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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48. 중국 조선 총독부 조선 왕조, 개고기는 전통?

조선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사실 고구려 국가체제가 그대로 이어진 건 발해다.

어쨌든 이 주장대로라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중국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는 태조 이성계>

이해가 가는가? 왜 뜬금없이 고려 다음에 중국인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됐는지? 중국인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세운 것이 조선 왕조다. 중국의 조선 식민지 총독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명나라가 부모 나라이며 공자가 신이고 개고기가 전통 음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지배층인 양반과 백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장 보고 돌아오는 조선 양반 가족, 1900년>

조선 지배층은 예를 행하는 곳이 바로 중국이며 조선 땅은 중국인에게 가르침을 받아 예를 아는 곳이라고 했다. 즉, 자기들은 교화된 중국인이고 조선은 교화된 중국 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걸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정신병이다. 정신병적 중국 집착은 생명 경시 사상으로 이어졌다. 예(유교)를 모르는 대다수 백성은 오랑캐 상태, 즉 짐승이었다.  

<1960년 대한민국 문맹률이 78%라고 한 국가기록원>

1960년대 한글도 모르는 문맹률이 78%였다. 한자는 한글보다 몇 천 배 외우기 힘들다. 조선 시대 문맹률은 몇 %였을까? 약 10%의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90% 조선인은 가축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 물론 나쁘다. 하지만 영악한 그들은 조선 왕조의 부패, 모순, 무능을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것뿐이다. 중화사관으로 무장한 조선 왕조는 부패했고 무능했으며 모순 투성이였다.

<상위 10%안에 든 양반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 1910년>

조선은 고려 왕족만 몰살 시킨 게 아니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지워버렸다. 한민족 정통성 지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개고기를 조선의 전통이라고 대중에게 세뇌했다.

이런 소시오패스적 생명관이 이황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을 반인륜적인 노예 상인으로 만들었다. 조선 말기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노예)였다고 한다.

<정선이 그린 이황의 도산서원>

갑오경장으로 신분이 철폐된 것은 500년 동안 내려온 노비 문서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명나라 왕자의 『활인심법』을 자기 책인 양 출판해 조선에 개소주를 퍼트린 이황은 비열한 노예상인이었다.

정확히는 조선의 언론, 교육, 출판의 기능을 담당한 서원을 장악한 똑똑한 노예 상이었다. 그런 이중성과 사악함이 조선 양반들의 모습이었다. 노비제도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조선의 특징이라고?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라는 사실은 부끄럽다. 역사 상 모든 국가에는 노예 계층이 존재했다. 그러나 서양 제국주의 국가나 미국처럼  주로 침략국 백성이나 불법적인 인신매매로 충당했다.  

노예에서 왕비가 된 오스만 왕국의 예처럼 신분 해방에도 융통성도 있었다. 조선처럼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사람의 절반을 노예로 부린 왕조는 없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서자 차별법이었다.

<재가금지법이 있던 양반 과부와 교미 중인 개, 조선, 혜원, 18세기>

양반은 세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여노비를 강간하는 건 무제한 자유였다. 첩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천민이었다. 엄마가 노비면 아빠가 양반이어도 자식은 노비였다.

본처는 첩이나 여노비를 질투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든 강상죄로 죽일 수 있었다. 부모 한 쪽이 노비이면 자식까지 대대손손 노비로 만드는 제도는 역사 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잔인한 신분제도다. 

<임진왜란(1592~1598년)>

 
결국 이 신분 제도로 인해 조선 양반들은 숙원인 붕당정치를 할 수 있었다. 붕당정치 체제 안에서 개인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100명의 인재가 있어도 당의 의견이 정해지면 오직 당의 의견에 따를 뿐이다. 

중종의 조카, 그것도 서출인 천 것이 왕이 되었다는 콤플렉스로 인해서인지 선조는 중국에도 없던 붕당 정치를 허락했다. 또 멍청한 판단을 해 임진왜란을 초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601년>

아들 광해군을 견제한 찌질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막사발에 반해서 국보로 남겼다는 등의 국뽕 선동은 집어치우고 이성적으로 임진왜란을 살펴보자. 

