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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영남학파는 복날 노비에게 개고기를 먹였나?

조선

청 왕조 시대 내내 개를 죽이고 먹는 것은 반역 행위였다. 청 왕조에서 개 죽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반청 행위를 하는 세력은 순수 한족 왕조의 부활을 꿈꿨다. 조선 시대 노비들을 시켜 개를 때려죽이게 한 양반들처럼 말이다. 

조선 시대 양반은 좀 정신이 비정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조선인인척 하는 중국인 혹은 중국 식민지 대리인이다. 그들은 고려까지 한민족의 모든 정통을 부정했다. 대신 조선은 작은 명나라라고 하며 조선을 중국으로 만들려 했다. 그 중에는 개고기 식용도 포함된다. 


<복날 개고기로 보는 한민족의 중국화>

고려시대까지는 복날에는 동지와 마찬가지로 팥죽을 끓여 먹었다. 팥은 우리 전통에서 귀신을 쫓는것으로 알려졌다. 이걸 조선 시대 꼴통 양반들은 개고기로 바꿔 버렸다. 왜? 고대 중국에서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었기 때문이다. 

병자호한 후에는 개고기를 먹는 것이 오랑캐인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운동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명 왕조 대에도 개고기는 여전히 고대인이나 먹던 음식으로 치부되어 강남의 거지나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명나라 황자 주권의 호인 구선을 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명나라 왕자 주권이 고대 중국 기록을 찾아내 무술주를 알리긴 했지만 사실 그는 딱히 개고기 술을 알리려 한 게 아니라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거저거 하다 보니 개고기 술이 나오는 고대 기록을 필사한 것 뿐이었다. 

황위 싸움에서 진 그는 사형을 당한 형들과 달리 연금만 당했다.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진심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연금 상태에서 중국 도교에 심취했다. 당, 송 대 이전 중국 고대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아 금단이니 한식산이니 하는 마약 성분을 먹었다고 했다. 


<북제교서도 중 한식산을 마시는 귀족들, 양자화, 북제, 6세기>

주권이 고대 중국 도교 서적을 파다보니 걸린 것 중 하나가 개고기 술이어서 책으로 냈는데 그걸 조선의 이 황이 훔쳐와 마치 자기가 개고기 술 비법을 깨우친 양 조선에 알린 것 뿐이다. 


명나라에서 개고기를 식량으로 먹었다든가 개고기 술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오직 조선에서만 도산 서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 기관을 장악한 퇴계 이황으로 인해 개고기 술과 개고기 약효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권의 책을 표절해 개고기 술을 조선에 퍼트린 이황>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 지배층은 이황과 마찬가지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간악하게 수탈하며 개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다. 개인적으로 복날 머슴이 개고기를 먹게 된 것도 이황의 퇴계 학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에서는 지금도 이황의 후손들이 개고기 술인 무술주 담그는 시연을 한다. 퇴계 학파와 관련 있는 안동 장 씨가 남긴 음식디미방은 조선 후기 양반이(천주교 제외) 개고기를 먹은 유일한 기록이다


<개고기 요리법이 담긴 『음식디미방』, 안동 장 씨, 조선, 1670년>

노비 거래로 재산을 불린 이황은 노비를 가축쯤으로 여겼다. 고려 시대까지 팥죽을 먹던 복날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이 날만은 노비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했지만 평소 개고기를 좋아한 이황답게 노비에게 개를 때려잡아 먹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주인인 나도 개고기를 먹는데 노비에게 못 먹일 이유가 없다. 특히 뭔가를 해 먹여야 하는 복날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개고기에 환장한 이후 북한 주민 전체가 개고기를 먹게 되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고려 시대까지 복날에는 액을 쫓는다는 의미로 팥죽을 먹었지만 조선 후기 중국화되면서 개고기 식용으로 왜곡되었다>

