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개고기 불간섭 선언 이후 한겨레, 오마이뉴스, 중앙일보, MBC 등 온 언론이 하나가 되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조상이 농경민이라면 신라 토우 인형에게는 고대 애니미즘적 의미밖에 부여할 수 없다.
다복을 기원하는 고대 토속 신앙의 상징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신라가 유목 왕조였다면 실제 신라의 성 문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성 행위는 신성한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유목민의 성 도덕은 농경민과 달랐다.
<지난 천 년 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힌 칭기즈칸>
유목민은 일상이 전쟁이었다. 약탈혼도 흔했다. 태어난 아이를 두고 “이 애가 내 애 맞아?”라고 따지는 건 불가능했다. 칭기즈칸 큰 아들 이름은 주치다. 손님이라는 뜻이다. 칭기즈칸 부인이 납치당한 기간에 생긴 아이였다.
조선 시대처럼 정절을 잃었다고 여자를 죽이고 열녀문을 세워댔다가는 가문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그 귀한 늑대 피를 이어받은 초원의 왕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따지기 전에 누가 이 애를 낳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수렵도 속 고구려 기마 무사와 개>
왕 부족이 있으면 반드시 왕비 부족이 있는 이유다. 농경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겠지만 신라는 유목 왕조였다.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지배층은 유목 민족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가 들어서기 전 그 땅에 살았던 원주민은 반농반유목민이거나 농경민이었을 것이다. 신석기 한반도 유적에서 개 뼈와 돼지 뼈가 발견된것으로 보아 만 년 전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 한족처럼 개를 키워 잡아먹을 수 있다.
<경기도 출토 돌도끼, 신석기 시대,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청동기와 철기 시대가 되면서 북방에서 쓸고 내려온 사람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중앙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이었다. 스키타이 이래 모든 기마 유목 국가에서 지배층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며 노예 계층은 농사를 지었다.
돌로 된 농기구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 눈에는 청동기 무기를 지닌 기마 무사가 전쟁의 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신석기 농경민은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청동 도끼. 흉노, 기원전 13~10세기>
흉노, 고구려에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노예층이었다. 지배층은 말타는 무사였다. 말과 개는 세트다. 권력을 동원해야 지을 수 있는 고구려 고분에는 기마 무사와 함께 하는 개가 그려져 있다.
그 개가 저승가서 먹을 개고기라는 헛소리가 마치 정설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한나라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군대 이름은 ‘다물’이다. 옛 땅인 고조선을 찾는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원수인 한무제 눈에는 고구려 무덤 속 개가 도시락처럼 보였겠지만 고구려 고분 주인은 기마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반려견이 저승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자라고 여겼다.
기원전 1세기 경상남도 늑도에서 인간과 나란히 묻힌 개 무덤이 발견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늑도는 고대 무역항이었다. 유목민은 육로든 해로든 무역을 한다.
<늑도에서 발견된 개 무덤 속 개 뼈, 한국일보 2016.07.27>
중앙아시아 초원에서는 말을 타고 해상에서는 배를 탄다.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던 이유다. 청동기 시대 이후 지배층이 바뀌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개숭(배하는)파였다.
늑대의 피를 받고 신성한 개를 키우는 새 지배자 앞에서 전처럼 개를 잡아먹을 수 있을까? 앞서 신라 왕실은 성골 시대까지 모계 사회였다가 성골 시대가 끝나면서 부계 사회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신라의 유목 전통이 사라지고 중국화가 시작된 것이다.
<개고기를 식량과 약으로 먹은 한나라 무제>
신라 왕조는 거의 천 년 동안 유지되었다. 고려까지 따지면 거의 천 오백년 세월 동안 지배층인 유목 왕조가 지킨 전통을 따랐다. 기마 유목민에게 개는 반려견일 뿐 아니라 죽음을 안내하는 영물이다.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개고기 금기는 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천 년 세월이다. 로마 기독교를 제외하고 서양문화를 할 수 없듯이 알타이 샤먼을 제외하고 한국문화를 논할 수 없다. 적어도 신라 천 년 동안 개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 존재한 개고기 금지법>
역사적 사실이 이런데도 우리 학계와 언론은 마치 뇌수술을 당한 사람처럼 신라에서 개고기를 먹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신라가 일본과 당에 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근거다.
개는 먹는 것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개를 배에 태워 보낸 건 신선한 개고기를 배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단지 개가 배를 탔기 때문에 배의 종착지에서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논리다. 하도 어이가 없어 신라, 당, 일본, 대표를 모아놓고 삼자 대면을 해야 할 판이다.
'한국 속 유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 한 큐에 신선이 될 수 있던 한국 도교 (0) | 2019.03.02 |
---|---|
28. 개 전용 사원이 있던 당나라 (0) | 2019.01.03 |
26. 왜 왕소군 아들은 흉노 왕이 되지 못했나? (0) | 2018.12.29 |
25. 선덕여왕과 미실은 개고기를 먹었을까? (0) | 2018.12.27 |
24. [요약] 개숭파에서 개먹파로 한국인 뇌 수술 (0) | 2018.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