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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초원길, 비단길, 아편길과 삼합회(4)

중국 속 유목사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는 싼 값의 노동력을 제공해 물건을 생산하고 또 그 물건을 소비해야 했다. 즉, 공장과 소비 시장이 되어야 했다. 식민지 생산품 중 홍차와 같이 비싼 물건은 유럽 등지로 가져와 비싼 값에 팔았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진 영국 왕 미치광이 조지 3세>

요즘으로 치면 OEM(위탁 생산 시스템)이었다. 미국은 홍차 관세로 영국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중국 직수입이 아니라 일단 영국에 한 번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왔으니 미국 홍차 값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 아편굴, 1896년>

홍차 값에 발끈해 영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달리 청나라는 영국의 아편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졌다. 아편을 사려고 낸 돈(은)은 영국으로 흘러들어갔고 영국은 부자가 되었다. 


<몰수한 영국 동인도 회사 아편을 처리하는 청나라 관리, 1839년>

대신 청나라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 상선에서 아편을 몰수해 태워 버렸다. 청나라 조정에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성적으로 국제 정세를 판단할 인재가 없었다.

<상하이에 정박한 영국의 아편운반선, 1908년>

아직도 잘 나가던 건륭제 시절인 줄  착각하고 영국을 얕잡아 본 것이다. 신나게 아편장사를 하던 영국 놈들은 아편을 빼앗기자 영국 군함을 불러왔다.


이게 아편전쟁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중국은 영국을 상대로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중국과 유럽을 연결한 무역로를 장악한 민족이 사실 상 지배했다. 

그게 흉노, 선비, 돌궐, 위그르, 거란, 여진, 몽골, 청이었다. 초원길, 비단길에 이어 아편길이 뚫렸으니 영국이 중국을 지배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제 2차 아편전쟁에서 도망치는 청나라 군대, 1860년 >

그런데 아편전쟁에서 이긴 영국은 의외로 홍콩(마카오는 덤으로) 하나 받고 청나라 황실 개는 납치하는 데 만족하고 중국에서 물러났다. 영국은 프랑스와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중일전쟁 당시 청나라 총리와 관리들, 1894년>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인도 차이나 반도 등에서 누가 더 많이 식민지 땅을 먹느냐로 영국과 프랑스는 사사건건 싸웠다. 대신 중국을 침략한 건 일본이었다. 

이런 걸 전문용어로 어부리지라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최신식 군함을 건조해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을까? 

<중일전쟁 당시 일본 군함, 1894년>

미국이 돈을 빌려주고 영국이 군함 제조 기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청나라와 아편전쟁 때 싸운 영국제 군함이 일본에 수출돼 청나라와 다시 싸운 것이다. 진 놈과 또 싸우니 청나라가 질 수 밖에. 


청일 전쟁 때는 확실치 않지만 러일 전쟁 때는 영국 군함을 수입하는 돈을 미국이 빌려줬다. 일본은 어부리지에 손짚고 어린이 풀장에서 헤엄치기로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을 식민지배 한 것이다.  


<19세기 삼합회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장>

영국 동인도 회사 놈들에게 아편을 떼온 청나라 아편 도, 소매상이 신나게 아편을 팔아먹고 있을 때 국제 사회 이면에서는 이렇게 쿵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 누가 청나라에 아편을 유통시켰을까? 

아편을 중국 전역에 퍼트릴 만한 조직력을 가진 이들은 누굴까? 공교롭게도 이 시기부터 삼합회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청 왕조의 탄압으로 지리멸렬 지하에 숨은 삼합회는 19세기를 기점으로 확 일어났다.

<프랑스의 청나라 식 아편굴, 1904년>

 막대한 조직, 재산은 갑자기 어디에서 생겼을까? 참고로 지금도 삼합회의 주요 사업은 마약 판매다. 삼합회든 누구든 청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해 아편을 뿌린 거라면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약 400만 명의 청나라 사람들이 아편중독이 되었다. 그런데 청나라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중국의 아편굴이 유행했다.  

<아편을 하는 홍콩 여인, 1915년>

더 이상한 건 어떻게 1874년에 청나라 사람이 영국 런던까지 가서 아편굴을 운영할 수 있었는냐는 거다. 영국 사람과 손을 잡은 청나라 인이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아편 장사를 허용한 영국 측 배후는 누구고 중국 측 배후는 누구일까? 100년 간 영국에 조차된 홍콩에서 삼합회와 마약이 기승을 부린 근원도 따지고 보면 결국 청나라 마약상과 영국의 협력관계에 있지 않을까? 

62. 영국 무적 함대가 마약을 판 이유 (3)

유럽사

18~19세기 영국 상류층 남성은 조선 시대 선비라면 절대 하지 않을 쪼잔한 짓을 했다. 시시콜콜 집에 소금이 몇 그램 남았는지, 향신료가 얼마나 있는지, 홍차 잎이 얼마나 있는지 챙긴 것이다. 

