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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개 전용 사원이 있던 당나라

한국 속 유목사

삼국 유목 전통을 가장 충실히 지켰고 신라 왕족만 키울 있는 삽살개가 있던 것으로 보아 신라는 명백히 개숭(배하는)파였다. 성골이 끝나는 시점인 7세기까지는 개고기 먹을 일이 없었다.  


통일신라의 국교는 불교였다. 10세기에 세워진 고려도 불교였다. 역시 개 먹을 일이 없다. 가끔 선승인 뭐니 하며 개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는 땡중이 있다. 헛소리다. 부처님이 콕 찝어 개는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통일신라, 719년 , 국립중앙박물관>


적어도 14세기 건국된 조선 시대 전까지 우리 민족에게 개고기라는 단어는 불길한 단어였다그렇다면 신라는 당나라와 일본에 굳이 개를 배에 실어 보냈을까?  


신라 계림로 황금 보검처럼 국교 차원에서 나라 왕족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정세 공식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라 황금보검과 유사한 황금장식이 발견된 카자흐스탄>


신라 황금 보검과 같은 양식은  세계에서 극소수 지역에서만 출토된다. 신라, 로마이집트흉노서아시아중앙아시아 등이다특히 지금의 카자흐스탄에서는 신라 계림로 보검 손잡이 장식과 똑같은 장식이 발견되었다


일단 신라와 카자흐스탄이 관련 있다는 얘기다극동의 신라 수도 경주에서  중앙아시아와 흉노가 사용하던 황금보검이 발굴 되었는지 몰라 한국사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한다뭐가 수수께끼라는 건지 모르겠다.  


<기마 인물 모양 토기, 신라, 국보,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계림로 황금보검이 발견된 무덤에서는 기마 인물형 토기와 수레 모양 토기도 같이 나왔다. 신라 왕조가 유목 왕조인 것이다. 고대부터 카자흐스탄 지역은 투르크와 관계 깊다한나라 유방이 흉노에게 공주를 바치던 기원전 2세기에는 오손이 지배했다. 


오손  곤막은 늑대가 키운 아이였다돌궐과 위그르에서는 늑대가 신이었다왕은 늑대머리 깃발을 휘날렸다. 투르크 인은 개가 인간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믿었다유목민은 조상이 누구냐에 따라 적과 친구가 분명하게 나뉜다고 했다



기마유목 왕조에는 마치 옥새와도 같은 신성한 개가 있었다삽살개는 신라 왕족의 상징이다. 8세기 신라 김교각 스님이 당나라 건너갈 삽살개를 데려간 이유는 그가 왕족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당나라 중심지인 안휘성)에서 김교각 스님은 삽살개와 함께 추앙받는다같은 숭배 문화권에 같은 늑대 혈통 왕족이니 친선의 의미로 쪽에서는 황금보검을, 저 쪽에는 개를 보낸 것이다


<당나라 황실을 그린 당인궁악도 속 페키니즈, 836~907년>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도 황실에서만 키울 수 있는 사자 개가 있었다. 페키니즈다. 신성한 개 개념과 유물의 유사성 외에도 신라 자체가 투르크 계라는 설이 있다.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봤을 그럴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청나라 황제 건륭제도 청 왕조 조상은 신라인이라고 했다. 사실 신라가 흉노 계인지 투르크 계인지 따지는   숭배 문명권에서 봤을  무의미하다어차피 형이냐 동생이냐 차이다. 

<조상이 신라인이라고 한 청나라 황제 건륭제 (1735-1796)>



수컷 늑대와 인간 여자가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들이 흉노다반이 늑대다.  흉노인 남자가 다시 암컷 늑대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 투르크다. 4분의 3 늑대 혈통이다. 더 신성하다


흉노와 투르크는 누가  잘났냐 피터지게 싸웠겠지만 이리 메치나 저리 메치나 어차피 둘 다 개숭(배하는)파다신라가 황금 보검을 주고 받은 6세기~8세기 카자흐스탄은 투르크인 돌궐과 위그르가 지배했다

<당나라에서 활동한 중앙아시아 사람들, 7세기~10세기>


돌궐과 위그르는 당시 사실 당나라를 지배했다당나라는 왕조 시작부터 돌궐과 함께 했다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리던 돌궐이 망한 후에는 역시 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린 위그르 군대가 왕조를 지켜주었다. 


