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일본에 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들어 신라와 일본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주장을 한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있다. 먹는 용도 외에 개를 일본에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라와 일본이 사이좋게 개고기를 먹었는지 알아보려면 신라 시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 고대사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림로 황금 보검, 신라, 5~6세기>
일본이 없앴는지 조선 양반들이 없앴는지 알 길은 없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보기에는 신라 역사는 경악,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자로 남아 있는 기록도 거의 없고 유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국내, 외적인 이유로 나눠볼 수 있다.
국외적인 이유로 세계 역사계에서 한국사 중 조선 이외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동양사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계와 일본계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고대사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지방에서 발굴된 손잡이 장식. 5세기.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남아있는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정도인데 그마저도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비평한다. 국내적인 이유는 국내 역사학계의 의지 부족이다. 신라의 로만글라스, 황금관, 황금 보검, 황금 허리띠 등 연구할 유물은 넘치건만 오직 중국사대주의나 식민사관으로 연구를 한다.
중국과 일본 관점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것이다. 나름 멀쩡하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누가 다 뜯어가도록 방치하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드라마가 있다. 7세기 신라 황실 이야기를 그린 선덕여왕이다.
진흥왕, 선덕여왕, 김유신 등등,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한국인이라면 이름은 한 번 들어봤을 인물들이 등장해 흥미진진한 신라 황실 내 권력 암투와 사랑을 그렸다. 드라마가 방영 될 당시 이게 정말 공중파로 방송이 될까, 걱정을 했다.
<경주 천마총 왕비의 금관, 국보, 신라, 5세기>
미실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미실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혈통과 미모와 지략을 갖춘 야망녀다. 『화랑세기』는 일제 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박창화라는 재야 역사자가 1930년대 일본 궁내청에서 근무하면서 일본 황실 서고를 드나들며 몰래 필사해 빼돌렸다고 하는 책이다. 일본 내 모 절 창고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금 마개가 있는 유리 사리병, 국보, 통일신라(7세기~10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나오기 전 모 신인작가가 『미실』이라는 소설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소설 미실도 출판 당시 허무맹랑한 야설이란 비난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유목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미실의 행동이 『환단고기』만큼이나 황당무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신라 왕비가 사용하던 황금 허리띠, 국보,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화랑세기』에서는 결혼제도가 무용지물이다. 철저한 모계 사회에 자유 연애를 지향한다. 신라 금관이나 황금 허리띠 모두 왕비가 사용하던 유물이다. 왕은 금동을 사용했다. 동이 더 중요하다고?
고대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금은 왕을 상징했다. 통일 신라 이전 신라가 모계사회였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화려한 황금 공예가 통일신라 이후에 사라진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남녀 모두 정절 따위 개나 줘버린다.
<일본 헤이안 시대에 쓰여진 궁중연애사 겐지모노가타리, 11세기>
성골, 진골, 화랑들 가릴 것 없이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밥 먹고 연애하는 게 다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연애와 성관계가 일종의 권력 투쟁 수단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다음 번 왕이 누가 되느냐, 왕후가 누가 되느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를 낳아야 한다.
마치 11세기 일본에서 쓰여진 궁중연애사인 『겐지모노가타리』 성인 버전을 보는 듯하다. 『화랑세기』 속 신라에는 바람이나 불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아이가 있는 유부녀가 신분이 높은 남자에게 간택을 받는다면 아이 엄마는 당연하게 아이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간다.
<돌궐의 금제 허리띠, 몽골의 국보, 8세기>
아이와 전남편은 팔자 핀 여자 덕분에 덩달아 신분이 높아진다. 물론 간혹 아내를 빼앗겨 울고 불고 하는 남편도 존재한다. 이혼 절차는 필요없다.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이다.
이 집은 남편이 둘 일 수도 있고 저 집은 아내가 둘 일 수도 있다. 신라 황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도 때도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신성한 유전자를 이 땅에 남길 의무가 있었다.
<고려의 허리띠 고리, 14세기>
불륜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다. 근친혼도 성행한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고 이복여동생과 오빠가 결혼한다. 이러니 금수만도 못하다, 황당무계 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 미실의 며느리는 이렇게 꾸짖었다. "어찌 국풍(신의 나라인 신라의 도)을 따르지 않고 화풍(중국의 풍습)을 쫓으려 하느냐?!!" 이게 끝이 아니다.
<흉노의 누금 장식 구슬. 기원전 1세기~ 기원 후 1세기>
여기에 한 술 더 떠 ‘색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색이란 성이다. 성을 바치는 것, 성상납이다. 윗 사람이 원하면 당연히 성관계를 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런 사람을 ‘색공지신’(성을 바치는 신하)이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이 즉위한 뒤 비담은 상대등이 되어 국정을 운영한다. 그런데 미혼인 여왕과 국정을 논하는 장소가 하필이면 침실이다.
<낙랑 , 삼한의 금제 허리띠 고리 속 누금 장식. 국보, 기원전 3세기~기원 후 3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여왕이 잠옷을 입고 있어도 거리낌없이 침실을 드나든다. 왜 그럴까? 비담이 ‘색공지신’이기 때문이다. 색공지신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공인된 관계였다.
성골인 여왕이 직계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선덕여왕이 여자라 전담 가문(혼인 가문)이 맡지 않고 비담 개인이 색공지신을 맡은 것이다.
<신라의 누금 장식 황금 귀걸이, 국보, 5~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남자 왕일 경우 색공을 바치는 전담 가문이 있었다. 왕비 가문이다. 흉노를 비롯한 모든 유목 왕조에는 왕 가문과 왕비 가문이 있었다.
신라는 이 규칙을 너무 철저하게 지켜 선덕여왕 다음 대에 지켜 대가 끊기는(성골이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런 신라에서 개고기를 먹다못해 일본으로 수출까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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