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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84.천주교의 개사랑 독재 Vs 북한의 개고기 독재

유럽사

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개고기 비난에 대해 반박할 때 외국 어디도 먹고 어디도 먹는다는 식으로 핑계를 댄다. 개고기를 먹는다고 주장하는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와 스위스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와 서양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대리석 개 조각, 로마, 1~2세기박>

서양사는 또한 이슬람사와 미국사, 청사와도 연결된다. 종교 개혁 이후 천주교와 청나라 역사는 조선 역사와도 연결된다. 병자 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 가족들이 조선에서 몰살당한 이야기와도 관련 있다.  


<천사들과 개가 새겨진 어린이 석관, 대리석, 로마, 300년>

이 길고 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키는 에트루리안이다. 천주교(로마 카톨릭) 토대는 에트루리안이고 종교 개혁 이전 서양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로마 지배층은 에트루리안 문화를 그대로 가져왔다.


<횃불을 든 아르테미스와 개가 새겨진 램프, 로마, 175~225년>

수 천 년 전 개 무덤을 만들 정도로 (특정)개를 숭배한 에트루리안 지배층은 날개달린 개 신앙을 믿었다. 날개달린 개 신앙은 로마 제국 지배층은 주로 그리핀으로 변형된 날개달린 개 상징을 즐겨 사용했다.


<횃불 든 아르테미스와 개 테라코타, 로마, 기원전 3~2세기>

로마에서 개는 죽음과 어둠(어둠을 밝히는 불)의 영역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로마와 에트루리안 사이의 전쟁은 기존 해양 교역 지배 세력에 새로운 왕족(로마의 건국 세력)이 추가되는 선에서 정리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 형제가 개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 신화도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기존의 왕족이 아니기에 황제가 될 정당성이 없는 로물루스 형제에게 신성을 부여해 왕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젖이 불은 날개달린 개가 새겨진 인장 반지, 그리스 로마 지역, 기원전 1600~1500년> 

로물루스 형제가 태어나기 수 천 년 전부터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막 새끼를 낳은 듯 젖이 불은 날개달린 개가 황제를 상징한다고 믿었다. 새로운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만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청나라에도 있었다. 키루스 대왕과 누르하치는 죽을 위기에서 개가 목숨을 구해줬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개를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청 왕조에서는 개를 죽이는 것이 불법이었다

<조로아스터교를 믿은 후기 바빌로니아의 개석상, 기원전700~500년>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이슬람 제국에서는 개가 악마다. 청 왕조가 멸망한 후 세워진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은 중국에서 사라진 개고기 식용 문화를 되살렸다. 모택동의 붉은 군대는 개고기를 먹었다중국 공산당 군대 소속이던 김일성은 개고기를 좋아했다. 


개고기를 금지하는 천도교를 제거하고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 지배 후 개고기는 북한의 전통음식이 되었다. 개고기 하나로 중국 공산당과 북한이 연결되는 것이다. 북한이 내세운 개고기 전통론의 근거는 또한 현재 한국에 만연한 개고기 전통론의 근거와 정확히 일치한다


<중국 공산당의 제국주의와 개고기 식용에 관한 개념도>


북한은 김일성이 사랑한 개고기를 전통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허준의 동의보감을 내세웠다또 그 외 조선에서 발행한 개고기에 대한 문헌을 긁어모아 개고기가 보약이라고 선전했다


<모택동과 만난 김일성, 1970년 10월 1일>

그런데 앞서 말했다 시동의보감을 비롯한 조선 시대 개고기 기록의 원 출처는 신농본초신석기 시대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농이란 신이 쓴 기록을 중국 양나라 시대 중국 한족이 찾아내 책으로 엮은 것이 신농본초


<신농, 1503년>


김일성은 동의보감의 약효를 아주 철썩같이 믿은 듯 하다김일성의 만수무강만을 연구하는 연구소는 1970년대부터 개고기 약효에 대해 아주 집요하게 연구했다. 개고기와 불포화지방 혹은 개고기와 콜레스테롤과의 관계 등 북한에서 연구한 연구 기록은 1989년 이후 한국에서 통용되었다.


<소련 공산당의 후원을 받으며 평양시 민중대회에 등장한 김일성, 1945년 10월 14일>

개고기 전도사를 자처하며 육견협회 고문을 지냈으며 개고기 사업에 열을 올리던 한 식품영양학과 교수를 통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북한의 개고기 전통론과 개고기 만병통치설은 아무런 검증없이 한국 사회에 퍼졌다. 


<만청상 연구원에서 김일성 만수무강을 위해 가축을 연구한다는 통일신문, 2016년 4월>


한국 언론,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 운동권 세력, 친일파 세력 등이 합세하며 형성된 한국의 개고기 옹호론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개고기 전통론과 학계에 최초 보고된 약효는 모두 북한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도로 북한이 개고기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느냐 하면 전혀 새로운 종의 개를 창조해낼 정도였다.

<노란 샤페이 강아지, 사진 출처 : Beverly & Pack>

황구(누렁이)가 제일 몸에 좋다는 신농의 말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굶어죽는 와중에도 눈물나는 개량 연구 끝에 머리부터 발끝부터 심지어 눈알까지 노란 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내는 김일성이 만수무강해야 북한도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50. 소현세자는 왜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나?