복날 노비가 개고기를 먹는 풍습은 영남(경상도) 퇴계 학파 양반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황을 추종하는 퇴계학파 가문에서 한양에 집을 샀다면 한양 집 노비들에게도 복날이면 개를 때려잡아 먹게 했을 것이고 호남 지방에 땅을 샀다면 거기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 주민에게 개고기를 먹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해서 양반가 노비들에게 전파된 복날 개고기 먹는 악습은 청 왕조에 대한 복수였다. 청 황제가 조선 양반들은 노비들을 시켜 개를 때려잡아 먹게 한답니다라는 소식을 듣고 부들부들할 걸 상상하며 흐뭇해했을 지도 모른다


<조선 지배층은 고대 중국과 명나라 외의 모든 왕조를 증오했다>

청 황제를 열 받게 하는 건 망한 명나라(명나라는 개를 안 먹었지만)에 대한 부흥운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백성 중 대부분은 개고기를 먹고 싶어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망하는 순간까지 개고기는 가장 비천한 신분인 노비만 먹도록 강력히 규제되었다


한편, 1910년 일제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조선 왕조는 사라지고 일본 황가에 편입되었다. 조선 왕족은 일본 황족이 되었다. 개고기 술을 좋아한 영남학파를 포함한 500년 기득권을 쥔 조선 양반들을 어찌 되었을까? 조선 왕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협력해 앞날을 보장받은 일부 양반들 외에는 쫄딱 망했다.


<1910년부터 일본 황족이 된 순종,고종,순종황후, 덕혜옹주, 1909년>

조선 양반들 입장에서 제일 열받는 건 신분이 철폐되었다는 것이다. 노비도 없어지고 양반도 없어졌다. 노비는 신나지만 양반은 열 받는 정책이었다. 두 번째 토지개혁으로 일제에 토지를 왕창 빼앗겼다

측량을 하니 토지대장을 만든다느니 하는 선진문물에 적응하지 못한 시골 양반들은 눈 뜨고 땅을 빼앗겼다조선 왕조 500년 내내 오직 땅에서 난 곡식으로만 산 양반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토지개혁? 99%의 백성들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 1918년>

조선의 땅은 대부분 왕가와 양반들 소유였기 때문에 토지개혁을 하든 토지 분양을 하든 가난한 백성들과는 전혀 상관 없었다. 병자호란 후 조선 말기까지 열 명 중 너 댓 명은 꾸준히 굶어죽을 정도로 굶주렸다. 백성들 입장에서 일제시대는 그다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특히 노비 입장에서는 노비문서가 없어진 것만으로 꿈이냐 생시냐 했을 것이다1910년 이후 조선에서 가장 불만이 많은 세력은 기득권을 잃은 양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뿌리까지 반청복명(청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복원하자) 파였다


<조선 시대 개고기는 가장 비천한 계급이 먹도록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헐버트, 『The passing of Korea』, 1907년>

특히 개고기 술 빗어먹던 영남학파는 더 분노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미워 죽겠는 일제가 개고기는 조선의 야만적인 악습이라며 욕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개고기 식용은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과고 연결되게 된다. 

여기에 1921년 중국 공산당이 건국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개고기를 둘러싼 피바람이 시작되었다. 조선 영남학파와 마찬가지로 개고기를 먹으며 청나라를 증오한 중국 공산단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개고기를 이용해 공산주의 혁명 운동을 했다

120. 토머스 제퍼슨의 흑인 첩과 복날 개고기

조선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농촌 일꾼에게 복날 개고기를 먹도록 강요한 것은 결국 조선의 노비제도였다. 조선 노비 제도는 미국 노예제도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미국 노예제는 남부에서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조선 전체에 적용되었다. 둘 째, 미국의 노예제도는 남북 전쟁 후 1863년 종료되었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장장 500을 이어갔으며 지금도 북한에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노예 국가로 알려진 북한은 조선 사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북한은 유교적인 나라라는 송영길 더물어민주당 의원>

