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유목사

26. 왜 왕소군 아들은 흉노 왕이 되지 못했나?

AnDant 2018. 12. 29. 12:00

전쟁에서 져 죽을 뻔한 위기에서 흉노 왕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풀려난 한나라 유방은 막대한 조공과 함께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왕소군을 비롯한 한나라 공주들은 줄줄이 흉노 왕에게 시집가야 했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철천지 원수,  무제도 조카 딸을 흉노의 경쟁자인 오손 왕에게 시집보냈다. 줄줄이 시집을 간 한나라 공주들은 줄줄이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 많은 아기들 중에 흉노 왕이 된 왕자는 한 아이도 없었다.


<궁궐을 떠나는 왕소군을 묘사한 나전칠기 궁인도 병풍, 청, 17세기 >


대신 전한(기원전 206년~기원 후 8년) 말기 흉노는 한나라 공주가 낳은 왕자를 앞세워 한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 공주의 아들이니 정당한 후계자라는 것이다. 왜 흉노에서는 후계자라 나서지 못하고 한나라에서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을까? 


한나라는 부계 사회였다. 아버지가 왕이면 엄마가 궁녀여도 왕자는 왕이 될 수 있었다. 흉노는 모계 사회였다. 차기 왕은 반드시 왕비 가문의 여자가 낳은 왕자만 될 수 있었다. 한나라 공주들은 왕비가문이 아니었다. 

  

<인물 인형 토기, 신라, 5세기 이전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스키타이 이래 모든 유목 왕조는 인종과 시대를 제외하고 같은 문화를 가졌다고 했다. 텡그리(하늘, 단군)에게 받은 신성한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늑대의 피를 받은 신성한 혈통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왕이 정해지면 왕비가 될 부족도 정해졌다. 흉노의 경우 왕비는 좌부인과 우부인이 있었다. 서열 상 좌부인이 높고 우부인이 낮았지만 결과적으로 동등했다. 본부인과 첩의 관계가 아니었다. 두 왕비들은 동등하게 후계자를 낳을 자격이 있었다.  


<인형 모양 토기, 신라, 5세기 이전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만약 한 왕비가 죽으면 반드시 같은 가문 여자가 다음 왕비 자리를 이어 받았다. 왕비 가문 이외의 여자들이 낳은 왕자는 절대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왕소군이 낳은 아들은 애초에 후계권이 없었다.  



신라는 이 후계자 규칙을 너무 철저하게 지키는 바람에 순수 혈통이 끊겼다. 선덕여왕 이후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신라 성골은 사라지게 된다. 모계 계승이 끝난다는 것은 부계 계승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신라의 전통(기마 유목 문화)이 약해진 것이다. 


<신라 인물 모양 토우, 5세기 이전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의 경우 초기에는 세 가문이 돌아가며 왕이 되었다. 좌부인, 우부인 가문이 있어야 하니 왕비 가문은 아마 여섯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와서 한 가문이 왕을 독점하게 되면서 왕비 가문도 두 가문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 미실이 활약한 대원신통과 미실의 경쟁자인 진골전통이다. 진골전통은 골품제의 진골과는 다르다. 미실이 수장인 대원신통은 대대로 왕의 성 파트너가 되어 아이를 낳는 가문이다. 성 파트너라고 해서 창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당한 왕비 가문이다.  


<신라 인물 모양 토우, 5세기 이전 추정,국립중앙박물관>


진골전통 여자가 왕비이니 당연히 대원신통 여자는 후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원래 전통대로라면 왕비가 둘이어야 맞다. 중국식으로 관제를 정비하다 보니 왕비가 하나가 되었을 것이고 대원신통과 진골전통은 더 심하게 싸웠을 것이다.

 

진골전통이든 대원신통이든 동등하게 왕비 자격이 있었다. 두 왕비 가문 여자들은 왕의 사랑을 두고 다투며 후계자 전쟁을 했다. 혹은 장차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황족 남성들에게 접근해 어떻게든 임신을 하려했다. 


<기마 인물 인형 토기, 신라, 5세기 이전 추정,국립중앙박물관>


아들을 많이 낳을 수록 후계자 어머니가 될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 싸움이다. 그러니 『화랑세기』 속 미실이 미인계와 술수의 여왕이 될 수 밖에 없다. 왕 가문 남자들 역시 열심히 왕비 가문인 미실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친모와 동복 형제를 제외한 모든 여자와 성관계를 갖은 신라 황실이었지만 후계자를 낳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여자들은 대원신통 가문과 진골전통 가문 여인들 뿐이었다. 그러니 권력을 쥔 색공지신 가문 수장인 미실을 찾은 것이다.


<기마 인물 모양 토기, 국보,신라,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화풍(중국 풍습)으로 봤을 때 신라 황실은 짐승처럼 문란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흉노 관점에서 봤을 때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중국인은 늙은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다른 아들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을 동정하며 수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근친혼이 기마 유목민의 전통이니 달리 할 말은 없다. 유독 신라가 지나치게 성에 탐닉하게 보이고 근친혼이 심각해 보이는 이유는 인재 풀이 좁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집트 왕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근친혼은 필연적으로 유전병을 초래한다. 


<유전병에 시달린 이집트 네페르티티 왕비, 기원전 1353–1336>


신성한 혈통을 가진 아이는 단명하거나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초기 신라처럼 세 가문이 돌아가며 왕을 하는 체제로 갔다면 혈통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한 집안이 몇 백 년에 걸쳐 순수 혈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수록 순수 혈통 수는 줄었을 테고 갈수록 조바심이 나 더욱더 가열차게 연애질을 해댔을 것이다. 텡그리 표 근친혼의 악순환이다. 그러나 단군과 하늘 사상을 믿는 한민족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신성성을 가져와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개고기를 먹었을까? 


<신라 인물 모양 토우, 5세기 이전 추정,국립중앙박물관>


고려를 건국한 왕건도 텡그리표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려 왕 가문은 왕씨 가문이었다. 그런데 왕비 가문이 좀 많았다. 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호족 세력을 조절하기 위해 많은 왕비를 두어야 했다. 


그래도 신성한 피를 지켜야 하니 근친혼을 했다. 고려 왕가의 근친혼은 몽골이 고려를 지배한 후에 사라진다. 고려 황족은 몽골 황족과 결혼을 해야 했다. 평민인 기 씨가 원나라 황후가 된 것으로 보아 고려 자체가 왕비 가문이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