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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116. 18세기 고양이 대학살과 개소주 이황

조선

조선 시대 양반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 굶주린 노비는 개고기를 먹었다. 인공위성 파편에 맞아 죽을 확률로 말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일부 한국인들이 왜곡하여 개고기 식용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복날, 가난한 농민, 개고기는 선한 전통이고 부자, 양반, 친일파, 독재자는 악이라는 단순 무식한 대립 구도로 몬 것이다

복날 개고기 식용을 통해 가난한 노비(노동자, 프롤레테리아)와 양반(부자, 부르주아)의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조선 시대 개를 때려잡아 개고기를 먹은 것은 개를 조상신으로 여긴 양반에 대한 증오의 표출이다

<웃는 사자 개는 청나라에서 행운의 상징, 청, 1662-1722년>

이는 개를 청 왕조의 상징으로 여겨 개를 때려잡아 먹는 고대 중국 식습관을 되살린 중국공산당과 같은 논리다. 또한 18세기 프랑스 방직공장에서 일어난 고양이 대학살과 동일한 형태의 증오범죄다

방직기계 발명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유럽에서는 자본가는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는 더 가난해지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각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고 고양이는 고양이인데 방직공장에서 착취당하며 뺑뺑이를 돌던 노동자들은 고양이를 자본가(방직 공장 주인)의 상징으로 보았다

<고양이 대학살, 문학과지성사>

어느 날 그들은 사모님이 물고 빨던 고양이를 때려죽였다. 그렇다면 프랑스 좌파는 사랑하는고양이가 죽어서 슬퍼한 부자(사모님)를 보고 고소해하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전통을 본받아 해마다 고양이 기일이 되면 고양이들을 때려죽이는 퍼포먼스를 벌일까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오직 한국 좌파만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은 가난한 조선의 노비를 기린다. 개고기를 먹음으로써 말이다. 프랑스 인들에게 18세기 방직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보다 약한 고양이를 죽여 복수를 한 비열한 인간들일 뿐이다. 


<개고기를 금지한 청 왕조와 달리 한국은 개고기를 지켜 정체성을 살렸다는 기사, 미디어오늘, 2004년 5월 27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복날 개고기를 먹어야 했던 가난한 농민들은 저주받은 음식인 개고기라도 먹고 살아남아야 했던 불쌍한 인간들이다. 불쌍한 우리 조상들을 핑계로 전통 운운하며 개고기를 먹는 인간들 역시 비열한 인간일 뿐이다.


1980년대 일부 운동권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개에 대한 증오심 역시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주사파로 분류되는 그들은 독재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개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더 열심히 개고기를 먹었다


<독재가가 금지하여 80년대 보신탕은 울었다는 기사(보신탕으로 도살되지 않아 개가 슬퍼했을까?), 한겨레21, 2002년 7월 16일>

개는 개고 독재자는 독재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은 기득권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보였다기득권, 부자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왔을까? 친일파? 아니,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친일파 이전의 조선 시대 양반이다

그런데 개고기를 부자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본 일부 한국 좌파는 기득권과 친일파, 부자에 대한 증오도 선택적으로 했다같은 기득권, 같은 양반인데 조선 시대 이황은 존경하면서 일제 시대 친일파는 증오한다.


<개고기 안 먹으면 변절하기 쉽단느 민주화 운동의 대부 백기완, 초이스경제, 2014년>

그러면서 복날이면 전통이랍시고 개고기를 열심히 먹는다. 조선 시대 복날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노비가 유일하고 노비들에게 개고기를 먹인 양반의 대표가 이황인데도 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고 표리부동한 것은 조선시대 양반 대표인 이황이나 개고기 전통론을 주장하는 한국 좌파나 똑같다. 개고기에 있어서는 말이다. "중국에 공자가 있다면 조선에는 이황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황은 추앙을 받는다


<조선 시대 세금을 내지 않은 도산서원,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공자와 이황은 개고기를 좋아한 것도 닮았다. 어느 날 이황은 신비한 효능을 가진 개고기 술이 등장하는 명나라 왕자가 쓴 책을 제목만 바꾸어 출판했다. 제목은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 신비한 개고기 술에 대한 효능의 원 출처가 '어느 신석기 인이 남긴 기록'신농본초라는 사실이다.

