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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조선 공주, 청 황실의 정비가 되다

조선

효종이 송시열의 바지사장이 된 이유는 조카 대신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약점이 많았다. 그래서 효종이 죽고 대비가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피터지며 싸워야 했다.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청 왕조 3대 황제가 될 뻔한 섭정 왕 도르곤이 돌연사 하지만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앉은 개를 새긴 인장,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700~550년>

17세기 망하는 대신 운 좋게 살아난 조선 왕조에게 가장 거슬리는 상대는 역시 청나라였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는 개고기로 대변되는 정체성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개가 목숨을 살려줘 훗날 청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과 같은 이야기 구조다. 신성한 개가 하늘이 정한 새 지도자(황제)를 선택했다는 소리다.

<당 황실 여인의 신발을 물어뜯는 랩독(소매 개), 8세기>

누르하치는 개를 죽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개를 사랑했다. 신발 물어뜯은 당나라 황실 개와 마찬가지로 청 황실에도 황족만 만질 수 있는 사자개(페키니즈, 시추, 라사압소 등)가 있었다.

황족 외에 이 개들을 보는 사람은 죽였다. 청나라에서 개를 죽이는 건 불법이었다. 개고기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다. 똑같이 신농이 쓴 『본초』에서 시작된 한의학이었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판 『신농본초』에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개고기 조리법을 쓴 안동 장 씨의 음식디미방, 조선, 1670년>

"고대에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먹는 것조차 부끄러워진 개고기" 라고 말이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세손들이 줄줄이 죽은 후 효종으로 즉위한 전직 봉림대군은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했다.

특히 『본초』의 99%를 베낀 『동의보감』에 의하면 개고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이렇게 다른 조선과 청이었지만 알고보면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2대 황제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이 섭정을 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초상

누르하치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자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는 도르곤은 효종에게 조선 공주를 자신의 정비로 맞고 싶다는 청혼을 했다. 효종은 한나라 유방이 양녀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 것처럼 신하의 딸을 양녀 삼아 도르곤에게 보냈다.

한나라 공주는 중전(좌부인)이 될 수 없었다. 아들도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엄마가 왕비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효종의 양녀는 도르곤의 정실(적복진)이 되었다. 적복진이 되었다는 것은 아들이 정식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다.

<건륭제 황후의 초상, 청, 19세기 >

또 역대 청나라 황후와 같이 이런 초상화를 그릴 자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모든 기마 유목 왕조에게는 정실부인이 될 수 있는 왕비 부족이 있었다.

‘황제의 딸’이나 ‘미월전’ 같은 청 왕조 시대 드라마를 보면 황제는 끊임없이 수녀를 선발해 후궁을 채워 넣는다. 그 많은 수녀들이 모두 왕비 부족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여인들이었다.

 

청 왕조 시대 적복진(황후)이 된다는 것은 황후 부족이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었다. 도르곤은 조선 공주가 데려간 궁녀까지 측복진(후궁의 품계)으로 삼았다. 

아내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겠지만 황실 내명부의 권력 투쟁 관점에서 본다면 정실의 시녀를 후궁으로 삼는 건 정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배려였다. 같은 부족의 두 여자가 한 편을 먹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냥감을 모는 사냥 개를 그린 호렵도, 청, 19세기>

그런데 암살을 당했는지 진짜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죽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도르곤은 섭정이 된 후 얼마 후 요절했다. 르곤이 장수했다면 17세기 이후 조선에는 고려 말 기황후 일족을 능가하는 새로운 권력층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와 조선 지배층에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도르곤이 죽으면서 조선 공주도 청 황실에서 찬밥이 되었고 조선에 돌아온 후 환향녀 취급을 받으며 아주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사자 개를 조각한 수정 인장, 청, 17세기>

누르하치가 처음 후금을 통일하고 조선에  통교를 청했을 때는 형제의 나라로 외교를 맺자고 했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후 외교 관계는 군신 관계로 격하되었다. 

 
명 왕조와 청 왕조의 조공관계는 분명히 다르다. 명 왕조는 조공 관계의 나라를 형제의 관계니, 군신의 관계니 하고 나누지 않았다. 똑같은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였다.

 

<인장 모양 은제 사자 개 조각상, 청  17세기> 

청 왕조가 조공관계에서 형제의 나라라고 한 것은 기마 유목 왕조 파트너라는 의미였다. 조선도 몽골, 티베트, 위그르와 같이 기마 유목 왕조 동료로 끼어준다는 소리다.

청이 위그르를 응징한 것은 일종의 서열 싸움 같은 거였다. 이런 역학 관계를 모른 인조와 조선 지배층은 오랑캐와 강제로 형제가 될 수는 없다며 전쟁을 불사했다.

