에게 반만 년 역사 중에 단군은 중국에게 가르침을 받은 기자 조선부터 시작된다. 고구려·백제·신라·통일신라는 존재조차 하지 않은 역사이고 고려는 역사에서 지워버릴 만큼 형편없는 나라였다.

<은제 신선 경치 무늬 화장품 그릇, 고려, 숙신공주 묘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식으로 4,500년을 날려먹고 개고기는 전통이니까 먹으라는 헛소리를 했다. 열에 서넛이 굶어죽는 흉년에 소작료는 70%나 받아서 챙긴 돈으로 화로에 소고기 구워 먹으면서 말이다. 소시오패스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다수 굶주린 조선 백성들은 기꺼이 개고기를 먹었을까? 고려의 문화와 종교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개고기는 4,500년 우리 역사 내내 강력한 금기였다. 500년 조선 역사 중 극히 일부만이 개고기를 먹었다.

<쌍용문 청동거울, 고려, 918~1392>

대놓고 못 먹으니 복날이면 으슥한 산으로 개를 끌고 가 고대 중국인을 흉내 잡아 먹었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곧 고려 백성이었다. 인간이란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문화와 금기는 잘 바뀌지 않는다. 작정하고 금기를 버린 조선 지배층이나 1945년 이후 북한, 197·80년대 이후 남한 내 운동권 세력을 제외하고 말이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중국을 추종했다.

<무덤 화상석 중 부엌 그림, 한, 2세기>

1907년 고종의 특사인 헐버트가 남긴 책을 봐도 조선 말기까지 개고기는 가장 비천한 계층이 먹는 음식이었다. 예를 들어 복날 머슴이 개고기를 먹거나 산속에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개고기를 먹었다.

조선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외국에 알린 사람들은 산 속에 숨어 있던 외국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조선 중 극히 일부인 천주교 사회에서 개고기 먹는 모습을 본 것이다.  

<개고기를 금지하는 산신도, 조선, 1900~1925년>


조선의 실제 모습은 고려 사회를 참고해 유추해야 하지만 고려는 물론 통일신라와 삼국 시대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정보 밖에 얻을 수 없다. 일제가 없애기 전에 조선이 먼저 다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고려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은 1123년 송나라 사신 일행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 남긴『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나는 서긍이 일개 수행원이 아닌 송나라 파견한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정도로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고려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고려에는 개고기 문화가 존재할 수 없었다.

마니교를 국교로 믿은 위그르가 채식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도 채식을 했다. 불교의 영향이다. 정확히는 양나라 무제 식 중국 불교의 영향이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청 왕조 인쇄>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려에도 살생금지법이 있었다. 왕은 뭔 일만 터지면 살생금지법을 강화했다. 오직 사신이 올 때만 대비해 가축을 키웠다.

짐승을 죽여본 적이 없으니 도살 기술이 엉망이었다. 고기 해체도 못해 내장이 터져 고기 맛이 끔찍했다고 한다. 불교를 믿었고 도살하는 법도 모를 정도로 채식을 하던 고려인이 개고기를 먹었다고 믿기 힘들다.

  

< 신선이 되는 과정을 그린 유송년의 삼생도,남송,12~13세기>

개를 많이 키운 사실 자체가 고려인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근거라는 모 논문이 있다. 그 논문이 고려인이 개고기를 먹은 증거랍시고 거론된다. 이게 한국 지식인 수준이다.  

개고기를 금지한 불교를 국교로 믿은 것 외에 고려에는 고구려·백제·신라와 통일신라를 거쳐 발달해온 전통적인 도교가 존재했다. 고려 도교는 조선이 기형적으로 받아들인 중국 도교와 달랐다.

 

불교와 도교의 신 토기, 당, 728년>

고려 도교는 무교(알타이 샤먼)와 불교가 섞인 독특한 종교였다고 생각된다.  소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시작된 ‘날개 달린 개’를 믿는 빛의 종교가 중국에 도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했다.

