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생소한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전쟁이 치열하다. 전방 후원분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3~6세기 일본과 한반도 남부에서 유행한 독특한 무덤 양식이다.
이 무덤이 4~5세기 일본에서 떼로 건설되면서 임나일본부 설의 근거가 되었다. 왜냐? 전라도 광주 등지에서도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 개 석상, 19세기, 일본>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째 크기나 숫자, 상태로 봤을 때 일본 무덤보다 못한 거 같았다. 이게 고대 한반도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중 하나이다. 흠, 과연 그럴까?
일본 역사교과사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역사학자가 유물을 미리 심어놓고 발굴했다고 뻥친 사건은 유명하다. 일본은 그 전방후원분을 거의 발굴하지 않는다. 추측은 난무하지만 이유는 대충 하나로 모아진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가짜 유물 사건, 2000년 11월>
유물이 한반도 고대 왕조와 너무 유사해서 차마 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기마유목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임나일본부설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누가 지배 했으면 뭐 어쩔건가?
지배 영토가 중요하다. 앞서 기마유목민의 정의를 설명하면서 언어와 인종을 제외한 모든 문화가 같다고 했다. 홍산문명은 아직 의견이 분분하니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밝혀진 우리 역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는 낙랑이 아닐까 싶다.
<왕의 상징인 개 황금 장식, 기원전4~3세기, 스키타이 혹은 흉노>
그러나 낙랑 역시 갈 길은 멀다. 우리 고대사 학계는 아직도 낙랑의 위치만 가지고도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냐, 중국 요서에 있었냐, 이걸로 싸우는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고대 중국 북부 역사를 낙랑이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물로 보면 중국 북부는 기마유목 왕조(흉노)가 지배했다. 만약 낙랑이 흉노와 관계있다면 흉노가 지배한 영역도 한국인의 조상 땅이 된다.
<요서와 늑도, 일본을 연결하는 1~2세기 고대 한반도 해상 추정 교역로 >
조상 땅 찾기로 제일 성공한(욕 먹는) 나라 이스라엘 못지 않은 조상 땅을 낙랑 요서설로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요서는 즉 만주다. 다시 만주 벌판 개장사 얘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낙랑 요서설이 맞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로 소장하고 있는 벨트 유물이 그 근거다. 우리나라 역사계는 국보인 이 금제 허리띠 고리를 두고도 연대 추정조차 못하고 있다.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가도 낙랑 혹은 삼한 이렇게 모호하게 되어 있다. 연대는 더 기가찬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란다. 600년의 차가 있다. 개나소나 다 하는 탄소연대측정이라도 해보지, 아예 연대를 밝히겠다는 의지가 없다.
일부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우리 국보인 금제 허리띠가 가짜라고까지 주장하는 형편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금제 허리띠 유물과 똑같은 신수문 금제 허리띠 유물이 중국 북부, 즉 요서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외국 학계에서는 친절하게 연대를 밝혀주었다. 1세~2세기 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세기에서 2세기 사이 낙랑의 지배층은 중국 요서 지방과 교류했다고 볼 수 있다.
<흉노 추정 신수문 금 허리띠 1~2세기, 북부 중국 >
고대에 금은 왕을 상징했다. 같은 금제 허리띠를 착용한 왕이 낙랑과 요서지방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낙랑은 요서지방에 위치했다. 여기에 강아지 유물과 유적을 더해보자.
1세기 한반도 경상남도 늑도에서는 개에게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고대 해상왕국 페키니아도 수많은 개 무덤을 만들었다. 늑도와 페키니아의 개 무덤은 중국 앙소문명권에서 발견된 개 뼈 무덤과 다르다.
<기원전 600~500년 페키니아의 개 무덤과 개 토우 발견 지역>
잡아먹고 발라낸 뼈를 쓰레기처럼 묻은 것이 아니라 죽은 개를 온전한 형태로 장례를 치러준 것이다. 늑도와 페키니아에서는 개를 숭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흉노는 개와 관련 많은 유물을 남겼다.
낙랑을 사이에 두고 흉노와 한반도, 일본이 해상 무역로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든 뭐든 간에 고대 한반도와 일본은 교류를 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4세기 후반부터다. 중국 역사서에 의하면 일본에는 말이 없었다.
<말 병풍, 토사 히로치카 작, 일본, 17세기>
원래 없었으니 쭉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4세기가 되면서 일본 고분에서 말과 관련된 부장품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민망스런 신라의 토우 인형 같은 토기 부장품들과 함께 말이다.
당연히 4세기 후반 기마 유목민이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을 정복했다고 보는 가설이 생긴다. 그 기마민족 정권이 야마토 정권이라고 한다면 5세기 이후 일본의 지배층은 기마 유목 왕조라는 말이 된다. 신라가 일본에 개를 배에 태워 보낸 이유다.
<일본 국보 1호 고류지 목조미륵보살상, 623년, 일본>
같은 기마 유목 왕조니 옥새와 같은 신성한 개를 선물한 것이다. 앞서 6세기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3호를 예로 들어 중국 선비족 왕조와 백제, 일본의 지배층이 교류했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류지는 신라인이 세웠으며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도 신라에서 왔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선비족 왕조, 백제, 신라, 일본 지배층이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6~7세기 중국 선비족 왕조인 북위와 백제, 일본, 신라의 반가사유상을 비교한 것이다.
<6~7세기 선비족, 백제, 일본 반가사유상 비교>
고도로 숙련된 이 불상 제조 기법은 이후로 명맥이 끊겼다. 지배층이 바뀌었거나 기술자들이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백제는 해상 무역로를 통해, 고구려는 만주를 기점으로 한 육로를 통해 중국 대륙(중앙아시아)과 교류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승려는 신라방이라는 해상 무역로(조직)를 통해 당나라 유학을 갔다. 세 나라가 협력 관계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쇼토쿠 태자는 44세가 되면 개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일본에 개고기를 수출했을 가능성?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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