<자금성으로 돌아오는 강희제 행렬, 청, 1689>

조선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고려조차 원이 사나운 공주들을 파견해 지배했다고 억울해했으니 조선이 기마 유목 왕조의 외교 관계에 무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지한 조선을 상대로 청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배려를 했다. 병자호란 후 포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사실 상 청 황실은 종친 대접을 했다. 조선 공주는 청 황실 섭정의 정실이 되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조선, 1745-1806>

만주족의 경우 남자는 얼마든지 첩을 둘 수 있었지만 정실은 언제나 만주족이었다. 만주족이 아니면 만주족과 동일한 수준의 부족 여인이어야 했다. 군신관계로 격하되었을지언정 청 왕조에게 조선 왕실이 그랬던 것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청 황실이 신라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한민족과 동질성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신라에서 통일신라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졌으니 결국 한 뿌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11. 개고기 만병통치설의 시조, 신농 씨

조선

원래는 불법이나 사실 상 합법이 된 개소주는 개고기를 푹 고아 만든다. 퇴계 이황이 발명했다고 하는데 사실 신농 씨가 원조이다. 신농 씨가 누구냐고? 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안되는 존재가 바로 신농 씨다. 질겅질겅 씹고 있는 건 약초다. 


신농 씨가 입으로 약초를 씹어 사람을 치료한 기록이 중국 한의서인  신농본초』, 혹은 『본초』이다. 중국과 조선에 존재한 모든 개고기 약효 역시 이 『본초』에서 나왔다. 북한 김일성과 김정일이 먹은 황구도 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석기 시대 신농씨 조언에 따라 만들었다.


 <개고기 만병통치설의 원조인 신농 씨>


신농 씨가 산 중국 황하 문명권에서는 개고기를 약으로 사용했다물론 신석기 시대 개고기를 약으로 사용한  황화 문명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하 문명을 제외한 모든 문명에서 개를 약으로 먹는 행위는 모두 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황하 문명권의 개는 수많은  재료  하나였다. 우리 역사와 문화는 이 황하 문명과 상관없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및 북방유목 문화와 관련이 깊다. 수메르 유물에서 발견된 씨름하는 모습은 고구려 벽화에서 씨름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또 이 모습은 흉노인이 씨름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씨름하는 모습. 수메르 청동기 향로>


길가메쉬 서사시는 우리 무교의 기원이라고 하는 바리 공주 이야기와 서사 구조가 같다. 이 밖에도 우리는 수메르-바빌로니아 인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개를 믿은 신앙이 있었다. 런데도 우리는 중국 황하 문명의 충실한 계승자를 자처하고 있다. 


저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농 씨가 쓴신농본초』에 의하면 발기부전인 남자는 수캐 페니스를 먹으면 즉시 효과를 본다고 한다비아그라가 필요 없다 『신농본초』에 의하면 불임인 여자는 개고기를 먹으면 아들을 낳을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와 흉노인이  씨름하는 모습>

 

이런 식으로   오줌   등등 개의 모든 부위와 개의 분비물은 신농 씨 표 의약품이 되었다. 이런 개고기 약효는 중국과 조선을 넘나 들며 시대와 저자 제목만 바뀌어 계속해서 출판되었다. 100권의 개고기 약효를 적은 책이 있어도 원 출처는 신농 씨다. 


 


간을 먹으면 간이 건강해지고 췌장을 먹으면 췌장이 건강해 진다는 신석기 고대 신앙을 철썩 같이 믿어서인지 아직도 한국 한의사들은 라디오에 출연해 개고기는 만명통치약이니 먹으라고 떠든다.  한국 보신탕집에서 수캐 페니스는 단골만 먹을  있다고 한다. 


<청 왕조. 씨름 참관하는 황제 건륭제. 18세기>


그러나 그 약효의  출처는  어느 신석기 중국인이 남긴 신농본초』 이동의보감』에 나온 개고기 약효 역시 원조는 신농씨다. 『본초』를 99% 카피한 책이니 당연한 일이다. 조상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일단 급하니 베끼고 본 것이다. 


왜 급했는지는 조선 시대를 설명하면서 다시 언급하겠다. 우리 민족이 개고기를 식용이나 약으로 먹은 진짜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개고기에 대한 모 기록과 책을 살펴본 결과 안동  씨가 남긴 음식디미방』만이 진짜 자신들이 먹은 체험 요리법이었다


<개소주를 표절한 이황>


안동   집안은 우리나라 개소주의 원조인 퇴계 이황과 관련된 가문이다당, 송 대 이후 중국 대륙에서 사라진 고대 개고기 약효를 명나라 왕자 주권이 찾아내 『활인심법』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을 천 원짜리 지폐에 실릴 정도로 존경 받는 이황이 훔쳤다.  