이황이 표지갈이만 해서 출판한 활인심방16세기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조선에서 개고기와 약재를 넣은 술도 유명해졌다. 이황은 개소주의 시초다지금도 도산서원에서는 이황을 기리는 의미에서 활인심방을 재연하는 행사를 한다


<한국 개소주의 시조인 이황, 조선닷컴,  2018년 8월 15일>

더 황당한 것은 이황의 후학들은 옛 방식 대로 개고기 술을 담그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그러면 이 후학들은 누구일까? 그들의 조상을 알아보자. 이황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류성룡과 김성일이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다


이 두 양반은 또 수도 없이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족보를 따져보면 안동 및 영남지역 유력가 자손들은 다 이황의 제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퇴계 이황을 조상으로 하는 퇴계 학파는 혼맥으로도 안동 및 영남지방을 꽉 잡았다그 유력가 자손들이 혼맥으로 또 다른 유력가와 연결된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백성들 고혈을 빤 안동 김 씨, 이황의 두 번 째 부인 집안인 안동 권 씨, 음식디미방을 만들어 양반가의 유일한 개고기 요리법을 전한 안동 장 씨 등등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양반들의 개고기 역사는 퇴계 이황으로 귀결된다


<조선 시대 양반가에서 남긴 유일한 개고기 조리법, 음식디미방, 1670년>

그 제자들과 후손들이 지금도 도산서원에서 모여 옛 모습 그대로 개소주 만드는 활인심방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자랑스러운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조선에 개소주를 남겨줘서?

개소주를 한국에 널리 퍼트린 것 외에 이황은 임진왜란으로 농지의 반이 날아간 상황에서 노비제도를 더 철저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간이기도 하다원래 노비 장사로 재산을 불리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의 선비문화수련원,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노비 장사로 돈을 벌면 땅을 사 더 부자가 되고 더 많은 노비를 사는 선순환구조로 이황은 치부를 했다. 이황의 무술주를 자랑스러워하며 복날이면 노비들이 먹던 개고기를 전통이랍시고 먹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노비들은 불쌍해삼복더위에 죽도록 일만 하고노비들이 복날 개고기를 먹었으니까 우리도 개고기 먹어야해전통이니까우리는 개소주를 만든 이황도 존경해. 성리학의 대가니까. ...야! 근데 그 이황이 노비장사로 돈 벌었잖아?!!”


<약 36만 평의 땅과 367명의 노비를 소유한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이거다. 조선 시대 가장 가난한 노동자이 먹던 음식이 개고기라며? 개고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 브루아와 프롤레테리아의 대립의 상징으로 찬양할 거면 이황도 같이 욕해야지. 왜 친일파, 기득권, 독재자만 욕을 하나

조선 시대 노비 제도를 찬양하고 강화한 이 황을 존경하며 개소주를 먹든지 복날 개고기 먹던 노비를 추모하며 노비들의 전통에 따라 해마다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는 소리다. 이황을 존경하면서 복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노비가 불쌍하다느니 하는 가식은 떨지 않기 바란다. 

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조선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구역 별로 분리되어 살던 한양 모습, 1900년 1월 1일>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급제였다집안에 3대 째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에서 제외되었으니 남자 양반은 죽자 사자 글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개고기를 먹은 양반은 상가집에 갈 수 없었다, 1900년 1월 1일>

대신 양반가 아녀자들이 뒷구멍으로 알바를 구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럼 지지리도 가난했던 남산골샌님들은 복날 개고기를 먹었을까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양반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였다.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집안 제사는 물론 마을 제사, 산신제, 기우제 등등 모든 제사를 못 지냈다. 장례식에도 못 갔고 아기가 태어난 집에도 못 갔다양반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중 제사를 지내지 않은 양반은 오직 천주교 신자였다.