<홍차를 보관하던 tea chest(홍차 상자), 영국, 1780년>

그만큼 유럽에서 홍차와 향신료, 소금이 비쌌다. 후추의 경우 비쌀 때는 후추 한 알갱이가 소 한 마리 값과 같았다고 한다. 고기가 주식인 유럽에서 소금과 후추를 스테이크에 얼마나 치는냐가 그 집의 재산 정도를 보여줬다. 

<찻잔을 든 남자 tea chest(홍차 상자), 런던, 1836년>

당연히 향신료 통에는 자물쇠를 달아 집주인이 관리했다. 이 그림을 보면 홍차를 마시는 귀족 남자 뒤로 티 체스트가 보인다. 티 체스트는 금고처럼 열쇠가 달린 홍차 상자다. 

샌드위치를 가져오는 하녀 발치에는 강아지 밥 그릇이 보인다. 도자기 접시 위에는 스테이크로 보이는 음식이 있다. 아마 이 남자는 사랑하는 반려견들에게 소금과 후추를 듬뿍 친 스테이크를 먹였을 것이다. (개에게 소금과 후추는 독이다) 

<차 마시는 남자와 테이블 밑의 개, 영국, 1795년>


이 그림을 보면 젠틀맨 계층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물을 훔치는 딸을 끌고 쳐들어와 홍차를 마시는 귀족 남자에게 따지고 있다. 귀족 남자의 티 테이블에는 티 체스트가 떡 하니 올라와 있다. 뭘 따지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다. 


<홍차를 보관하던 tea chest(홍차 상자) 세트, 영국, 1780년 

우리는 계속해서 왜 이 멀쩡한 귀족들이 홍차 상자에 집착을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홍차 상자는 지금으로 치면 시계 자랑, 차 자랑과 같았다. 돈 자랑의 단골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금칠이나 에나멜 칠까지는 하지 않아도 일단 집에 티 체스트가 있단 소리는 돈 좀 있단 소리다. 토양이 석회질이라 차나무가 없는 유럽과 영국에서 중국 못지 않게 홍차를 마셔대니 홍차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홍차 상자 위에 앉은 청나라 남자 뒤로 아편선, 영국, 19세기>

돈이 되니 온갖 협잡꾼들이 몰렸다. 홍차는 곧 황금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차 수입업자가 낸 광고를 보자. 청나라 남자가 차 상자 위에 유혹하듯 앉아있다. 그 뒤로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선이 유유히 떠 있다. 

<마카오 근처 섬에 정박한 영국 마약 운반선, 1824년>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홍차를 얻기 위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죽을래? 홍차 주고 아편 먹을래?"라고 협박해서 아편을 먹이고 아편에 헤롱대는 청나라의 홍차를 훔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는 동인도회사 함선, 1841년>

아편 전쟁을 비웃은 프랑스 신문을 보면 겁에 질린 뚱뚱한 청나라 관리가 영국 군인에게 티 체스트(홍차 상자)를 넘기고 있다. 청나라 군인 시체 뒤로는 영국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다. 그 와중에 영국 군인은 개까지 데려왔다. 


<아편전쟁 상황을 그린 신문, 프랑스, 1839~1942년>


영국은 청나라에만 아편을 먹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이집트, 터키, 버마, 인도,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반도 등 영국의 침략을 받은 지역에서는 아편도 같이 퍼졌다. 영국의 아편 공급지는 인도였다. 


1858년 인도가 영국 땅이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마약 생산지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애초에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이유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남 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 병사와 마스티프, 1560년>

유럽인이 샤프란과 후추 같은 향신료가 지천에 널렸다고 믿은 환상의 땅 인도에는 아편마저 흔했다. 이 무굴 여인은 아편을 섞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술잔을 누군가에게 권하고 있다. 인도의 무굴 제국 지배층이 아편을 즐겨한 것이다.

<술잔을든 무굴 여인, 18세기>

영국은 인도의 아편을 식민 지배에 이용했다. 인도의 값싼 마약과 영국의 상권(식민지), 유통망(마약 운반선)이라는 삼박자가 딱딱 맞아 영국 식민지를 아편굴로 만들 수 있었다.   

<인도의 아편공장에서 아편을 개량하는 영국인, 1908년>

사실 영국군 뿐 아니라 미군, 일본군, 만주군도 아편 재배에 열을 올렸다. 미국에서 1950년대까지 살충제인 DDT를 만능치료제라고 믿은 것처럼 아편중독의 무서움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이집트 아슈트의 아편상인, Willam James Muller작, 1839년>

과연 그럴까? 영국 본토에서 아편을 죽음의 약으로 묘사하며 비판한 걸 보면 적어도 영국군은(만주군을 제외한 미군과 일본군도) 아편 중독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약(아편)을 파는 약방, 영국, 1814년>

알았든 몰랐든 결과적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와 함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약중독자들만 남았고 영국은 후루룩 짭짭, 손쉽게 식민 지배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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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홍차 한 잔이 불러온 청나라 아편 전쟁(2)

중국 속 유목사

황실 개를 옥새처럼 사랑한 청나라는 아편으로 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향긋한 홍차 한잔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그 개호로로 잡*들이 홍차 대신 아편을 줬기 때문이다. 

