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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사자왕 리처드의 뒤통수를 친 프랑스의 필립 2세

유럽사

중세 유럽에서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영지 개념이 컸다. 영지는 귀족, 혹은 왕족의 가족 재산으로써 주인이 죽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거기 사는 백성들 운명도 소용돌이쳤다.

예를 들어 결혼 지참금으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통째로 가져오기도 했고 왕이 후계자(아들) 없이 죽는다면 프랑스 왕국 전체가 먼 남자 친척에서 상속되기도 했다.


<앙리 제국의 후계자 리처드 1세(재위 1189-1199년), 영국 1620년>

이렇게 해서 중세 유럽에서는 거대한 씨족 연합체가 성되었다. 대표적인 씨족 정치 연합체가 리처드 1세 집안인 앙주 제국이었다. 

앙주 제국은 이탈리아 피렌체 산맥부터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포함한 현재 프랑스 영토의 3/2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까지 다스리던 대제국이었다. 


<리처드 1세와 필립 2세, 1180년 이전 추정 >

앙주 제국의 상속자 중 한 명이자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 중 하나인 리처드 1세는 영국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로빈 후드이야기에 등장하는 정의로운 왕이다. 


<제 3차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교황 그레고리 8세(~1180), 1675년 발행>


그 리처드 1세의 뒤통수를 쳐서 앙주 제국의 힘을 약화시킨 후 리처드 사후 노르망디 지역을 빼앗아 온 게 필립 2세였다만약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면 노르망디는 여전히 영국 땅일 가능성이 높다. 

필립 2세와 리처드 1세는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친했다고 한다리처드 1세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왕족이었다둘은 따지고 보면 사촌 간이었다그 말은 즉, 서로의 왕국에서 후계권을 다투는 경쟁자라는 뜻이다.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에서 만난 숙적 살라딘(1193년 사망),William and Henry Rock 작, 1838-5년>


리처드 1세는 분명 용감하고 정의로웠다. 하지만 그리 현명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는 직진만 하는 인생을 살았다. 형제보다 친하던 리처드 1세와 필립 2세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나뉘게 된 것은 십자군전쟁이었다


<사자왕 리처드와 이슬람 술탄 살라딘의 전투1193년 이전>

 

신앙심이 불탄 리처드 1세는 자신의 전재산을 정리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떠났다이슬람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은 살라딘과 싸운 사람도 리처드 1세였다

필립 2세도 같이 가긴 갔는데 중간에 핑계를 대고 홀랑 철수해 버렸다. 리처드 1세와 달리 후진도 하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리처드 1세가 살라딘을 죽이고 있을 때 필립 2세는 앙주 제국을 붕괴시킬 힘을 다지며 이 심상치 않은 성골함을 만들었다


<크리스탈 성골함 정면, 프랑스, 1175-1200년>


언뜻 보기에는 그냥 좀 멋없는 전구처럼 생긴 이 수정 성골함 위에는 그리핀으로 추정되는 새들이 잔뜩 있다. 옆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조각되어 있다

12세기 이후 프랑스 성골함답게 벽에는 개 머리도 장식되어 있다반대편 옆면을 보면 더 심상치 않다동일한 구도에 동일한 인물이 나오는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만 없다


<크리스탈 성골함 정면프랑스, 1175-1200년>


대신 저 위에서 새(그리핀 추정)가 날개를 편 채 하강하고 있다하필 딱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위치다십자가 모양의 날개를 편 새가 예수님을 대신했다고 봐도 좋은 정도로 의도적이다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신성모독이다. 


<크리스탈 성골함 측면프랑스, 1175-1200년>

이걸 교황은 용인했을 것이다. 어째서 굳이 안티오크 파를 없애고 천주교에서 개 머리 성인을 지워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날개달린 개를 믿은 고대 빛의 종교를 상징하고 있는데 말이다.  


<필립 2세의 직인, 프랑스, 1180년 이후>

노르망디 지역을 빼앗아 카페 왕조의 부흥을 연 필립 2세의 직인에는 사자 개로 추정되는 개 두 마리를 깔고 앉은 모습이 그려졌다

비슷한 시기 필립 2세의 직인과 비슷한 그림을 그린 메달이 영국에서도 제작되었다. 하지만 영국 왕을 그린 듯한 영국 메달에는 왕좌 밑을 떠받치고 있는 개 두 마리가 없다. 


<말탄 기사와 용이 그려진 메달과 다른 메달들, 영국, 1213~1219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유독 프랑스 왕조에게 있어 개는 매우 중요했다. 필립 2세의 카페 왕조는 987년부터 1328년까지 중세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 뒤로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가 이어졌다.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 모두 카페 왕조의 방계이나 여기에서는 구분하기로 한다)


<발루아 왕조가 만든 거룩한 가시 왕관 성체함, 프랑스, 1390년대 >

발루아 왕조는 가시나무 성골함을 만든 왕조로 영화 여왕 마고의 배경이 되는 가문이다부르봉 왕조는 마리 앙뜨와네트와 함께 처형된 루이 16세를 끝으로(혹은 그 왕자가 살아 루이 17세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막을 내렸다.


<감옥까지 주인을 따라간 코코와 처형되기 직전의 마리 앙뜨와네트, 영국, 1895년>

카페 왕조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는 개를 매우 사랑하고 신성시한 왕조이기도 하다마리 앙뜨와네트의 애견 코코는 주인이 감옥에 갇히고 처형이 되는 순간까지 주인 곁을 지켰다.