중국 도교에서는 신선이 사는 세계는 빛의 세계에 들어가야 영원히 살 수 있었다. ‘날개 달린 새’를 믿는 종교는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 왕조의 종교였다. 고구려·백제·신라는 기마 유목 왕조였다.  

<극락에 있는 부처님을 둘러싼 불새,위그르, 9세기>

이들 왕조가 농경민을 정복해 수 천 년 동안 기마 유목 문화를 정착시켰다. ‘날개 달린 새’를 믿는 빛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고 아후라 마즈다 교였으며 마니교였고 경교였다

이름만 다르고 종교는 같다. 아후라 마즈다 교는 몽골의 전통 신앙이다. 고구려인이 시조로 믿은 주몽은 동명왕이다. 주몽(朱蒙)은 명 궁수라는 뜻이다. 동명왕 석상은 몽골 초원에도 우뚝 서 있었다.

 

<몽고 원의 동명왕 추정 석상, 주채혁 교수 제공>


몽골 영토에 존재한 흉노와 돌궐의 태조 이름도 투멘(T’umen), 즉 주몽이다. 개와 늑대 시조 신화를 제외하고도 고구려와 몽골, 흉노와 돌궐, 위그르는 같은 뿌리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들은 굳이 신선 세계라는 귀찮은(그러나 아주 흥미진진한) 개념을 추가해서 대중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고구려가 ‘날개 달린 개’를 믿는 빛의 종교의 적자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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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개 전용 사원이 있던 당나라

한국 속 유목사

삼국 유목 전통을 가장 충실히 지켰고 신라 왕족만 키울 있는 삽살개가 있던 것으로 보아 신라는 명백히 개숭(배하는)파였다. 성골이 끝나는 시점인 7세기까지는 개고기 먹을 일이 없었다.  


통일신라의 국교는 불교였다. 10세기에 세워진 고려도 불교였다. 역시 개 먹을 일이 없다. 가끔 선승인 뭐니 하며 개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는 땡중이 있다. 헛소리다. 부처님이 콕 찝어 개는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통일신라, 719년 , 국립중앙박물관>


적어도 14세기 건국된 조선 시대 전까지 우리 민족에게 개고기라는 단어는 불길한 단어였다그렇다면 신라는 당나라와 일본에 굳이 개를 배에 실어 보냈을까?  


신라 계림로 황금 보검처럼 국교 차원에서 나라 왕족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정세 공식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라 황금보검과 유사한 황금장식이 발견된 카자흐스탄>


신라 황금 보검과 같은 양식은  세계에서 극소수 지역에서만 출토된다. 신라, 로마이집트흉노서아시아중앙아시아 등이다특히 지금의 카자흐스탄에서는 신라 계림로 보검 손잡이 장식과 똑같은 장식이 발견되었다


일단 신라와 카자흐스탄이 관련 있다는 얘기다극동의 신라 수도 경주에서  중앙아시아와 흉노가 사용하던 황금보검이 발굴 되었는지 몰라 한국사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한다뭐가 수수께끼라는 건지 모르겠다.  


<기마 인물 모양 토기, 신라, 국보,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계림로 황금보검이 발견된 무덤에서는 기마 인물형 토기와 수레 모양 토기도 같이 나왔다. 신라 왕조가 유목 왕조인 것이다. 고대부터 카자흐스탄 지역은 투르크와 관계 깊다한나라 유방이 흉노에게 공주를 바치던 기원전 2세기에는 오손이 지배했다. 


오손  곤막은 늑대가 키운 아이였다돌궐과 위그르에서는 늑대가 신이었다왕은 늑대머리 깃발을 휘날렸다. 투르크 인은 개가 인간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믿었다유목민은 조상이 누구냐에 따라 적과 친구가 분명하게 나뉜다고 했다



기마유목 왕조에는 마치 옥새와도 같은 신성한 개가 있었다삽살개는 신라 왕족의 상징이다. 8세기 신라 김교각 스님이 당나라 건너갈 삽살개를 데려간 이유는 그가 왕족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당나라 중심지인 안휘성)에서 김교각 스님은 삽살개와 함께 추앙받는다같은 숭배 문화권에 같은 늑대 혈통 왕족이니 친선의 의미로 쪽에서는 황금보검을, 저 쪽에는 개를 보낸 것이다


