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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조선의 중국 사대주의와 만주 벌판 개장사

중국 공산당

선조와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 국경으로 튀었다. 당연히 명나라가 망명을 허락할 거라고 여겼지만 끝내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 나라로 섬긴다고 설레발을 떨더니 실제로는 총독부 관리 취급도 못 받은 것이다. 조선 백성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소년과 개, 신광현, 19세기, 조선>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도 전쟁사에서 임진왜란과 같은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성주가 도망을 친 상황에서 농민과 노예들이 곡괭이 들고 적과 싸운 격이다.  

 
그 난리 통에 선조는 또 다 늙은 나이에 어린 정비를 맞아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의병들과 함께 싸워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광해군을 중국 조선 총독부는 견제했다.

<송시열(1607-1689)>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광해군은 서자라는 것이다. 30넘은 똘똘한 후궁 아들보다는 젖먹이 정비 아들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조선의 신분제였다.

간신히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을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쫓아낸 것이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 후 서인이 완전히 조선을 장악하며 일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김두량의 개, 18세기, 조선>

 

청나라는 조선이 신하가 강한 나라라고 했다. 왕은 허수아비였다. 북한만 일당독재를 한 게 아니다. 시파니 벽파니 갈라져 나왔어도 그들의 근원은 서인, 즉 한 개의 당이었다.

조선에는 오직 하나의 당이 존재했고 그 당에서 왕비를 정하는 방식으로 결국 미래의 왕을 정했다. 후금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웠는데도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명나라 황제 이름을 썼다.

 

<조선에서 사냥하는 청나라 군대와 개, 19세기>

 

이게 정신 제대로 박힌 지도자들이 할 짓인가?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삼자고 할 때 그럴 것이지 뭐가 국익을 위하는 일인지 따지지 않고 오직 명나라 타령만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야 조선인이 명나라 황제에게 의리를 지키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인간이 이런 짓을 하는 건 한 판 붙자는 소리다. 병자호란은 명백히 조선이 도발한 전쟁이다.

<청 순치제를 위한 마상 활쏘기 시범 중 파르티안 기마법, 1662년 >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에서 패한 후 망한 것처럼 임진왜란에서 패했을 때 조선 왕조는 망했어야 했다. 위그르가 망한 후 당나라가 망한 것처럼 명나라까지 망했을 때 조선은 망했어야 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의 비극이다. 중국이라는 망령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개고기 타령을 하는 것이다.

 

조선은 고대 중국을 지향하며 굶어죽는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으라고 했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도 고대 중국을 따라 개고기를 먹으라고 독려했다. 당나라 이후 청나라가 망하는 거의 천 년 동안 중국 대륙에서 개고기는 사라졌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건설한 만주국 군대를 사찰하는 푸이 황제, 1935년>

 

개고기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몰래 먹는 음식이었다. 그걸 진시황을 롤 모델로 삼은 모택동이 끄집어내 중국인에게 먹으라고 강요한 것이다. 모택동은 참새를 멸종시켜 수 천 만 명의 중국인을 굶어죽게 한 잔인한 독재자다.

 
독재자가 개고기는 고대 중국인이 먹던 여덟 가지 진미 중 하나이고 개고기를 안 먹어본 사람은 개고기 먹는 걸 겁내지만 일단 먹어보면 맛있다고 떠드는데 안 먹을 사람이 있을까?

 

<청 황제이자 만주국 지도자 푸이의 일본인 측근 가족 사진, 1935년 추정>

 

개고기는 중국 공산당을 대표하는 음식이었다. 청 왕조의 성지인 만주에 살던 조선족이 개고기를 먹게 된 이유? 역시 중국공산당, 즉 모택동 때문이다. 모택동은 만주족을 학살하고 그 자리에 조선족을 채워 넣었다.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면서 정식으로 신분증이 있는 중국인이 될 수 있었다. 한국 전쟁 때 조선족이 중공군이 되어 남한을 공격한 이유다. 그들은 개고기로 중국 공산당과 하나되었고 지금도 남한에서 개고기를 소비하는 가장 큰 세력 중 하나다. 

<가리봉동에서 조선족 개고기 요리를 판다는 기사, 한겨레 21, 2000년 8월 >

북한의 김일성은? 역시 모택동과 같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다. 북한에는 김일성 이전까지 개고기를 금지하는 천도교가 정권의 주요 세력이었다. 김일성이 천도교를 숙청하며 정권을 잡았고 개고기는 북한의 전통음식이 되었다.


 

더 이상한 건 한국 사회의 개고기화다. 이승만 정권 때 ‘개고기 금지법’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 전국 개고기 집 수는 1,000개 미만이었다. 북한을 추종하고 중국을 따르는 한국 내 운동권 세력은 독재자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개를 때려잡아 먹었다.

 

<김일성과 만난 모택동, 1970년 10월>


그들이 정권을 잡은 후 그러니까 정확히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에서는 개고기가 우리 전통이라는 여론이 급속히 퍼지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개고기 박사라는 사람이 북한의 개고기 조리법을 우리 전통이라며 논문에 소개했다.

그 엉터리 논문이 언론, 문화, 지식인 층을 통해 확산되면서 현재 한국인들이 믿는 개고기 전통론이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설립 단계부터 의심으로 점철된 한국의 동물보호 단체들은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했다.

 

<개고기 불간섭 선언을 한 167명의 각계각층 인사들, 2001년>

 

혹은 한 술 더 떠 개 도축업자 못지않게 잔인하게 개들을 죽였다. 김일성, 김정일이 만든 북한의 개농장 시스템은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에 보급되었다.