그러므로 개소주 원조도 이황이 아니라 신농 씨다. 조선 시대 정약용 형제도 개고기에 대한 기록을 남기긴 했다정약용 가문은 천주교를 믿었다우리나라 천주교는  세계 천주교  유일하게 개고기를 인정하는 종교이다천주교에서 개고기는 순교의 음식이다

  

<이황이 표지갈이 출판한 주권의 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천주교와 개고기에 대한 관계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조선에 남겨진 개고기에 대한 모든 기록과 책의  출처는 신석기 인간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농 씨가 남긴 신농본초』다신농본초』는 본초』로 이어지며 중국 한의학과 한국 한의학의 근간이 되었다. 


그런데 현대 중국 한의학에서는 개고기를 약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약과 장비가 발달한 지금은 개고기를 약으로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오직한국 한의학에서만 아직도 개고기를 약으로 취급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대한한의사협회는 '개고기 불간섭 선언'에 참여했다. 


<명 왕조 화가인 곽허가 그린 신농 씨. 1503년>


원조는 버린 고대 개고기 비법을 아류인 한국만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황하 문명 이후 개고기를 식량과 약으로 먹은 중국은 파사구 즉 페르시아 개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북방유목왕조 지배기)부터 개고기식용이 사라진다. 


 


고기 기피 현상은 수행 중심 도교와 불교가 전해진  대에 들어서 더 심해져 개고기 식용 행위가 강력하게 비난받게 된다. 대략 이 시기부터 중국 대륙에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계층으로 한정된다. 


<송 왕조. 자유로이 활보하는 개. 청명상하도. 1120년>



몽골 족이 지배한 원 왕조 시대 출판된 한의서( 『본초』)에는 개고기 약효를 소개하면서 주석을 달았다집도 지키고 영리한 개를  먹어야 하느냐는 것이다이런 현상은  시대에도 이어졌다명나라 황자 주권이 고대 개소주 약효를 찾아내 책으로 남기긴 했지만 일반 중국인이 먹던 음식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개고기를 약으로 먹고 식량으로 먹은 시기는 춘추전국시대 왕조 왕조 시대 뿐이었다. 특히 청 왕조는 시조가 신라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개가 생명의 은인이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 청 왕조 타도를 외친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이 개를 대량 학살하며 개고기를 적극적으로 먹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청 왕조. 고소번화도 중 개. 1759년 >


그들에게 개는 타도해야 할 청 왕조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개를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조선에 중국 한족의 개고기가 도입되는 과정 역시 매우 독재적이었다조선은 허용된 책과 글만   있었다국가 차원에서 모든 기록을 철저히 관리했다


 글자라도 허락받지 못한 글자를 가지고 있다가 걸리는 날에는 삼족이 몰살 당했다() 독재이다이런 문의 독재 속에 조선 왕조는 중국 한의서와 도교서    이전 발행된 책만 수입했다. 개고기가 약으로 사용되던 시기이다. 


<티베트탄 마스티프와 유전자가 동일한 삽살개. 조선. 김두량. 1743년>


이미 중국  왕조에서는 개를 가축이 아닌 동물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굳이 공자 맹자 따져가며 춘추전국 시대와 한나라양나라 시대 고사만을 넣은 한의서와 도교서를 조선에 배포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라져 버린 중국 한족의 개고기 전통은 조선에서 이어지게 된다. 개고기 사대주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졌다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마치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소중화 사상을 주장했다이미 사라져버린 명나라를 그리며 고대 중국이 조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 나라 유물 속 농사 짓는 신농 씨>


진정한 리플리 증후군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시대 지배층은 주구장창 신석기 시대 중국인이 먹던 개고기를 우리 전통의 음식이자 약이라고 주장하며 굶어죽는 백성들에게 약이자 식량으로 먹으라고 강요했다. 황구가 몸에 제일 좋다는 청동기 시대 중국 한족 기록을 믿은 김일성 일가가 황구만 먹는 이유이다.   


하지만 조선 이전에 한민족에게는 개를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개를 먹는 것은 강력한 금기였다. 개를 먹으면 불길하고 재수없다고 믿었다. 우리 민족에게 개는 죽음과 관련된 신성한 존재였다. 이 금기는 북방기마 유목문화인 알타이 샤먼에서 유래했다. 개고기 약효를 남긴 신농 씨는 중국 농사의 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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