조선

청나라는 인조를 생포해 머리를 찧게 하는 항복을 받는 선에서 병자호란을 끝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로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청나라가 다른 전쟁에서 한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초원의 패권을 다툴 당시 몽골족 남자는 설령 아기일지라도 죽였다. 죽일 때도 그냥 안 죽였다. 나무 말에 앉힌 후 정수리부터 정을 박아 죽였다. 적에게 공포심을 주는 사형 퍼포먼스다. 

<청나라가 신장 위그르를 점령한 후 데려온 인질 행렬, 1755년>

 

반역을 꾀한 위그르를 응징하고 끌고 온 포로들 행진을 보면 당시 청 왕조가 포로취급을 어떻게 했는지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포로들을 동물원 구경거리로 삼았다.

인조는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 원래대로라면 인조도 청나라로 끌려가 저 꼴을 당했어야 했다. 심지어 위그르는 저 굴욕을 당하고 2년 뒤, 건륭제에게 백마를 바치며 아부를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그르 사신에게 백마를 선물 받는 건륭제, 1757년 >

 

당시 청은 몽골과 티베트까지 복속시킨 중앙아시아 대륙의 지배자였다. 청 황실은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와 소현세자를 청 황실의 종친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니까 인조와 소현세자를 동급으로 보았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게 살해된 이유다. 아들을 정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청 황제는 소현세자에게 농지 20만 평을 주었다. 20만 평이면 축구장 100개, 여의도 4분의 1 크기다.

<황제의 남부 순행을 구경하러 나온 청나라 개,1699년>

황제에서 땅을 20만 평을 하사받은 것 자체가 포로가 아닌 종친 대접이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땅은 넓은데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자 청 황제는 중국 전역에서 거래되던 조선인 포로를 구해다(사다가) 부려도 된다고 허락했다.


정약용 형제처럼 외딴 섬에 위리안치 시켜 병들면 약 대신 개고기나 먹게 만든 것도 아니고 당대 최고 도시 중 하나인 심양에 축구장 100개 만한 크기의 땅을 주고 조선인 노비들을 채워준 게 포로 학대인가?

<청나라 시대 일꾼들, 도자기, 청, 순치제, 1644-1661년>


그런데도 조선에서는 일부러 척박한 땅을 줬다고 비난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돈이 생기는 대로 중국 전역을 돌며 조선인을 사들였다. 당연히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소현세자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백성과 분리된 삶을 산 조선 지배층 눈에 백성을 위하는 소현세자나 광해군은 이단이었다. 조선인 포로 구입 자금은 어디에서 났을까? 소현세자는 농사 지은 곡식을 팔아 돈을 벌었다.  

<조선의 남대문 시장, 1904년>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더 큰 부를 쌓았다. 조선은 왕조가 들어서자마자 고려의 모든 가게 문을 닫게 할 정도로 상업을 억압했다. 차기 왕이 조선의 개국 정신을 어긴 것이었다. 이것도 이단이다.    


소현세자는 수시로 청 조정에 불려가 국제 정세 및 국내 현안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막힘없이 답변하는 소현세자에게 청나라 조정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걸 조선에서는 소현세자를 괴롭힐 심산으로 시험을 낸 거라고 했다.

<소현세자가 참석했을 청 황제와 신하의 만찬, 청,  18세기>

이런 자의적인 해석이 바로 역사 왜곡이다. 적은 멍청할수록 좋다. 보통 적국의 포로 왕자가 똑똑하면 죽여서 후환을 없앤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으니 똘똘한 소현세자가 더 마음에 든 거다.

황궁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조정에 나가는 건 영광이었다. 황제에게 사적인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청 황실 종친 정도로 제한된다. 어느 나라든 권력자에게 사람이 몰린다.

<청나라에 살던 네덜란드 남녀 도자기 상, 청 1750~1800>

청나라 권력층도 황제와 사담을 할 정도로 가깝고 조정에 수시로 불려나가는 소현세자와 친해지고 싶어한 것 같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 고위 관리들 및 유럽 선교사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포로는 죄인이다. 죄인은 원칙적으로 허가없이 면회를 할 수 없다. 사교 활동은 꿈도 못 꾼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나라 고위층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포로가 아닌 손님이라는 의미다.

<죄인의 처형을 명하는 청나라 황제,  1765~9년 >

이 사실도 인조와 조선 지배층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소현세자가 인조를 배제하고 자기 정치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한 술 더 떠 청나라는 인조가 거슬리는 짓을 할 때마다 “너, 왕 바꿔버린다?”고 협박했다.

조선 내부에서도 차라리 실력과 신망을 갖춘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모든 것이 인조가 소현세자와 강빈, 강빈의 아들들을 죽이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강빈이 보냈을 청나라 여인들의 여가 시간, 청, 1644~1661년>

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찌질이 인조를 몰라도 너무 모른 청나라가 호의를 베푼답시고 소현세자와 가족들을 조선에 돌려보낸 것이 실수였다. 1645년 청 황제 순치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온지 약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강빈은 정실이었다. 소현세자 아들 중 하나가 다음 번 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빈을 폐위시켜야 했다.

<청나라 사신을 맞으러 나온 조선 왕, 18세기> 

1646년 강빈은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와 저주를 했다는 혐의로 폐위된 후 사형을 당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죄인이 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결국 막내 경안군만 살아남았다.

인조가 죽은 후 왕이 된 효종(봉림대군)은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강빈이 억울하다는 사실은 경안군이 적통 왕이라는 의미였다. 독재를 하지 않고는 조선 왕조를 유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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