<당나라 황실을 그린 당인궁악도 속 페키니즈, 836~907년>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도 황실에서만 키울 수 있는 사자 개가 있었다. 페키니즈다. 신성한 개 개념과 유물의 유사성 외에도 신라 자체가 투르크 계라는 설이 있다.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봤을 그럴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청나라 황제 건륭제도 청 왕조 조상은 신라인이라고 했다. 사실 신라가 흉노 계인지 투르크 계인지 따지는   숭배 문명권에서 봤을  무의미하다어차피 형이냐 동생이냐 차이다. 

<조상이 신라인이라고 한 청나라 황제 건륭제 (1735-1796)>



수컷 늑대와 인간 여자가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들이 흉노다반이 늑대다.  흉노인 남자가 다시 암컷 늑대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 투르크다. 4분의 3 늑대 혈통이다. 더 신성하다


흉노와 투르크는 누가  잘났냐 피터지게 싸웠겠지만 이리 메치나 저리 메치나 어차피 둘 다 개숭(배하는)파다신라가 황금 보검을 주고 받은 6세기~8세기 카자흐스탄은 투르크인 돌궐과 위그르가 지배했다

<당나라에서 활동한 중앙아시아 사람들, 7세기~10세기>


돌궐과 위그르는 당시 사실 당나라를 지배했다당나라는 왕조 시작부터 돌궐과 함께 했다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리던 돌궐이 망한 후에는 역시 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린 위그르 군대가 왕조를 지켜주었다. 


왕조와 돌궐-위그르는 마치 바지사장과 주인 같은 관계였던 것 같다돌궐의 도움으로 시작된 왕조는 위그르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당 궁정에서는 지금의 폴로 게임을 즐겼다. 


당나라 유물 중에는 유독 중앙아시아 서역인 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당나라에는  10  정도의 마니교도 살았다. 소그드 상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서역인이다


<폴로 게임을 즐기는 당나라 귀족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합쳐진 종교다. 개를 신으로 받드는 조로아스터교와 당시 머리 성인을 믿은 기독교가 만났다 정신으로 개고기를 먹었을까? 마니교 수장은 돌궐과 위그르를 움직여 당나라 황제를 쥐락펴락했다


마니 교도가 아니더라도 당시 당나라에는 개 먹는 중국 한족 풍습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수행 중심의 불교와 도교가 유행하면서 채식을 권장했기 때문이다마니교불교도교 모두 개고기를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교의 권선서 내용을 조각한 당나라 시대 주택 난간, 7세기~10세기>



베이징에는 병든 반려견의 건강을 기원하는 전용 도교 사원이 있었다이런 당나라에 개고기 개를 비싼 배에 실어 수출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당시 일본 역시 개고기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6~8세기 일본은 아스카 시대였다


일본의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쇼토쿠 태자가 야심차게 불교를 국가 정책으로 밀고 있었다국가의 인재를 모아 당나라 불교를 배우러 보내던 일본 황실에서 개고기  개를 굳이 배로 수입 했을까? 


<호류지에서 강의하는 일본 쇼토쿠 태자>


먹을 널린 황족이 일본 역사를 통틀어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신석기인인 조몬인과 에타 족밖에 없다에타 족은 일본 불가촉천민이다. 신라의 개고기 일본 수출설은 뇌수술을 당한 중화사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없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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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신라가 일본에 개고기를 수출했다고?

한국 속 유목사

2001 개고기 불간섭 선언 이후 한겨레, 오마이뉴스, 중앙일보, MBC 언론이 하나가 되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조상이 농경민이라면 신라 토우 인형에게는 고대 애니미즘적 의미밖에 부여할 없다


다복을 기원하는 고대 토속 신앙의 상징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신라가 유목 왕조였다면 실제 신라의 문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행위는 신성한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유목민의 도덕은 농경민과 달랐다


<지난 천 년 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힌 칭기즈칸>


유목민은 일상이 전쟁이었다. 약탈혼도 흔했다. 태어난 아이를 두고 애가 맞아?”라고 따지는 불가능했다. 칭기즈칸 아들 이름은 주치다. 손님이라는 뜻이다. 칭기즈칸 부인이 납치당한 기간에 생긴 아이였다. 