조선 신분 사회의 근간은 노비제도였다. 북한 김 씨 일가와 평양 상류층을 제외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조선 시대 노비처럼 살고 있다. 그러니까 김 씨 일가는 조선의 왕이다. 평양 상류층은 조선 시대 양반이다. 대다수 북한 주민은 노비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 시대보다 노비 비율은 증가한 셈이다. 어쨌든 이들 모두 조선은 중국이라고 떠들며 고대 중국인이 복날 먹은 개고기를 자신들의 전통이라며 신나게 먹고 있다. 물론, 식량과 약이 없으니 북한인은 개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


<개고기는 전통적인 민족 요리라고 한 김정일, 자유아시아 방송, 2018년 7월 27일>

사회주의 독재의 변형인 주체 사상으로 인해 조선 시대 존재한 개고기 금기도 사라진 마당이니 북한에서 개고기를 막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노비 국가 북한은 개고기 천국이다.

셋째, 미국의 노예 제도는 조선의 노비제도에 비해 덜 폐쇄적이었고 관대했다. 미국 노예는 조선 노비에 비해 해방될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도 조선보다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John Trumbull, 미국, 1788년>

미국의 노예제도 하면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인물이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이다. 한국의 노비제도 하면? 개고기 술을 조선에 퍼트린 이황이다. 토머스 제퍼슨과 이황은 각각 전통 있는 미국 상류층과 한국 상류층을 상징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대통령인 그는 흑인 소녀를 첩으로 두고 자식까지 낳았다는 혐의를 받았다북한이었다면 최고 존엄의 정부인 흑인 소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죽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지배층의 상징적 인물인 이황>

한국이었다면 핸드폰 문자로 유서를 남기고 조용히 자살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의 흑인 첩은 자식도 일곱인가 다섯인가를 낳고 잘 먹고 잘 살다 늙어 죽었다. 자손들은 일가를 이루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딸이 모두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기 때문이다. 이황은 죽기 직전 뭘 했을까? 자식들에게 노비는 양인과 결혼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노비 수를 펑펑 늘려 재산을 불리라는 조언이었다


<해방된 흑인 노예가 수영을 즐기고 있다, Winslow Homer, 미국, 1899년>

이런 이황에게 노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식이 있었다면 해방시켜 주었을까? 이 황이 노비를 사들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해방시켜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14살에 토머스 제퍼슨의 첩이 되었다는 샐리 헤밍스는 토머스 제퍼슨의 이복 처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장인은 흑인 노예 여성을 유린해 아이들을 낳았고 그 중 한 명이 샐리 해밍스다. 사돈까지 집안이 아주 샹샹바다. 그래봤자 조선 시대 기생충 양반보다는 낫다. 샐리 해밍스와 형제들은 모두 집안 노예로 분류되었지만 농장에서 일을 하지도 않았고 교육도 받았다


<조선 시대 교육, 언론, 사상의 중심지인 이황의 도산 서원, 정선>

어린 샐리 해밍스는 집안 노예들과 함께 토머스 제퍼슨의 부인의 결혼 지참금이 되어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인이 죽고 나서 샐리 해밍스가 14살이 되던 해부터 토머스 제퍼슨은 샐리 해밍스을 첩으로 두었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고 샐리 해밍스는 14살 흑인 혼혈 노예 소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아무리 봐도 샹샹바다. 평생 결혼 한 적 없는 샐리 해밍스는 줄줄이 아이들을 낳았고 하필 다들 백인 혼혈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쓴 미국 독립선언서 낭독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John Trumbull, 미국, 1817~1819년>

그리고 어쩐 일인지 토머스 재퍼슨은 샐리 해밍스의 아이들을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게 해주었다. 죽기 직전에는 엄마인 샐리 해밍스를 제외한 모두를 해방시켜 주었다그 샐리 해밍스조차 재산을 물려받은 토머스 제퍼슨의 딸이 바로 해방시켜 주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딸이나 조선 시대 기생충 양반들보다는 인간적이었다. 조선 시대였으면 다른 기생충 양반들이 나서 제퍼슨 가문을 멸문시켰을 수도 있다하나라도 예외를 두었다가는 노비제도(양반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이 여종과 낳은 아이는 노비였다, 건곤일회첩, 신윤복, 조선, 18~19세기 추정>