<개고기 술은 한반도에 남긴 퇴계 이황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양반을 제외하고 양반이 개고기를 먹은 기록은 퇴계 이황 정도로 한정된다도산서원이라는 조선 최고 권력 기관을 소유한 이황은 개고기 술인 무술주를 담가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 서원의 면세 혜택을 바탕으로 노비 장사를 해 떼돈을 번 퇴계 이황은 명나라 왕자 주권이 쓴 활인심방을 표지만 바꿔서 출판했다. 번역을 했다느니 필사를 했다느니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책 표지에 자기 이름만 써서 냈다. 


<명나라 왕주 주권이 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국에 개고기 술을 퍼트린 이 황이 노비 장사에 열을 올린 건 자기도 한양 권문세가처럼 부를 누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선 말기 한양 양반 라 불리는 가문이 소유한 부의 수준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양 양반는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본사 같은 개념이었다. 전국에 걸쳐 소유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장원에서 나오는 수확물이 한양 양반 저택으로 모였다. 조선 시대에는 쌀, 보리, , 심지어 명태까지 화폐 단위로 간주되었다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늘린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화폐(엽전)가 있었지만 실물 시장은 물물 교환으로 돌아갔다. 뭐든 수확물을 가진 사람이 부자였다. 부의 근원은 땅이었다. 조선 시대 거부를 묘사할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소유한 장원에는 주인 양반 의 성 씨를 딴 노비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어마어마한 농지에서 수확물을 생산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이 노예(노비)였다


<가슴을 드러낸 여자 노비 혹은 양민, 1900년 1월 1일>

성이 없는 가축과 같은 신분인 노비는 보통 주인인 양반 집 성을 따라 집성촌을 이뤄 외거 노비로 살았다양반 가 저택 안에서 살면서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주인이 집과 땅을 내줘서(빌려줘서) 저택 밖 노비 집성촌에서 살게 해주는 식이었다

집 안 노비인 내거 노비는 크게 여자 노비, 남자 노비로 나뉘었고 각각의 구역, 역할에 따라 노비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예를 들어 안잠자기라는 여자 노비가 있었다. 구들이 깔리지 않은 윗방에서 먹고 자며 주로 바닥청소만 하는 노비였다


<1593년 당시 젊은 여자 노비 한 명 가격이 목면 25필,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요즘으로 치면 로봇 청소기다. 그런 이유로 보통 안잠자기는 안채에만 두었다점잖은 가문에서 사랑채 청소는 안방마님이나 딸, 며느리가 직접 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별당도 그 댁 따님인 아가씨가 머무는 거처가 아니라 첩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별당을 만들 정도의 재력가라면 본처와 첩이 얼굴을 마주보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별당 수가 곧 첩실 수였다. 어느 댁 저택에 별당이 열 채라면 첩이 열 명이라는 소리였다. 각각의 별당에도 노비가 딸려 있었다.


<기생인지 첩입지 모를 여인이 살던 조선 시대 상류층의 방, 1900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한 개의 한양 양반 가문이 소유한 노비 수는 전국 적으로 수 천~수 만 명에 이렀다. 결국 조선은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였다. 이 노비들을 관리하는 상위 직급도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노비들 중 똑똑한 인간은 회계, 경영, 대외 활동(일종의 정치), 자치(내부 경찰) 등의 전문 분야에서 일했다. 수 천, 수만 명의 노비들을 전문직 노비가 관리한 것이다. 주인 대감이나 마님은 상급 노비들만 상대했다


<삼복 더위에 농사를 짓는 백성들과 개, 조선 김홍도 풍속도첩, 19~20세기 초>

, 그럼 이 많은 노비들이 모두 복날이면 개를 끌고 나가 잡아먹었을까? 아니. 일제 시대에 태어난 한양 권문세가의 후손 분 증언에 의하면 복날 개를 먹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 분은 아예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 분의 유모들 중 한 명은 몰락한 가문 출신의 양반이었는데, 개는 조상신이니 절대 먹으면 안 된다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귀신 쫓는 개로 믿은 삽살개, 1743년>

역시 일제 시대에 태어난 명망 있는 개성 양반가 후손 분의 증언도 비슷했다.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고 하셨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르신들 중에 오직 1960년대까지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는 분만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분은 복날 개고기를 먹는 것은 전통이라고 열변을 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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