<A cup of tea, Mary Cassatt작, 1880~1년, 미국>

그러고 보면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서 죽자 사자 독립한 것도 영국이 차에 관세를 너무 비싸게 부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차는 17~8세기 이후 영국 사회에서 중요했다. 


<사냥 후 쉬는 남자와 개들, 1781~1850년,  William Westall>

이 그림을 보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영국남자가 총을 옆에 세워두고 졸고 있다. 남자 곁에서는 하녀가 홍차를 준비하고 있다. 은 산업화에 성공한 후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주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국 식민지 무역의 정수를 보여주는 1787년의 일러스트 >

18~19세기 영국 식민지 무역의 정수를 좀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을 보자. 흑인 하인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으로 헐값에 사왔을 것이다. 

최신 스타일로 꾸민 여자의 옷은 인도산 모슬린이다. 그리고 여자가 마시는 차는 아마도 당시 가장 인기있던 중국 산 홍차였을 것이다.

<영국식 아침식사, 1785, Gerard Vidal작, 프랑스>

아프리카 흑인 노예, 인도산 모슬린, 홍차는 영국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다. 이 중 중국산 홍차가 질량과 견적 대비 가격 면에서 제일 비쌌다. 


18세기~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한 듯한 영국식 아침 식사에는 반드시 홍차가 포함되었다. 

<이른 아침의 방문객, 1778 년, 런던>

영국 런던에 살던 상류층 가정을 방문한 손님에게 대접할 홍차를 내오는 하녀가 그려진 그림이다. 영국인은 적어도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애프터눈 티)은 반드시 홍차를 마셨다. 

온 영국인들이 매일 금붕어처럼 마셔대던 그 많은 홍차는 어디에서 왔을까? 식민지에서 왔다. 지금도 세계 3대 홍차로 다즐링과 우바, 기문 홍차를 꼽는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런던 상류층을 풍자한 그림, 1804년 > 

 

다즐링은 인도에서 우바는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데 둘 다 영국 식민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는 무단으로 차 농사를 지으면 사형을 시킬 정도로 엄하게 차 생산을 통제했다. 

<원숭이가 찻잎을 따게 해서 만든 영국 식민지 산 홍차, Rudolph Ackermann 작품, 1821년>

오직 중국 홍차만 공정 무역을 해야 했다. 즉, 식민지 경제 원리가 아닌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야 했다. 기문 홍차만 식민지가 아닌 지역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찻집에서 차를 판매하는 모습, 청, 1801~1850년>

지금도 중국 안휘성 휘주에서 생산되는 최상품 기문 홍차는 소량의 주문 생산만 하거나 판매하는 시기에 맞춰 현지에 직접 가야만 살 수 있다.


휘주의 기문 홍차 상인에 의하면 그 옛날 영국 상인들이 차를 사갈 때도 휘주산 기문 홍차만은 직접 품에 품고 가져갔다고 한다. 

<중국 상인 모양 Tea caddy (차 보관 통)도자기, 영국, 1745-50년

가장 인기 있고 값비싼 중국 홍차의 생산과 가격 통제가 불가능하자 영국은 당황했다. 비싸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라 막대한 은(당시 돈)을 청나라에  줘야 했다.  

<영국이 찻값으로 청나라에 지불했을 은괴, 청, 1828년>

제국주의 시대 영국 식민지 무역은 곧 시장 독점권을 가진 동인도 회사의 실적을 의미했다. 왜 동인도 회사냐면 배를 대기 쉽도록 인도 동부 해안가 항구에 세운 회사였기 때문이다.

<인도 캘터타 항구를 출발한 아편 운반 용 쾌속선, 1856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세운 목적은 간단하다. 사실 상 영국 정부, 대 상인, 군대의 합작품인 얘들은 인도 동인도 항을 기점으로 버마, 차이나 반도, 중국까지 다 식민지로 만들 심산이었다. 

<인도의 아편 공장, 1900년>

그 기세 등등하던 대영제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 홍차 하나로 삐끗한 것이다. 그래서 한 짓이 쌩 양아치 짓인 아편 장사였다. 그러면 청나라에 판 그 많은 아편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도에서 왔다. 아예 인도에 아편 공장을 세운 영국 동인도 회사는 쾌속선을 타고 중국 남부와 동부 해안으로 신나게 아편을 퍼다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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