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개고기 5

133. 영남학파는 복날 노비에게 개고기를 먹였나?

청 왕조 시대 내내 개를 죽이고 먹는 것은 반역 행위였다. 청 왕조에서 개 죽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반청 행위를 하는 세력은 순수 한족 왕조의 부활을 꿈꿨다. 조선 시대 노비들을 시켜 개를 때려죽이게 한 양반들처럼 말이다. 조선 시대 양반은 좀 정신이 비정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조선인인척 하는 중국인 혹은 중국 식민지 대리인이다. 그들은 고려까지 한민족의 모든 정통을 부정했다. 대신 조선은 작은 명나라라고 하며 조선을 중국으로 만들려 했다. 그 중에는 개고기 식용도 포함된다. 고려시대까지는 복날에는 동지와 마찬가지로 팥죽을 끓여 먹었다. 팥은 우리 전통에서 귀신을 쫓는것으로 알려졌다. 이걸 조선 시대 꼴통 양반들은 개고기로 바꿔 버렸다. 왜? 고대 중국에서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었기 ..

조선 2019.10.08

120. 토머스 제퍼슨의 흑인 첩과 복날 개고기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농촌 일꾼에게 복날 개고기를 먹도록 강요한 것은 결국 조선의 노비제도였다. 조선 노비 제도는 미국 노예제도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미국 노예제는 남부에서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조선 전체에 적용되었다. 둘 째, 미국의 노예제도는 남북 전쟁 후 1863년 종료되었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장장 500년을 이어갔으며 지금도 북한에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노예 국가로 알려진 북한은 조선 사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조선 신분 사회의 근간은 노비제도였다. 북한 김 씨 일가와 평양 상류층을 제외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조선 시대 노비처럼 살고 있다. 그러니까 김 씨 일가는 조선의 왕이다. 평양 상류층은 조선 시대 양반..

조선 2019.09.03

118. 황후가 된 여자 노예와 이황의 노비 장사

중앙아시아와 유럽에서 활동한 모든 기마 유목부족은 끊임없는 전쟁을 하며 노예를 확보했다. 노예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다른 잡다한 일들을 했다. 지배층은 오직 전쟁과 교역만 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1000만 명에 달하는 베이징인을 죽이는 대신 거의 노예 상태로 만들었다. 원 제국 시기 인구의 90%가 넘는 과거 송나라 인은 만쯔라고 불리는 노예였다. 지금의 터키인 오스만 제국에서는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터키의 노예 상인이 얼마나 악명 높았는지 19세기 영국 만국박람회에서는 터키 상인에 의해 팔려가는 그리스 여자 노예 조각상이 전시되기도 했다. 청나라 건륭제는 위그르 반란을 진압한 후 수많은 포로를 끌고 왔다. 전쟁에서 진 포로들은 대개 노예가 되었다. 로마-카톨릭은 유럽의 인종주의로 발전했고 피부 색이..

조선 2019.08.29

116. 18세기 고양이 대학살과 개소주 이황

조선 시대 양반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 굶주린 노비는 개고기를 먹었다. 인공위성 파편에 맞아 죽을 확률로 말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일부 한국인들이 왜곡하여 개고기 식용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복날, 가난한 농민, 개고기’는 선한 전통이고 ‘부자, 양반, 친일파, 독재자’는 악이라는 단순 무식한 대립 구도로 몬 것이다. 복날 개고기 식용을 통해 가난한 노비(노동자, 프롤레테리아)와 양반(부자, 부르주아)의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조선 시대 개를 때려잡아 개고기를 먹은 것은 개를 조상신으로 여긴 양반에 대한 증오의 표출이다. 이는 개를 청 왕조의 상징으로 여겨 개를 때려잡아 먹는 고대 중국 식습관을 되살린 중국공산당과 같은 논리다. 또한 18세기 프랑스 방직공장에서 일어난 고양이 대학..

조선 2019.08.24

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

조선 2019.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