조선 시대처럼 정절을 잃었다고 여자를 죽이고 열녀문을 세워댔다가는 가문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귀한 늑대 피를 이어받은 초원의 왕족이라면 더욱 그랬다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따지기 전에 누가 애를 낳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수렵도 속 고구려 기마 무사와 개>


부족이 있으면 반드시 왕비 부족이 있는 이유다. 농경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용납할 없겠지만 신라는 유목 왕조였다. 신라 아니라 고구려, 백제  지배층은 유목 민족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가 들어서기  땅에 살았던 원주민은 반농반유목민이거나 농경민이었을 것이다. 신석기 한반도 유적에서 뼈와 돼지 뼈가 발견된것으로 보아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 한족처럼 개를 키워 잡아먹을 있다


<경기도 출토 돌도끼, 신석기 시대,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청동기와 철기 시대가 되면서 북방에서 쓸고 내려온 사람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중앙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이었다. 스키타이 이래 모든 기마 유목 국가에서 지배층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며 노예 계층은 농사를 지었다


돌로 농기구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 눈에는 청동기 무기를 지닌 기마 무사가 전쟁의 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신석기 농경민은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청동 도끼. 흉노, 기원전 13~10세기>


흉노, 고구려에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존재했다노예층이었다. 지배층은 말타는 무사였다. 말과 개는 세트다. 권력을 동원해야 지을 수 있는 고구려 고분에는 기마 무사와 함께 하는 개가 그려져 있다


 개가 저승가서 먹을 개고기라는 헛소리가 마치 정설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한나라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군대 이름은 ‘다물’이다. 옛 땅인 고조선을 찾는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원수인 한무제 눈에는 고구려 무덤 속 개가 도시락처럼 보였겠지만 고구려 고분 주인은 기마 유목민이었다. 들은 반려견이 저승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자라고 여겼다. 


기원전 1세기 경상남도 늑도에서 인간과 나란히 묻힌 무덤이 발견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늑도는 고대 무역항이었다유목민은 육로든 해로든 무역을 한다


<늑도에서 발견된 개 무덤 속  뼈, 한국일보 2016.07.27>


중앙아시아 초원에서는 말을 타고 해상에서는 배를 탄다.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던 이유다. 청동기 시대 이후 지배층이 바뀌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개숭(배하는)파였다. 


늑대의 피를 받고 신성한 개를 키우는 지배자 앞에서 전처럼 개를 잡아먹을  있을까앞서 신라 왕실은 성골 시대까지 모계 사회였다가 성골 시대가 끝나면서 부계 사회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신라의 유목 전통이 사라지고 중국화가 시작된 것이다


<개고기를 식량과 약으로 먹은 한나라 무제>


신라 왕조는 거의 동안 유지되었다고려까지 따지면 거의 오백년 세월 동안 지배층인 유목 왕조가 지킨  전통을 따랐다. 기마 유목민에게 개는 반려견일 뿐 아니라 죽음을 안내하는 영물이다. 절대 먹어서는 된다


개고기 금기는 동안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천 세월이다로마 기독교를 제외하고 서양문화를 없듯이 알타이 샤먼을 제외하고 한국문화를 논할 없다. 적어도 신라 천 년 동안 개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 존재한 개고기 금지법>


역사적 사실이 이런데도 우리 학계와 언론은 마치 뇌수술을 당한 사람처럼 신라에서 개고기를 먹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신라가 일본과 당에 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다. 


개는 먹는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개를 배에 태워 보낸 신선한 개고기를 배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단지 개가 배를 탔기  때문에 배의 종착지에서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논리다. 하도 어이가 없어 신라, , 일본, 대표를 모아놓고 삼자 대면을 해야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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