일가를 이룬 샐리 해밍스의 자손들은 끈질기게 자신들이 토머스 제퍼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DNA검사까지 받았다. DNA검사 결과 그들은 제퍼슨가 후손이 맞았다토머스 제퍼슨인지 토머스 제퍼슨의 남자의 친척 후손인지 몰라도 말이다

샐리 헤밍스의 후손이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만 보아도 미국 노예제도는 조선 시대 노비제도보다 관대하다. 넷 째, 미국은 노예 제도를 지금도 반성한다. 그러나 한국은 노비제도를 찬양한다. 복날 개고기를 통해서 말이다. 조선 시대 개고기는 저주받은 음식이었으므로 복날 개고기를 먹은 행위는 자발적이지 않다자발적이지 않다면?


<확률적으로 이들 중 몇 명은 노비다, 풍속도첩, 김홍도, 조선, 19~20세기>

기생충 양반이 시킨 거다. 실제 모 교수님의 책에 의하면 복날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양반의 지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복날 가난한 농촌 일꾼들을 찬양하며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주장 중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기 바란다

노비제도에 대한 통렬한 반성 없이 양반이 강요한 개고기만을 찬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 노예제도보다 끔찍한 노비제도를 500년이나 유지하며 고혈을 빤 기생충 양반들의 뜻을 따르는 셈이기 때문이다

구선활인심법, 미국 노예제도, 이황 개고기, 이황 노비, 이황 도산서원, 이황 무술주, 이황 표절, 토마스 제퍼슨 흑인, 토머스 제퍼슨 혼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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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황후가 된 여자 노예와 이황의 노비 장사

조선

중앙아시아와 유럽에서 활동한 모든 기마 유목부족은 끊임없는 전쟁을 하며 노예를 확보했다. 노예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다른 잡다한 일들을 했다. 지배층은 오직 전쟁과 교역만 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1000만 명에 달하는 베이징인을 죽이는 대신 거의 노예 상태로 만들었다. 원 제국 시기 인구의 90%가 넘는 과거 송나라 인은 만쯔라고 불리는 노예였다

<원 제국 시절 노예 취급 받은 송나라 사람, 청명상하도, 1120년>

지금의 터키인 오스만 제국에서는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터키의 노예 상인이 얼마나 악명 높았는지 19세기 영국 만국박람회에서는 터키 상인에 의해 팔려가는 그리스 여자 노예 조각상이 전시되기도 했다.

청나라 건륭제는 위그르 반란을 진압한 후 수많은 포로를 끌고 왔다. 전쟁에서 진 포로들은 대개 노예가 되었다로마-카톨릭은 유럽의 인종주의로 발전했고 피부 색이 다른 인종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터키의 노예상인이 고객에게 노예를 팔고 있다, 프랑스, 1746-7년>

이 인종론이 17세기 이후 아프리카 흑인을 유럽과 미국의 노예로 만들었. 노예를 부리는 데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직 조선만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사람을 (그것도 대규모로) 노예로 부렸다

1392년 이후 하루아침에 노비가 된 전 고려 백성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군역(군대)도 하지 않았다. , 국방력과 세수에 30~50%의 구멍이 생겼다. 건국 직후부터 조선은 점점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아동도 기생이 되었다, 1910-1920년>

조선의 신분 제도와 노비법 상 시간이 갈수록 노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조선시대에는 일단 노비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비가 되어야 했다.

엄마가 노비면 당연히 자식은 노비였다. 아버지가 노비고 엄마가 양인이면? 엄마도 노비가 되고 그 자식들도 노비가 되었다. 만일 우리 집에 남자 노비가 10명 있는데 각자 양인 처녀 10명과 결혼을 시켰다


<자식들에게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늘리라고 조언한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그럼 노비가 20명이 된다. 이들 노비 가정이 각각 자식을 두 명 씩 낳으면? 순식간에 노비 수는 40명으로 불어난다. 이게 조선 시대 성리학의 상징인 이황이 한 재산 증식법이었다

상식적으로 누가 노비와 결혼해 노예가 될까, 싶은가? 죽기 직전까지 굶으면 그렇게 된다. 16세기 이황이 개고기 술을 신나게 먹으며 노비 수를 늘리던 조선은 전염병과 기아로 죽는 사람들 천지였다.


