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명문가가 소유한 평창동 고택에는 사람 손으로 판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 아니라 진짜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아주 큰 호수였다고 했다. 그럼 혹시 일제 식 신식 건물이었냐고 물었더니 99간 전통 한옥이었다고 했다.
조선 시대부터 그 댁에서는 대대로 호수에 배를 띄우고 탁 트인 평창동 전망을 즐겼던 것이다. 말 그대로 신선놀음이다. 또 다른 명문가에서는 일제시대에 북해도에서 유제품만 공수해 오던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권문세가 저택에는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인공 호수가 있었다>
북해도까지 배로 드나들던 그 직원의 유일한 업무는 우유와 치즈를 떨어뜨리지 않고 사 오는 일이었다. 대략 통학 열차에서 일본 학생과 한국 학생이 개고기를 두고 싸움을 하다 전국 동맹학생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일반 백성들은 꽁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이었다.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아마도 외거 노비나 머슴일 가능성이 높은)백성들이 숨어서 개고기를 먹고 있을 때 조선인 친일파가 누린 호사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 시대 신분이 낮은 어린이의 노동, 1900년>
무려 500년 동안 자국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가축 취급한 조선은 10%의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려 백성이던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노예로 만들다 못해 자자손손 미래의 자손들까지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양인들도 노예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노예는 죄인, 전쟁 노예, 인신매매를 통해 충당한다. 노예 제도는 비인간적이다.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낀다.
<조선 시대 양반 어린이가 개와 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죄책감을 선민의식으로 극복했다. 종교적 우월감, 인종론적 우월감, 전쟁 승리의 우월감, 도덕적 우월감 등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은 이 중 어떤 우월감도 가질 수 없었다. 조선 노비와 양반은 같은 고려 백성이었다.
조선 양반이 성리학적 세계관이라는 학문적 우월감을 창조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조선 신분제도(노예제도)의 기반은 예를 배워 중국인이 된 양반은 오랑캐 상태인 나머지 조선인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학문적 우월감에 있었다.
<조선 신분제의 정점에 위치한 순종, 고종, 순종황후, 덕혜옹주, 1909년>
조선인인 백성들과 달리 지배충인 양반은 중국인이었다. 조선 양반들의 관념에 의하면 조선은 중국 식민지였다. 백성들을 노예 상태로 만들어 수탈한 결과 떼로 굶어 죽으니 억지로 개고기를 먹도록 강요한 것이 조선 시대 개고기 식용의 현실이었다.
조선 후기 들어 경제는 망했는데(농지 절반 이상이 사라졌으니) 세금은 폭등했다. 각종 세금 명목으로 수탈을 당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대략 세 가지였다. 순응하고 늙은 아버지와 한 살짜리 아들 군역(세금)까지 내고 파산하든지, 스스로 거세를 해 미래의 아들이 낼 세금을 절약하든지 산으로 도망쳐 유랑민이 되든지.
<소와 비슷한 취급을 받은 조선 시대 노비, 김홍도 풍속도첩, 19~20세기>
이중 가장 많이 한 선택이 야반도주였다. 하도 도망을 치니 마을이 텅 비었고 그걸 막으려 만든 것이 두레와 향학이었다. 마을 별, 농사 별, 가구 별로 묶어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공동체라고 하니 백성들이 으쌰으쌰, 탱자탱자 좋아했을 거 같나? 실상은 마을을 쪼개서 관리 감시하는 체제였다. ‘농가월령가’니 하는 조선 후기 노래에 개고기가 나온다고 “역시 개고기는 우리 전통이여!”라는 사람들은 그 노래가 생긴 시대 상황이나 알아보기 바란다.
<백성들을 수탈하며 글공부만 한 조선 시대 양반들, 18세기>
양반들은 보다 안전하게 수탈하기 위해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철통 관리하며 저주받은 음식인 개고기나 먹도록 강요했다. 죽지 못해 개고기를 먹던, 비참한 상황을 자조적으로 노래한 조선 백성들의 삶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사이코패스다.
조선 말기가 되면 감시는 더 심해져서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서 연좌제를 실시했다. 한 사람이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가구 전체를 처형하는 오가작통법이다.
<북한은 유사종교를 모시는 유교사회라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조선의 전통을 소중히 여겨 개고기를 전통음식으로 먹는 북한은 지금도 오가작통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 악랄하게 조선 백성을 감시하고 수탈하던 조선 시대 양반들 대부분은 일제시대에도 그대로 부과 권력을 유지했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일부 양반들을 제외한 나머지 양반들은 친일파가 되어 일본 제국에 순응했다. 이들이 친일파였다. 한민족으로서 100년 전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를 비판할 수는 있다.
<조선 경성 조선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친일 무용가 최승희, 1940년>
그러나 이미 100년이나 지난 일을 두고 너무 과도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개고기 역사로 본다면 우리가 배운 친일파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의 근원은 결국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일 수 있다. 친일파의 반대는 독립운동이다. 조선 왕조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일단 조선 왕조로 돌아간 다음에 일본, 중국, 소련, 미국식 체제 중 어느 것을 따라 국가 시스템을 정하자는 것이 독립운동의 골자였다. 누가 조선 왕조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적어도 복날 개고기 먹은 노비는 아니다. 노비들에게 일제는 500년 숙원인 노비 문서를 없애준 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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