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AnDant 2019. 8. 15. 12:07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구역 별로 분리되어 살던 한양 모습, 1900년 1월 1일>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급제였다집안에 3대 째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에서 제외되었으니 남자 양반은 죽자 사자 글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개고기를 먹은 양반은 상가집에 갈 수 없었다, 1900년 1월 1일>

대신 양반가 아녀자들이 뒷구멍으로 알바를 구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럼 지지리도 가난했던 남산골샌님들은 복날 개고기를 먹었을까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양반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였다.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집안 제사는 물론 마을 제사, 산신제, 기우제 등등 모든 제사를 못 지냈다. 장례식에도 못 갔고 아기가 태어난 집에도 못 갔다양반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중 제사를 지내지 않은 양반은 오직 천주교 신자였다.


<개고기 술은 한반도에 남긴 퇴계 이황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양반을 제외하고 양반이 개고기를 먹은 기록은 퇴계 이황 정도로 한정된다도산서원이라는 조선 최고 권력 기관을 소유한 이황은 개고기 술인 무술주를 담가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 서원의 면세 혜택을 바탕으로 노비 장사를 해 떼돈을 번 퇴계 이황은 명나라 왕자 주권이 쓴 활인심방을 표지만 바꿔서 출판했다. 번역을 했다느니 필사를 했다느니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책 표지에 자기 이름만 써서 냈다. 


<명나라 왕주 주권이 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국에 개고기 술을 퍼트린 이 황이 노비 장사에 열을 올린 건 자기도 한양 권문세가처럼 부를 누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선 말기 한양 양반 라 불리는 가문이 소유한 부의 수준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양 양반는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본사 같은 개념이었다. 전국에 걸쳐 소유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장원에서 나오는 수확물이 한양 양반 저택으로 모였다. 조선 시대에는 쌀, 보리, , 심지어 명태까지 화폐 단위로 간주되었다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늘린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화폐(엽전)가 있었지만 실물 시장은 물물 교환으로 돌아갔다. 뭐든 수확물을 가진 사람이 부자였다. 부의 근원은 땅이었다. 조선 시대 거부를 묘사할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소유한 장원에는 주인 양반 의 성 씨를 딴 노비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어마어마한 농지에서 수확물을 생산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이 노예(노비)였다


<가슴을 드러낸 여자 노비 혹은 양민, 1900년 1월 1일>

성이 없는 가축과 같은 신분인 노비는 보통 주인인 양반 집 성을 따라 집성촌을 이뤄 외거 노비로 살았다양반 가 저택 안에서 살면서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주인이 집과 땅을 내줘서(빌려줘서) 저택 밖 노비 집성촌에서 살게 해주는 식이었다

집 안 노비인 내거 노비는 크게 여자 노비, 남자 노비로 나뉘었고 각각의 구역, 역할에 따라 노비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예를 들어 안잠자기라는 여자 노비가 있었다. 구들이 깔리지 않은 윗방에서 먹고 자며 주로 바닥청소만 하는 노비였다


<1593년 당시 젊은 여자 노비 한 명 가격이 목면 25필,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요즘으로 치면 로봇 청소기다. 그런 이유로 보통 안잠자기는 안채에만 두었다점잖은 가문에서 사랑채 청소는 안방마님이나 딸, 며느리가 직접 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별당도 그 댁 따님인 아가씨가 머무는 거처가 아니라 첩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별당을 만들 정도의 재력가라면 본처와 첩이 얼굴을 마주보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별당 수가 곧 첩실 수였다. 어느 댁 저택에 별당이 열 채라면 첩이 열 명이라는 소리였다. 각각의 별당에도 노비가 딸려 있었다.


<기생인지 첩입지 모를 여인이 살던 조선 시대 상류층의 방, 1900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한 개의 한양 양반 가문이 소유한 노비 수는 전국 적으로 수 천~수 만 명에 이렀다. 결국 조선은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였다. 이 노비들을 관리하는 상위 직급도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노비들 중 똑똑한 인간은 회계, 경영, 대외 활동(일종의 정치), 자치(내부 경찰) 등의 전문 분야에서 일했다. 수 천, 수만 명의 노비들을 전문직 노비가 관리한 것이다. 주인 대감이나 마님은 상급 노비들만 상대했다


<삼복 더위에 농사를 짓는 백성들과 개, 조선 김홍도 풍속도첩, 19~20세기 초>

, 그럼 이 많은 노비들이 모두 복날이면 개를 끌고 나가 잡아먹었을까? 아니. 일제 시대에 태어난 한양 권문세가의 후손 분 증언에 의하면 복날 개를 먹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 분은 아예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 분의 유모들 중 한 명은 몰락한 가문 출신의 양반이었는데, 개는 조상신이니 절대 먹으면 안 된다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귀신 쫓는 개로 믿은 삽살개, 1743년>

역시 일제 시대에 태어난 명망 있는 개성 양반가 후손 분의 증언도 비슷했다.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고 하셨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르신들 중에 오직 1960년대까지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는 분만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분은 복날 개고기를 먹는 것은 전통이라고 열변을 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