76. 중세 유럽 예수님의 성체를 지킨 개

유럽사

개가 그려진 12세기 프랑스 십자가는 프랑스 왕족이 소장하던 예수님 Reliquary(성체함)을 장식한 십자가일 가능성이 높다. 성체함이란 예수님의 신체 일부를 보관하는 용기를 말한다. 


<유월절에 양 피로 개 집에 부적을 써주는 남자와 밥 먹는 개, 프랑스, 1160~1170년>

불교에서 부처님 사리를 신성시하며 사리함을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천주교에서도 예수님 성체함을 숭배하며 아름답게 치장했다. 

천주교 국가의 귀족과 왕들은 성골함을 지키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 혹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는 표시 정도로 여겼다. 중세 유럽에서 "우리 집에 성체함 있어" 그랬다면 그 집은 왕을 배출하는 왕족이었다. 


<고려 시대 부처님 사리함, 국립중앙박물관>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성체함을 가지고 있다면 왕권을 이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왕족들은 마치 미래의 왕좌를 찾듯, 보물찾기를 하듯 성체를 찾아 다녔다. 

애초 목적이 약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로마 지역(특히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을 심하게 약탈한 십자군 기사단이 애타게 찾던 것이 예수님의 성체였다는 설이 있다. 


<거룩한 가시왕관 성체함, 프랑스, 1390년대>

세계적으로 히트한 『다빈치코드』는 예수님의 가족사를 둘러싼 천주교 내의 음모를 다룬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벌써 1980년대 유럽을 휩쓴 『성혈과 성배』라는 책과 아주 비슷하다. 


<고대 페르시아 금장식 중 날개 달린 개, 기원전 5~4세기>

성혈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 이걸 예수님 후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예수님 피 한 방울이 묻은 천 조각조차 예수님의 성체였다. 

중세 시대 성골함은 예수님 몸이 스쳐 지나갔을 법한 물건이라도 구해서 보석함을 만들어 장식한 것이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성체함을 감싼 비단 직물 무늬 중 날개달린 개, 스페인, 12세기>

15세기 종교 개혁 이전까지 카톨릭 국가(구교)에서 만든 성체함에는 거의 대부분 '개'가 그려져 있었다. 10세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상아로 만든 성체함을 보자. 정면에 떡 하니 개 두 마리가 있다.

<개와 새가 그려진 성체함, 상아, 북부 이탈리아, 10세기>

개 위에는 새도 있다. 기독교가 정식으로 국교로 채택되기 전부터 로마에서는 이미 날개 달린 개 신앙을 믿고 있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지역을 다스리던 에트루리안과 관련 깊어 보인다. 


3세기 로마 제국의 대리석 관을 보면 황족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가족들과 개가 지켜보고 있다. 또 아이의 대리석 석관 측면에는 날개 달린 개가 새겨져있다. 

<임종직전의 어린 소녀와 개가 그려진 대리석 석관, 로마, 200~220년>


개가 죽음이나 죽은 후 관을 지킨다는 개념은 에트루리안 시대부터 로마 제국 시대까지 지배층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니 10세기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 성체함에 개와 새가 나타난 것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에트루리안 비석 임종 순간, 로마, 기원전 490-470년>

그런데 11세기 이후 프랑스 왕조에서 만든 성체함에서는 거의 100퍼센트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개가 그려졌다. 그 중 일부가 유월절 개 집에 양 피 부적을 그려주는 모습이 그려진 십자가다.  


<임종직전의 어린 소녀가 그려진 대리석 석관 측면, 로마, 200~220년>

14세기 프랑스 발부아 왕조 가문에서 예수님의 가시나무 관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정확히는 가시 한 개) 특별히 제작한 성체함이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성체함 뒷면을 보자. 


<거룩한 가시유물 성체함 중 뒷면의 성 크리스토퍼, 프랑스, 1390년>


성인 미카엘과 성인 크리스토퍼가 있다. 성인 미카엘은 용을 죽이고 있다. 미카엘은 프랑스 국왕을 지키는 수호성인이었다. 중세 시대 용은 악마였다. 개가 용을 물리쳤다면 개는 성인이다. 


<악마를 죽이는 성인 미카엘, 1475~1500년>


성인 크리스토퍼는 고대 안티오크 교회에서 개 머리를 한 성인이었다. 개 머리를 한 성인이 아기 예수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성체함 뒷면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성체함에 보관되었다던 가시나무 관의 일부 (가시 한 개)는 어디에서 왔을까? 


<개 머리를 한 성인 크리스토퍼(기원전 3세기), 러시아 정교회, 17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1239년 십자군군대가 한창 약탈하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썼다고 추정되는 가시덤풀을 샀다.  

십자군 전쟁 중 가시나무 관을 사는데 성공한 루이 9세는 가시나무 관을 로마 교황청에 선물했다. 로마 교황청은 가시나무 관의 가시를 하나 하나 해체해서 프랑스 주요 왕족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루이 9세의 가시나무 관 증정식과 해체식,1239년 추정, 1490년 발행>


보물로 화려하게 치장한 성체함을 만든 발부아 왕조의 조상도 그 때 가시 하나를 받는데 성공한 유력 왕족 중 한 명이었다. 가시나무관에서 가시를 해체하는 작업은 루이 9세기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 고위 성직자가 직접 주재했다.


<가시나무 성체함, 1170년> 


교황 혹은 추기경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고위 성직자가 직접 가시나무 관 증정식과 해체식을 주재한 점과 이미 1170년에도 가시나무 관을 보관하기 위한 성체함이 있던 점으로 보아 예수님이 쓰신 가시나무 관은 반드시 찾아야 하는 성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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