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인조를 생포해 머리를 찧게 하는 항복을 받는 선에서 병자호란을 끝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로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청나라가 다른 전쟁에서 한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초원의 패권을 다툴 당시 몽골족 남자는 설령 아기일지라도 죽였다. 죽일 때도 그냥 안 죽였다. 나무 말에 앉힌 후 정수리부터 정을 박아 죽였다. 적에게 공포심을 주는 사형 퍼포먼스다.
<청나라가 신장 위그르를 점령한 후 데려온 인질 행렬, 1755년>
반역을 꾀한 위그르를 응징하고 끌고 온 포로들 행진을 보면 당시 청 왕조가 포로취급을 어떻게 했는지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포로들을 동물원 구경거리로 삼았다.
인조는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 원래대로라면 인조도 청나라로 끌려가 저 꼴을 당했어야 했다. 심지어 위그르는 저 굴욕을 당하고 2년 뒤, 건륭제에게 백마를 바치며 아부를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그르 사신에게 백마를 선물 받는 건륭제, 1757년 >
당시 청은 몽골과 티베트까지 복속시킨 중앙아시아 대륙의 지배자였다. 청 황실은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와 소현세자를 청 황실의 종친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니까 인조와 소현세자를 동급으로 보았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게 살해된 이유다. 아들을 정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청 황제는 소현세자에게 농지 20만 평을 주었다. 20만 평이면 축구장 100개, 여의도 4분의 1 크기다.
<황제의 남부 순행을 구경하러 나온 청나라 개,1699년>
황제에서 땅을 20만 평을 하사받은 것 자체가 포로가 아닌 종친 대접이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땅은 넓은데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자 청 황제는 중국 전역에서 거래되던 조선인 포로를 구해다(사다가) 부려도 된다고 허락했다.
정약용 형제처럼 외딴 섬에 위리안치 시켜 병들면 약 대신 개고기나 먹게 만든 것도 아니고 당대 최고 도시 중 하나인 심양에 축구장 100개 만한 크기의 땅을 주고 조선인 노비들을 채워준 게 포로 학대인가?
<청나라 시대 일꾼들, 도자기, 청, 순치제, 1644-1661년>
그런데도 조선에서는 일부러 척박한 땅을 줬다고 비난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돈이 생기는 대로 중국 전역을 돌며 조선인을 사들였다. 당연히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소현세자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백성과 분리된 삶을 산 조선 지배층 눈에 백성을 위하는 소현세자나 광해군은 이단이었다. 조선인 포로 구입 자금은 어디에서 났을까? 소현세자는 농사 지은 곡식을 팔아 돈을 벌었다.
<조선의 남대문 시장, 1904년>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더 큰 부를 쌓았다. 조선은 왕조가 들어서자마자 고려의 모든 가게 문을 닫게 할 정도로 상업을 억압했다. 차기 왕이 조선의 개국 정신을 어긴 것이었다. 이것도 이단이다.
소현세자는 수시로 청 조정에 불려가 국제 정세 및 국내 현안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막힘없이 답변하는 소현세자에게 청나라 조정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걸 조선에서는 소현세자를 괴롭힐 심산으로 시험을 낸 거라고 했다.
<소현세자가 참석했을 청 황제와 신하의 만찬, 청, 18세기>
이런 자의적인 해석이 바로 역사 왜곡이다. 적은 멍청할수록 좋다. 보통 적국의 포로 왕자가 똑똑하면 죽여서 후환을 없앤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으니 똘똘한 소현세자가 더 마음에 든 거다.
황궁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조정에 나가는 건 영광이었다. 황제에게 사적인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청 황실 종친 정도로 제한된다. 어느 나라든 권력자에게 사람이 몰린다.
<청나라에 살던 네덜란드 남녀 도자기 상, 청 1750~1800>
청나라 권력층도 황제와 사담을 할 정도로 가깝고 조정에 수시로 불려나가는 소현세자와 친해지고 싶어한 것 같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 고위 관리들 및 유럽 선교사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포로는 죄인이다. 죄인은 원칙적으로 허가없이 면회를 할 수 없다. 사교 활동은 꿈도 못 꾼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나라 고위층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포로가 아닌 손님이라는 의미다.
<죄인의 처형을 명하는 청나라 황제, 1765~9년 >
이 사실도 인조와 조선 지배층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소현세자가 인조를 배제하고 자기 정치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한 술 더 떠 청나라는 인조가 거슬리는 짓을 할 때마다 “너, 왕 바꿔버린다?”고 협박했다.
조선 내부에서도 차라리 실력과 신망을 갖춘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모든 것이 인조가 소현세자와 강빈, 강빈의 아들들을 죽이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강빈이 보냈을 청나라 여인들의 여가 시간, 청, 1644~1661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찌질이 인조를 몰라도 너무 모른 청나라가 호의를 베푼답시고 소현세자와 가족들을 조선에 돌려보낸 것이 실수였다. 1645년 청 황제 순치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온지 약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강빈은 정실이었다. 소현세자 아들 중 하나가 다음 번 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빈을 폐위시켜야 했다.
<청나라 사신을 맞으러 나온 조선 왕, 18세기>
1646년 강빈은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와 저주를 했다는 혐의로 폐위된 후 사형을 당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죄인이 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결국 막내 경안군만 살아남았다.
인조가 죽은 후 왕이 된 효종(봉림대군)은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강빈이 억울하다는 사실은 경안군이 적통 왕이라는 의미였다. 독재를 하지 않고는 조선 왕조를 유지할 수 없었다.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52. 개고기 먹인 조선, 마녀 사냥한 유럽 (0) | 2019.03.14 |
---|---|
51. 조선 공주, 청 황실의 정비가 되다 (0) | 2019.03.12 |
48. 중국 조선 총독부 조선 왕조, 개고기는 전통? (0) | 2019.03.05 |
46. 킹덤 속 사람들은 왜 인육을 먹었나? (0) | 2019.02.28 |
45. 공자로 개혁? 초장부터 망조 든 조선 (0) | 2019.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