임진왜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 도발 사인을 보냈다. 조선에서는 전쟁 가능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사신까지 보내 확인했다. 

<부산을 침공하는 일본군, 1592년>

붕당정치에 의해 동인과 서인에서 한 사람씩 공평하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북한과 비핵화 협의를 하는데 민주당과 자유당에서 한 사람씩 보내 회담을 한 거다.

송나라 사신 수행원 서긍의 예처럼 사신 맞이 행사와 환영 연회 같은 걸 하며 친선교류인 척 뒤로를 염탐을 했을 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조선을 우습게 봤을지 상상이 간다.

<죽인 숫자대로 돈을 받아야 해서 베어간 조선인의 코와 귀 무덤>


더 어처구니없는 건 동인과 서인 대표는 돌아와 각각 딴 소리를 했다는 거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원수처럼 싸워도 북한 문제에는 한 목소리를 낸다.

동인과 서인은 국가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도 서로를 반대했다. 정세분석? 그 딴 거 없다. 결국 파워 센 당의 주장이 채택되어 일본은 전쟁 할 생각이 없다로 결론 났다. 얼마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다.

46. 킹덤 속 사람들은 왜 인육을 먹었나?

조선

명나라 도교를 수입한 조선은 개고기를 먹으라는 공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랐다. 부모의 나라였지만 공자를 신으로 모신 입장에서 개고기 문제 만큼은 명나라가 틀린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틀린 건 조선이었다. 춘추전국 시대 선비는 평민과 귀족 사이에 낀 중인 같은 신분이었다. 그런 선비가 붕당을 만드는 건 처형을 당할 만큼 큰 중죄였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선비가 당을 만든 예는 없었다. 

<소학을 든 조선 양반 어린이, 1904>

선비가 권력의 장악한 예가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선 역시 16세기 명종 대까지만 해도 사사로이 당을 만들면 처형을 당했다. 명종의 조카 중에서도 어미가 천한 선조가 왕이 되면서 그 금기가 깨졌다. 

조선은 유교 역사 상 최초로 선비질로 붕당을 만든 나라였다. 남송의 '절함도'는 왕에게 충언을 올리는 강직한 충신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은 충언을 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붕당정치를 통해 신하가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갔다. 

<난간이 부러져라 꽉 잡고 버티며 간언을 올렸다는 절함도, 남송, 12~13세기>


일본은 조선이 붕당 정치로 망했다고 비웃었다. 그래서인지 붕당정치를 비난하면 친일파라고 욕을 한다. 일본은 적이고 적이 비난한 건 사실 좋은 것이니 결론적으로 붕당정치가 옳다는 논리다. 

이런 극단적인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말장난이 조선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참으로 기이한 왕조였다. 드라마 킹덤에서는 중국 도교에서 추구하는 불로불사를 대하는 조선 지배층과 백성들의 견해 차를 잘 보여준다. 

<김홍도의 풍속도첩 중 신선들 조선, 19~20세기 초>

늙은 왕(핫바지 선조)을 살리고 싶은 어린 왕비와 장인(실권자)은 죽은 왕을 좀비로 만들었고 좀비가 된 왕은 젊은 의원을 잡아 먹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운반된 의원의 시신을  동네 사람들이 사이좋게 요리해 먹고 다들 좀비가 되었다. 

<정선의 독서여가, 조선, 18세기>

그러면 왜 동래 사람들은 친하게 지내던 의원의 시체를 끓여먹었을까? 킹덤은 선조 아들 광해군과 인목대비가 정권 싸움을 하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듯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은 17세기 이후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도 조선 백성들은 대부분 굶었다. 

<신윤복의 뱃놀이, 조선, 18세기>

어느 정도로 굶었느냐? 현종 실록을 보자. 한 번에 수 십에서 수 백 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현종은 당시 실권자인 송시열에게 함께 국사를 논의해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청한다. 