일개 농림부 장관의 행정 명령이 마치 헌법처럼 군림하며 아무도 행정명령을 없애는 게 얼마나 간단하지 말하지 않는다. 개고기 문제는 결국 대 중국 문제다. 한민족은 아직도 중국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8. 중국 조선 총독부 조선 왕조, 개고기는 전통?

조선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사실 고구려 국가체제가 그대로 이어진 건 발해다.

어쨌든 이 주장대로라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중국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는 태조 이성계>

이해가 가는가? 왜 뜬금없이 고려 다음에 중국인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됐는지? 중국인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세운 것이 조선 왕조다. 중국의 조선 식민지 총독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명나라가 부모 나라이며 공자가 신이고 개고기가 전통 음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지배층인 양반과 백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장 보고 돌아오는 조선 양반 가족, 1900년>

조선 지배층은 예를 행하는 곳이 바로 중국이며 조선 땅은 중국인에게 가르침을 받아 예를 아는 곳이라고 했다. 즉, 자기들은 교화된 중국인이고 조선은 교화된 중국 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걸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정신병이다. 정신병적 중국 집착은 생명 경시 사상으로 이어졌다. 예(유교)를 모르는 대다수 백성은 오랑캐 상태, 즉 짐승이었다.  

<1960년 대한민국 문맹률이 78%라고 한 국가기록원>

1960년대 한글도 모르는 문맹률이 78%였다. 한자는 한글보다 몇 천 배 외우기 힘들다. 조선 시대 문맹률은 몇 %였을까? 약 10%의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90% 조선인은 가축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 물론 나쁘다. 하지만 영악한 그들은 조선 왕조의 부패, 모순, 무능을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것뿐이다. 중화사관으로 무장한 조선 왕조는 부패했고 무능했으며 모순 투성이였다.

<상위 10%안에 든 양반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 1910년>

조선은 고려 왕족만 몰살 시킨 게 아니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지워버렸다. 한민족 정통성 지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개고기를 조선의 전통이라고 대중에게 세뇌했다.

이런 소시오패스적 생명관이 이황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을 반인륜적인 노예 상인으로 만들었다. 조선 말기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노예)였다고 한다.

<정선이 그린 이황의 도산서원>

갑오경장으로 신분이 철폐된 것은 500년 동안 내려온 노비 문서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명나라 왕자의 『활인심법』을 자기 책인 양 출판해 조선에 개소주를 퍼트린 이황은 비열한 노예상인이었다.

정확히는 조선의 언론, 교육, 출판의 기능을 담당한 서원을 장악한 똑똑한 노예 상이었다. 그런 이중성과 사악함이 조선 양반들의 모습이었다. 노비제도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조선의 특징이라고?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라는 사실은 부끄럽다. 역사 상 모든 국가에는 노예 계층이 존재했다. 그러나 서양 제국주의 국가나 미국처럼  주로 침략국 백성이나 불법적인 인신매매로 충당했다.  

노예에서 왕비가 된 오스만 왕국의 예처럼 신분 해방에도 융통성도 있었다. 조선처럼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사람의 절반을 노예로 부린 왕조는 없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서자 차별법이었다.

<재가금지법이 있던 양반 과부와 교미 중인 개, 조선, 혜원, 18세기>

양반은 세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여노비를 강간하는 건 무제한 자유였다. 첩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천민이었다. 엄마가 노비면 아빠가 양반이어도 자식은 노비였다.

본처는 첩이나 여노비를 질투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든 강상죄로 죽일 수 있었다. 부모 한 쪽이 노비이면 자식까지 대대손손 노비로 만드는 제도는 역사 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잔인한 신분제도다. 

<임진왜란(1592~1598년)>

 
결국 이 신분 제도로 인해 조선 양반들은 숙원인 붕당정치를 할 수 있었다. 붕당정치 체제 안에서 개인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100명의 인재가 있어도 당의 의견이 정해지면 오직 당의 의견에 따를 뿐이다. 

중종의 조카, 그것도 서출인 천 것이 왕이 되었다는 콤플렉스로 인해서인지 선조는 중국에도 없던 붕당 정치를 허락했다. 또 멍청한 판단을 해 임진왜란을 초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601년>

아들 광해군을 견제한 찌질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막사발에 반해서 국보로 남겼다는 등의 국뽕 선동은 집어치우고 이성적으로 임진왜란을 살펴보자. 

임진왜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 도발 사인을 보냈다. 조선에서는 전쟁 가능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사신까지 보내 확인했다. 

<부산을 침공하는 일본군, 1592년>

붕당정치에 의해 동인과 서인에서 한 사람씩 공평하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북한과 비핵화 협의를 하는데 민주당과 자유당에서 한 사람씩 보내 회담을 한 거다.

송나라 사신 수행원 서긍의 예처럼 사신 맞이 행사와 환영 연회 같은 걸 하며 친선교류인 척 뒤로를 염탐을 했을 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조선을 우습게 봤을지 상상이 간다.

<죽인 숫자대로 돈을 받아야 해서 베어간 조선인의 코와 귀 무덤>


더 어처구니없는 건 동인과 서인 대표는 돌아와 각각 딴 소리를 했다는 거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원수처럼 싸워도 북한 문제에는 한 목소리를 낸다.

동인과 서인은 국가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도 서로를 반대했다. 정세분석? 그 딴 거 없다. 결국 파워 센 당의 주장이 채택되어 일본은 전쟁 할 생각이 없다로 결론 났다. 얼마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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