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33. 영남학파는 복날 노비에게 개고기를 먹였나?

AnDant 2019. 10. 8. 13:05

청 왕조 시대 내내 개를 죽이고 먹는 것은 반역 행위였다. 청 왕조에서 개 죽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반청 행위를 하는 세력은 순수 한족 왕조의 부활을 꿈꿨다. 조선 시대 노비들을 시켜 개를 때려죽이게 한 양반들처럼 말이다. 

조선 시대 양반은 좀 정신이 비정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조선인인척 하는 중국인 혹은 중국 식민지 대리인이다. 그들은 고려까지 한민족의 모든 정통을 부정했다. 대신 조선은 작은 명나라라고 하며 조선을 중국으로 만들려 했다. 그 중에는 개고기 식용도 포함된다. 


<복날 개고기로 보는 한민족의 중국화>

고려시대까지는 복날에는 동지와 마찬가지로 팥죽을 끓여 먹었다. 팥은 우리 전통에서 귀신을 쫓는것으로 알려졌다. 이걸 조선 시대 꼴통 양반들은 개고기로 바꿔 버렸다. 왜? 고대 중국에서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었기 때문이다. 

병자호한 후에는 개고기를 먹는 것이 오랑캐인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운동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명 왕조 대에도 개고기는 여전히 고대인이나 먹던 음식으로 치부되어 강남의 거지나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명나라 황자 주권의 호인 구선을 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명나라 왕자 주권이 고대 중국 기록을 찾아내 무술주를 알리긴 했지만 사실 그는 딱히 개고기 술을 알리려 한 게 아니라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거저거 하다 보니 개고기 술이 나오는 고대 기록을 필사한 것 뿐이었다. 

황위 싸움에서 진 그는 사형을 당한 형들과 달리 연금만 당했다.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진심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연금 상태에서 중국 도교에 심취했다. 당, 송 대 이전 중국 고대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아 금단이니 한식산이니 하는 마약 성분을 먹었다고 했다. 


<북제교서도 중 한식산을 마시는 귀족들, 양자화, 북제, 6세기>

주권이 고대 중국 도교 서적을 파다보니 걸린 것 중 하나가 개고기 술이어서 책으로 냈는데 그걸 조선의 이 황이 훔쳐와 마치 자기가 개고기 술 비법을 깨우친 양 조선에 알린 것 뿐이다. 


명나라에서 개고기를 식량으로 먹었다든가 개고기 술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오직 조선에서만 도산 서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 기관을 장악한 퇴계 이황으로 인해 개고기 술과 개고기 약효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권의 책을 표절해 개고기 술을 조선에 퍼트린 이황>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 지배층은 이황과 마찬가지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간악하게 수탈하며 개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다. 개인적으로 복날 머슴이 개고기를 먹게 된 것도 이황의 퇴계 학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에서는 지금도 이황의 후손들이 개고기 술인 무술주 담그는 시연을 한다. 퇴계 학파와 관련 있는 안동 장 씨가 남긴 음식디미방은 조선 후기 양반이(천주교 제외) 개고기를 먹은 유일한 기록이다


<개고기 요리법이 담긴 『음식디미방』, 안동 장 씨, 조선, 1670년>

노비 거래로 재산을 불린 이황은 노비를 가축쯤으로 여겼다. 고려 시대까지 팥죽을 먹던 복날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이 날만은 노비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했지만 평소 개고기를 좋아한 이황답게 노비에게 개를 때려잡아 먹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주인인 나도 개고기를 먹는데 노비에게 못 먹일 이유가 없다. 특히 뭔가를 해 먹여야 하는 복날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개고기에 환장한 이후 북한 주민 전체가 개고기를 먹게 되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고려 시대까지 복날에는 액을 쫓는다는 의미로 팥죽을 먹었지만 조선 후기 중국화되면서 개고기 식용으로 왜곡되었다>

복날 노비가 개고기를 먹는 풍습은 영남(경상도) 퇴계 학파 양반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황을 추종하는 퇴계학파 가문에서 한양에 집을 샀다면 한양 집 노비들에게도 복날이면 개를 때려잡아 먹게 했을 것이고 호남 지방에 땅을 샀다면 거기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 주민에게 개고기를 먹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해서 양반가 노비들에게 전파된 복날 개고기 먹는 악습은 청 왕조에 대한 복수였다. 청 황제가 조선 양반들은 노비들을 시켜 개를 때려잡아 먹게 한답니다라는 소식을 듣고 부들부들할 걸 상상하며 흐뭇해했을 지도 모른다


<조선 지배층은 고대 중국과 명나라 외의 모든 왕조를 증오했다>

청 황제를 열 받게 하는 건 망한 명나라(명나라는 개를 안 먹었지만)에 대한 부흥운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백성 중 대부분은 개고기를 먹고 싶어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망하는 순간까지 개고기는 가장 비천한 신분인 노비만 먹도록 강력히 규제되었다


한편, 1910년 일제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조선 왕조는 사라지고 일본 황가에 편입되었다. 조선 왕족은 일본 황족이 되었다. 개고기 술을 좋아한 영남학파를 포함한 500년 기득권을 쥔 조선 양반들을 어찌 되었을까? 조선 왕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협력해 앞날을 보장받은 일부 양반들 외에는 쫄딱 망했다.


<1910년부터 일본 황족이 된 순종,고종,순종황후, 덕혜옹주, 1909년>

조선 양반들 입장에서 제일 열받는 건 신분이 철폐되었다는 것이다. 노비도 없어지고 양반도 없어졌다. 노비는 신나지만 양반은 열 받는 정책이었다. 두 번째 토지개혁으로 일제에 토지를 왕창 빼앗겼다

측량을 하니 토지대장을 만든다느니 하는 선진문물에 적응하지 못한 시골 양반들은 눈 뜨고 땅을 빼앗겼다조선 왕조 500년 내내 오직 땅에서 난 곡식으로만 산 양반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토지개혁? 99%의 백성들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 1918년>

조선의 땅은 대부분 왕가와 양반들 소유였기 때문에 토지개혁을 하든 토지 분양을 하든 가난한 백성들과는 전혀 상관 없었다. 병자호란 후 조선 말기까지 열 명 중 너 댓 명은 꾸준히 굶어죽을 정도로 굶주렸다. 백성들 입장에서 일제시대는 그다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특히 노비 입장에서는 노비문서가 없어진 것만으로 꿈이냐 생시냐 했을 것이다1910년 이후 조선에서 가장 불만이 많은 세력은 기득권을 잃은 양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뿌리까지 반청복명(청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복원하자) 파였다


<조선 시대 개고기는 가장 비천한 계급이 먹도록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헐버트, 『The passing of Korea』, 1907년>

특히 개고기 술 빗어먹던 영남학파는 더 분노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미워 죽겠는 일제가 개고기는 조선의 야만적인 악습이라며 욕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개고기 식용은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과고 연결되게 된다. 

여기에 1921년 중국 공산당이 건국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개고기를 둘러싼 피바람이 시작되었다. 조선 영남학파와 마찬가지로 개고기를 먹으며 청나라를 증오한 중국 공산단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개고기를 이용해 공산주의 혁명 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