<축제 용 의상을 입는 미국 흑인 노예, Winslow Homer, 미국, 1877년>

밥이라도 먹여주겠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식을 노비로 팔거나 노비와 결혼을 해 스스로 노비가 된 것이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미국의 노예제도보다 잔인하고 간악하고 비인간적이었다


미국 노예주인은 백인과 노예를 억지로 결혼시키지도 않았다. 어쩌다 노예와 결혼한 백인이 노예가 되지도 않았다. 미국 남부는 노예와 백인을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노예 상인으로 악명 높던 오스만 제국은 황후가 노예 출신이었다. 



<노예 출신 오스만 제국 황후인 록살라나 (1500-1558), 오스만 제국, 18~19세기 작품>

즉, 노예도 얼마든지 신분이 바뀔 수 있었다. 조선은 양반 남성의 자식을 열 명을 낳아도 안방마님이 될 수 없었다. 에트루리안 귀족의 연회에서 성적 접대를 한 노예가 임신을 한다면 그 아이는 귀족 쩌리 쯤으로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최악은 조선 시대 노예 주인은 놀고먹었다는 것이다. 원래 주인은 교역이든 전쟁이든 해서 밥벌이를 해야 한다. 조선은 교역도 안 하고 전쟁도 안했다. 침략만 당했다. 그 와중에 장사도 금했다. 상인은 농민 다음의 천민이었다


<뛰어난 재능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어 작위까지 받은 화가 후안 드 파레하, 스페인, 1650년>

농사가 최고라고 세뇌했다. 나라에서 돈 벌 방법은 농사 밖에 없으니 농사지을 노동력이 필요하다조선 국방력을 약화시키면서 수 백 만 명의 노예가 있어야 한 이유다. 온 나라가 매달려 농사를 지어야 했으니까

무릇 교역을 하지 않는 나라는 안에서부터 썩는다. 고인 물이 썩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떻게 썩느냐가난해서 굶주려서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쌓여 썩는다. 조선 왕조처럼 말이다. 조선 시대 지배층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영국 만국 박람회에 전시된 그리스 여자 노예 조각상, John Absolon, 영국, 1851년>

중국 황하 문명을 제외한 모든 문명의 왕조 지배층에게는 맡은 바 업무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오직 지배층만 일을 하지 않았다조선 왕조는 왕부터가 왕이 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도 하지 않았다

왕조의 기본 역할은 외교(외교가 안 통하면 전쟁)와 교역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해 백성들을 먹이는 것이다. 물론 이타심이 넘쳐서 백성들을 먹인 게 아니다백성들을 어느 정도 먹고 살게 해야 왕조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글만 읽은 조선 시대 양반, 18세기>

조선 왕조는 전쟁도 하지 않고 교역도 하지 않았다. 지배층은 공자 왈 맹자 왈 글만 읽으며 평생 탱자 탱자 놀았다. 나라가 가난해지니 백성들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그래서 어떻게 했나

소중화주의로 세뇌 교육을 하며 두레와 향학, 오가작통법 등을 통해 강력한 독재를 했다. 조선의 모든 부를 소유한 채 무위도식하며 독재를 하는 인간들이 조선 인구의 10%에 달했다진정한 기생충들이다. 