왕조와 돌궐-위그르는 마치 바지사장과 주인 같은 관계였던 것 같다돌궐의 도움으로 시작된 왕조는 위그르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당 궁정에서는 지금의 폴로 게임을 즐겼다. 


당나라 유물 중에는 유독 중앙아시아 서역인 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당나라에는  10  정도의 마니교도 살았다. 소그드 상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서역인이다


<폴로 게임을 즐기는 당나라 귀족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합쳐진 종교다. 개를 신으로 받드는 조로아스터교와 당시 머리 성인을 믿은 기독교가 만났다 정신으로 개고기를 먹었을까? 마니교 수장은 돌궐과 위그르를 움직여 당나라 황제를 쥐락펴락했다


마니 교도가 아니더라도 당시 당나라에는 개 먹는 중국 한족 풍습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수행 중심의 불교와 도교가 유행하면서 채식을 권장했기 때문이다마니교불교도교 모두 개고기를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교의 권선서 내용을 조각한 당나라 시대 주택 난간, 7세기~10세기>



베이징에는 병든 반려견의 건강을 기원하는 전용 도교 사원이 있었다이런 당나라에 개고기 개를 비싼 배에 실어 수출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당시 일본 역시 개고기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6~8세기 일본은 아스카 시대였다


일본의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쇼토쿠 태자가 야심차게 불교를 국가 정책으로 밀고 있었다국가의 인재를 모아 당나라 불교를 배우러 보내던 일본 황실에서 개고기  개를 굳이 배로 수입 했을까? 


<호류지에서 강의하는 일본 쇼토쿠 태자>


먹을 널린 황족이 일본 역사를 통틀어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신석기인인 조몬인과 에타 족밖에 없다에타 족은 일본 불가촉천민이다. 신라의 개고기 일본 수출설은 뇌수술을 당한 중화사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없는 발상이다



25. 선덕여왕과 미실은 개고기를 먹었을까?

한국 속 유목사

신라가 일본에 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들어 신라와 일본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주장을 한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있다. 먹는 용도 외에 개를 일본에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라와 일본이 사이좋게 개고기를 먹었는지 알아보려면 신라 시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 고대사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 


<계림로 황금 보검, 신라, 5~6세기>


일본이 없앴는지 조선 양반들이 없앴는지 길은 없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보기에는 신라 역사는 경악,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자로 남아 있는 기록도 거의 없고 유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국내, 외적인 이유로 나눠볼 있다


국외적인 이유로 세계 역사계에서 한국사 조선 이외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동양사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계와 일본계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고대사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지방에서 발굴된 손잡이 장식. 5세기.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남아있는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정도인데 그마저도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비평한다. 국내적인 이유는 국내 역사학계의 의 부족이다. 신라의 로만글라스, 황금관, 황금 보검, 황금 허리띠 연구할 유물은 넘치건만 오직 중국사대주의나 식민사관으로 연구를 한다


중국과 일본 관점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것이다. 나름 멀쩡하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누가 뜯어가도록 방치하는 수준이니 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드라마가 있다. 7세기 신라 황실 이야기를 그린 선덕여왕이다


진흥왕, 선덕여왕, 김유신 등등,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한국인이라면 이름은 들어봤을 인물들이 등장해 흥미진진한 신라 황실 권력 암투와 사랑을 그렸다. 드라마가 방 당시 이게 정말 공중파로 방송이 될까, 걱정을 했다. 