송시열은 몸이 아프다, 늙은 부모를 섬겨야 한다, 등등 오만가지 핑계를 대며 왕을 생까며 말을 듣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무기한 국회 파행이다. 사표 받고 쉬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송시열(1607-1689)

그 순간 조정을 장악한 송시열 파가 모두 파업을 하는 수가 있었다. 요즘 말로 치면 총 파업이다. 철도 파업, 택시 파업, 자동차 파업 등 부분 파업이 아니라 전국 총 파업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왕이 계속 청 즉, 부탁을 했고 송시열은 거절을 했다는 점이다. 송시열이 거절하면? 현종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주종관계처럼 보이는가? 현종은 그냥 핫바지다. 

<김홍도 풍속도첩 중 서화 감상, 조선, 19~20세기 초>

멀쩡한 왕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현종 할아버지인 인조를 왕으로 만든 순간부터 조선 왕권은 반정파에게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 실권도 송시열에게 있었다. 송시열도 나름 바빴을 것이다. 

반정파는 또 반정파 대로 대비 장례식 복장을 일 년을 입네, 삼 년을 입네로 싸우면서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권력을 두고 싸웠다. 이게 붕당정치였다. 일본이 욕 했으니까 붕당정치가 실은 합리적인 정치 체제였다고? 웃기지 말자. 

<해방 후 인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

해방 직후 조선 인구가 2000~2500만 명이었다. 조선 말 인구가 2000만 명이라고 한다면 송시열로 상징되는 조선의 권력자들이 권력투쟁을 하는 동안 조선 백성은 한 번 기근으로 열 명에 두 세 명이 죽어 나갔다. 

수 백 만 명의 백성들이 시체를 끓여 먹다가 좀비가 되거나 굶어 죽을 때  조선 양반들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 한 입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먹고 토했다는 로마 귀족도 아니고 하루에 다섯 끼를 찾아 먹으며 온갖 식도락을 즐겼다. 

<조선 양반이 하루5끼 먹었다 기사, 동아일보, 2019년2월11일>

머리가 제대로 박힌 지배층이라면 먼저 백성이 있은 후에 자신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굶어 죽는 백성들 옆에서 하루 다섯 끼를 먹으며 화로에 소고기를 구워 먹으면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갈까? 참고로 조선에는 소도살금지법이 있었다. 


조선 시대 양반은 복날이면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민어탕을 먹으며 백성들에게는 보신탕이나 먹으라고 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 신석기 시대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농’이 쓴 개고기 약효를 앞다투어 출판했다. 그 중 제일이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신윤복, 연당야유도, 조선, 18세기>

공자가 먹었고 한나라 유방이 먹었으니 조선인도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 시대 양반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정약용 같은 천주교를 믿은 양반은 개고기를 먹었다. 이황처럼 중국 책을 그대로 표절한 양반도 개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양반 대부분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반은 조선의 지배자였다. 역사를 통틀어 고기를 풍족하게 먹는 인간들은 개고기를 안 먹는다. 기마 유목민이 개고기를 안 먹는 건 양고기가 주식이기 때문이다. 춘추전국 시대에도 돈 많은  왕과 귀족은 소나 돼지를 먹었다. 

<김홍도의 풍속도첩 중 새참, 조선, 19~20세기 초>

개고기는 공자 같은 선비 나부랑이나 유방 같은 가난한 농민이나 먹었다. 조선 시대가 되자 선비 나부랑이가 왕을 능가하는 귀족이 되었고 그들은 개고기 대신 숯을 넣은 화로에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열 중 서넛이 굶어 죽는 상황을 개선하기는 커녕 개고기나 먹으라고 한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는 뭘 배워야 할까? 개고기는 복날 가난한 백성들이 먹던 전통 음식이라고? 그거 누가 먹게 만들었는데? 21세기에도 선비들의 말장난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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