록살라나, 미국 노예 제도, 위대한 세기, 이황 개고기, 이황 노비 장사, 이황 무술주, 이황 재산, 조선 노비 제도, 터키 노예 장사, 터키 노예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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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8세기 고양이 대학살과 개소주 이황

조선

조선 시대 양반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 굶주린 노비는 개고기를 먹었다. 인공위성 파편에 맞아 죽을 확률로 말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일부 한국인들이 왜곡하여 개고기 식용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복날, 가난한 농민, 개고기는 선한 전통이고 부자, 양반, 친일파, 독재자는 악이라는 단순 무식한 대립 구도로 몬 것이다

복날 개고기 식용을 통해 가난한 노비(노동자, 프롤레테리아)와 양반(부자, 부르주아)의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조선 시대 개를 때려잡아 개고기를 먹은 것은 개를 조상신으로 여긴 양반에 대한 증오의 표출이다

<웃는 사자 개는 청나라에서 행운의 상징, 청, 1662-1722년>

이는 개를 청 왕조의 상징으로 여겨 개를 때려잡아 먹는 고대 중국 식습관을 되살린 중국공산당과 같은 논리다. 또한 18세기 프랑스 방직공장에서 일어난 고양이 대학살과 동일한 형태의 증오범죄다

방직기계 발명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유럽에서는 자본가는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는 더 가난해지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각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고 고양이는 고양이인데 방직공장에서 착취당하며 뺑뺑이를 돌던 노동자들은 고양이를 자본가(방직 공장 주인)의 상징으로 보았다

<고양이 대학살, 문학과지성사>

어느 날 그들은 사모님이 물고 빨던 고양이를 때려죽였다. 그렇다면 프랑스 좌파는 사랑하는고양이가 죽어서 슬퍼한 부자(사모님)를 보고 고소해하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전통을 본받아 해마다 고양이 기일이 되면 고양이들을 때려죽이는 퍼포먼스를 벌일까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오직 한국 좌파만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은 가난한 조선의 노비를 기린다. 개고기를 먹음으로써 말이다. 프랑스 인들에게 18세기 방직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보다 약한 고양이를 죽여 복수를 한 비열한 인간들일 뿐이다. 


<개고기를 금지한 청 왕조와 달리 한국은 개고기를 지켜 정체성을 살렸다는 기사, 미디어오늘, 2004년 5월 27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복날 개고기를 먹어야 했던 가난한 농민들은 저주받은 음식인 개고기라도 먹고 살아남아야 했던 불쌍한 인간들이다. 불쌍한 우리 조상들을 핑계로 전통 운운하며 개고기를 먹는 인간들 역시 비열한 인간일 뿐이다.


1980년대 일부 운동권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개에 대한 증오심 역시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주사파로 분류되는 그들은 독재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개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더 열심히 개고기를 먹었다


<독재가가 금지하여 80년대 보신탕은 울었다는 기사(보신탕으로 도살되지 않아 개가 슬퍼했을까?), 한겨레21, 2002년 7월 16일>

개는 개고 독재자는 독재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은 기득권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보였다기득권, 부자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왔을까? 친일파? 아니,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친일파 이전의 조선 시대 양반이다

그런데 개고기를 부자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본 일부 한국 좌파는 기득권과 친일파, 부자에 대한 증오도 선택적으로 했다같은 기득권, 같은 양반인데 조선 시대 이황은 존경하면서 일제 시대 친일파는 증오한다.


<개고기 안 먹으면 변절하기 쉽단느 민주화 운동의 대부 백기완, 초이스경제, 2014년>

그러면서 복날이면 전통이랍시고 개고기를 열심히 먹는다. 조선 시대 복날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노비가 유일하고 노비들에게 개고기를 먹인 양반의 대표가 이황인데도 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고 표리부동한 것은 조선시대 양반 대표인 이황이나 개고기 전통론을 주장하는 한국 좌파나 똑같다. 개고기에 있어서는 말이다. "중국에 공자가 있다면 조선에는 이황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황은 추앙을 받는다


<조선 시대 세금을 내지 않은 도산서원,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공자와 이황은 개고기를 좋아한 것도 닮았다. 어느 날 이황은 신비한 효능을 가진 개고기 술이 등장하는 명나라 왕자가 쓴 책을 제목만 바꾸어 출판했다. 제목은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 신비한 개고기 술에 대한 효능의 원 출처가 '어느 신석기 인이 남긴 기록'신농본초라는 사실이다.