<경주 천마총 왕비 금관, 국보, 신라, 5세기>


미실이라는 인물 때문이다미실은 화랑세기』 나오는 혈통과 미모와 지략을 갖춘 야망녀다화랑세기』 일제 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박창화라는 재야 역사자가 1930년대 일본 궁내청에서 근무하면서 일본 황실 서고를 드나들며 몰래 필사해 빼돌렸다고 하는 책이다. 일본 창고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금 마개가 있는 유리 사리병, 국보, 통일신라(7세기~10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화랑세기』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나오기 신인작가가 미실』이라는 소설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소설 미실도 출판 당시 허무맹랑한 야설이란 비난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유목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미실의 행동이 환단고기』만큼이나 황당무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신라 왕비 사용하던 황금 허리띠, 국보,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화랑세기』에서는 결혼제도가 무용지물이다. 철저한 모계 사회에 자유 연애를 지향한다. 신라 금관이나 황금 허리띠 모두 왕비가 사용하던 유물이다. 왕은 금동을 사용했다. 동이 더 중요하다고? 


고대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금은 왕을 상징했다. 통일 신라 이전 신라가 모계사회였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화려한 황금 공예가 통일신라 이후에 사라진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남녀 모두 정절 따위 개나 줘버린다


<일본 헤이안 시대에 쓰여진 궁중연애사 겐지모노가타리, 11세기>


성골진골화랑들 가릴 것 없이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연애하는 게 다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연애와 성관계가 일종의 권력 투쟁 수단이다그들에게 중요한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왕후가 누가 되느냐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를 낳아야 한다. 


마치 11세기 일본에서 쓰여진 궁중연애사인 겐지모노가타리』 성인 버전을 보는 듯하다화랑세기』  신라에는 바람이나 불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아이가 있는 유부녀가 신분이 높은 남자에게 간택을 받는다면 아이 엄마는 당연하게 아이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간다. 


<돌궐의 금제 허리띠, 몽골의 국보, 8세기>


아이와 전남편은 팔자 여자 덕분에 덩달아 신분이 높아진다. 물론 간혹 아내를 빼앗겨 울고 불고 하는 남편도 존재한다. 이혼 절차는 필요없다. 살림을 하는 것이다


집은 남편이 수도 있고 집은 아내가 수도 있다. 신라 황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도 때도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신성한 유전자를 땅에 남길 의무가 있었다. 


<고려의 허리띠 고리, 14세기>


불륜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다. 근친혼도 성행한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고 이복여동생과 오빠가 결혼한다. 이러니 금수만도 못하다, 황당무계 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 미실의 며느리는 이렇게 꾸짖었다. "어찌 국풍(신의 나라인 신라의 ) 따르지 않고 화풍(중국의 풍습) 쫓으려 하느냐?!!" 이게 끝이 아니다. 


<흉노의 누금 장식 구슬. 기원전 1세기~ 기원 후 1세기>


여기에 색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색이란 성이다. 성을 바치는 , 성상납이다. 사람이 원하면 당연히 성관계를 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런 사람을색공지신’(성을 바치는 신하)이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이 즉위한 비담은 상대등이 되어 국정을 운영한다. 그런데 미혼인 여왕과 국정을 논하는 장소가 하필이면 침실이다. 


<낙랑 , 삼한의 금제 허리띠 고리 속 누금 장식. 국보, 기원전 3세기~기원 후 3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여왕이 잠옷을 입고 있어도 거리낌없이 침실을 드나든다. 그럴까? 비담이색공지신이기 때문이다. 색공지신은 부끄러운 아니었다. 공인된 관계였다


성골인 여왕이 직계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선덕여왕이 여자라 전담 가문(혼인 가문) 맡지 않고 비담 개인이 색공지신을 맡은 것이다.


<신라의 누금 장식 황금 귀걸이, 국보, 5~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남자 왕일 경우 색공을 바치는 전담 가문이 있었다. 왕비 가문이다. 흉노를 비롯한 모든 유목 왕조에는 가문과 왕비 가문이 있었다


신라는 규칙을 너무 철저하게 지켜 선덕여왕 다음 대에 지켜 대가 끊기는(성골이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런 신라에서 개고기를 먹다못해 일본으로 수출까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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