이황이 표지갈이만 해서 출판한 활인심방16세기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조선에서 개고기와 약재를 넣은 술도 유명해졌다. 이황은 개소주의 시초다지금도 도산서원에서는 이황을 기리는 의미에서 활인심방을 재연하는 행사를 한다


<한국 개소주의 시조인 이황, 조선닷컴,  2018년 8월 15일>

더 황당한 것은 이황의 후학들은 옛 방식 대로 개고기 술을 담그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그러면 이 후학들은 누구일까? 그들의 조상을 알아보자. 이황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류성룡과 김성일이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다


이 두 양반은 또 수도 없이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족보를 따져보면 안동 및 영남지역 유력가 자손들은 다 이황의 제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퇴계 이황을 조상으로 하는 퇴계 학파는 혼맥으로도 안동 및 영남지방을 꽉 잡았다그 유력가 자손들이 혼맥으로 또 다른 유력가와 연결된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백성들 고혈을 빤 안동 김 씨, 이황의 두 번 째 부인 집안인 안동 권 씨, 음식디미방을 만들어 양반가의 유일한 개고기 요리법을 전한 안동 장 씨 등등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양반들의 개고기 역사는 퇴계 이황으로 귀결된다


<조선 시대 양반가에서 남긴 유일한 개고기 조리법, 음식디미방, 1670년>

그 제자들과 후손들이 지금도 도산서원에서 모여 옛 모습 그대로 개소주 만드는 활인심방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자랑스러운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조선에 개소주를 남겨줘서?

개소주를 한국에 널리 퍼트린 것 외에 이황은 임진왜란으로 농지의 반이 날아간 상황에서 노비제도를 더 철저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간이기도 하다원래 노비 장사로 재산을 불리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의 선비문화수련원,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노비 장사로 돈을 벌면 땅을 사 더 부자가 되고 더 많은 노비를 사는 선순환구조로 이황은 치부를 했다. 이황의 무술주를 자랑스러워하며 복날이면 노비들이 먹던 개고기를 전통이랍시고 먹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노비들은 불쌍해삼복더위에 죽도록 일만 하고노비들이 복날 개고기를 먹었으니까 우리도 개고기 먹어야해전통이니까우리는 개소주를 만든 이황도 존경해. 성리학의 대가니까. ...야! 근데 그 이황이 노비장사로 돈 벌었잖아?!!”


<약 36만 평의 땅과 367명의 노비를 소유한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이거다. 조선 시대 가장 가난한 노동자이 먹던 음식이 개고기라며? 개고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 브루아와 프롤레테리아의 대립의 상징으로 찬양할 거면 이황도 같이 욕해야지. 왜 친일파, 기득권, 독재자만 욕을 하나

조선 시대 노비 제도를 찬양하고 강화한 이 황을 존경하며 개소주를 먹든지 복날 개고기 먹던 노비를 추모하며 노비들의 전통에 따라 해마다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는 소리다. 이황을 존경하면서 복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노비가 불쌍하다느니 하는 가식은 떨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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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조선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구역 별로 분리되어 살던 한양 모습, 1900년 1월 1일>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급제였다집안에 3대 째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에서 제외되었으니 남자 양반은 죽자 사자 글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개고기를 먹은 양반은 상가집에 갈 수 없었다, 1900년 1월 1일>

대신 양반가 아녀자들이 뒷구멍으로 알바를 구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럼 지지리도 가난했던 남산골샌님들은 복날 개고기를 먹었을까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양반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였다.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집안 제사는 물론 마을 제사, 산신제, 기우제 등등 모든 제사를 못 지냈다. 장례식에도 못 갔고 아기가 태어난 집에도 못 갔다양반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중 제사를 지내지 않은 양반은 오직 천주교 신자였다.


<개고기 술은 한반도에 남긴 퇴계 이황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양반을 제외하고 양반이 개고기를 먹은 기록은 퇴계 이황 정도로 한정된다도산서원이라는 조선 최고 권력 기관을 소유한 이황은 개고기 술인 무술주를 담가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 서원의 면세 혜택을 바탕으로 노비 장사를 해 떼돈을 번 퇴계 이황은 명나라 왕자 주권이 쓴 활인심방을 표지만 바꿔서 출판했다. 번역을 했다느니 필사를 했다느니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책 표지에 자기 이름만 써서 냈다. 


<명나라 왕주 주권이 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국에 개고기 술을 퍼트린 이 황이 노비 장사에 열을 올린 건 자기도 한양 권문세가처럼 부를 누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선 말기 한양 양반 라 불리는 가문이 소유한 부의 수준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양 양반는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본사 같은 개념이었다. 전국에 걸쳐 소유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장원에서 나오는 수확물이 한양 양반 저택으로 모였다. 조선 시대에는 쌀, 보리, , 심지어 명태까지 화폐 단위로 간주되었다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늘린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화폐(엽전)가 있었지만 실물 시장은 물물 교환으로 돌아갔다. 뭐든 수확물을 가진 사람이 부자였다. 부의 근원은 땅이었다. 조선 시대 거부를 묘사할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소유한 장원에는 주인 양반 의 성 씨를 딴 노비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어마어마한 농지에서 수확물을 생산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이 노예(노비)였다


<가슴을 드러낸 여자 노비 혹은 양민, 1900년 1월 1일>

성이 없는 가축과 같은 신분인 노비는 보통 주인인 양반 집 성을 따라 집성촌을 이뤄 외거 노비로 살았다양반 가 저택 안에서 살면서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주인이 집과 땅을 내줘서(빌려줘서) 저택 밖 노비 집성촌에서 살게 해주는 식이었다

집 안 노비인 내거 노비는 크게 여자 노비, 남자 노비로 나뉘었고 각각의 구역, 역할에 따라 노비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예를 들어 안잠자기라는 여자 노비가 있었다. 구들이 깔리지 않은 윗방에서 먹고 자며 주로 바닥청소만 하는 노비였다


<1593년 당시 젊은 여자 노비 한 명 가격이 목면 25필,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요즘으로 치면 로봇 청소기다. 그런 이유로 보통 안잠자기는 안채에만 두었다점잖은 가문에서 사랑채 청소는 안방마님이나 딸, 며느리가 직접 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별당도 그 댁 따님인 아가씨가 머무는 거처가 아니라 첩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별당을 만들 정도의 재력가라면 본처와 첩이 얼굴을 마주보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별당 수가 곧 첩실 수였다. 어느 댁 저택에 별당이 열 채라면 첩이 열 명이라는 소리였다. 각각의 별당에도 노비가 딸려 있었다.


<기생인지 첩입지 모를 여인이 살던 조선 시대 상류층의 방, 1900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한 개의 한양 양반 가문이 소유한 노비 수는 전국 적으로 수 천~수 만 명에 이렀다. 결국 조선은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였다. 이 노비들을 관리하는 상위 직급도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노비들 중 똑똑한 인간은 회계, 경영, 대외 활동(일종의 정치), 자치(내부 경찰) 등의 전문 분야에서 일했다. 수 천, 수만 명의 노비들을 전문직 노비가 관리한 것이다. 주인 대감이나 마님은 상급 노비들만 상대했다


<삼복 더위에 농사를 짓는 백성들과 개, 조선 김홍도 풍속도첩, 19~20세기 초>

, 그럼 이 많은 노비들이 모두 복날이면 개를 끌고 나가 잡아먹었을까? 아니. 일제 시대에 태어난 한양 권문세가의 후손 분 증언에 의하면 복날 개를 먹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 분은 아예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 분의 유모들 중 한 명은 몰락한 가문 출신의 양반이었는데, 개는 조상신이니 절대 먹으면 안 된다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귀신 쫓는 개로 믿은 삽살개, 1743년>

역시 일제 시대에 태어난 명망 있는 개성 양반가 후손 분의 증언도 비슷했다.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고 하셨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르신들 중에 오직 1960년대까지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는 분만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분은 복날 개고기를 먹는 것은 전통이라고 열변을 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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