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62. 영국 무적 함대가 마약을 판 이유 (3)

AnDant 2019. 4. 6. 12:00

18~19세기 영국 상류층 남성은 조선 시대 선비라면 절대 하지 않을 쪼잔한 짓을 했다. 시시콜콜 집에 소금이 몇 그램 남았는지, 향신료가 얼마나 있는지, 홍차 잎이 얼마나 있는지 챙긴 것이다. 

<홍차를 보관하던 tea chest(홍차 상자), 영국, 1780년>

그만큼 유럽에서 홍차와 향신료, 소금이 비쌌다. 후추의 경우 비쌀 때는 후추 한 알갱이가 소 한 마리 값과 같았다고 한다. 고기가 주식인 유럽에서 소금과 후추를 스테이크에 얼마나 치는냐가 그 집의 재산 정도를 보여줬다. 

<찻잔을 든 남자 tea chest(홍차 상자), 런던, 1836년>

당연히 향신료 통에는 자물쇠를 달아 집주인이 관리했다. 이 그림을 보면 홍차를 마시는 귀족 남자 뒤로 티 체스트가 보인다. 티 체스트는 금고처럼 열쇠가 달린 홍차 상자다. 

샌드위치를 가져오는 하녀 발치에는 강아지 밥 그릇이 보인다. 도자기 접시 위에는 스테이크로 보이는 음식이 있다. 아마 이 남자는 사랑하는 반려견들에게 소금과 후추를 듬뿍 친 스테이크를 먹였을 것이다. (개에게 소금과 후추는 독이다) 

<차 마시는 남자와 테이블 밑의 개, 영국, 1795년>


이 그림을 보면 젠틀맨 계층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물을 훔치는 딸을 끌고 쳐들어와 홍차를 마시는 귀족 남자에게 따지고 있다. 귀족 남자의 티 테이블에는 티 체스트가 떡 하니 올라와 있다. 뭘 따지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다. 


<홍차를 보관하던 tea chest(홍차 상자) 세트, 영국, 1780년 

우리는 계속해서 왜 이 멀쩡한 귀족들이 홍차 상자에 집착을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홍차 상자는 지금으로 치면 시계 자랑, 차 자랑과 같았다. 돈 자랑의 단골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금칠이나 에나멜 칠까지는 하지 않아도 일단 집에 티 체스트가 있단 소리는 돈 좀 있단 소리다. 토양이 석회질이라 차나무가 없는 유럽과 영국에서 중국 못지 않게 홍차를 마셔대니 홍차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홍차 상자 위에 앉은 청나라 남자 뒤로 아편선, 영국, 19세기>

돈이 되니 온갖 협잡꾼들이 몰렸다. 홍차는 곧 황금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차 수입업자가 낸 광고를 보자. 청나라 남자가 차 상자 위에 유혹하듯 앉아있다. 그 뒤로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선이 유유히 떠 있다. 

<마카오 근처 섬에 정박한 영국 마약 운반선, 1824년>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홍차를 얻기 위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죽을래? 홍차 주고 아편 먹을래?"라고 협박해서 아편을 먹이고 아편에 헤롱대는 청나라의 홍차를 훔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는 동인도회사 함선, 1841년>

아편 전쟁을 비웃은 프랑스 신문을 보면 겁에 질린 뚱뚱한 청나라 관리가 영국 군인에게 티 체스트(홍차 상자)를 넘기고 있다. 청나라 군인 시체 뒤로는 영국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다. 그 와중에 영국 군인은 개까지 데려왔다. 


<아편전쟁 상황을 그린 신문, 프랑스, 1839~1942년>


영국은 청나라에만 아편을 먹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이집트, 터키, 버마, 인도,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반도 등 영국의 침략을 받은 지역에서는 아편도 같이 퍼졌다. 영국의 아편 공급지는 인도였다. 


1858년 인도가 영국 땅이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마약 생산지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애초에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이유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남 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 병사와 마스티프, 1560년>

유럽인이 샤프란과 후추 같은 향신료가 지천에 널렸다고 믿은 환상의 땅 인도에는 아편마저 흔했다. 이 무굴 여인은 아편을 섞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술잔을 누군가에게 권하고 있다. 인도의 무굴 제국 지배층이 아편을 즐겨한 것이다.

<술잔을든 무굴 여인, 18세기>

영국은 인도의 아편을 식민 지배에 이용했다. 인도의 값싼 마약과 영국의 상권(식민지), 유통망(마약 운반선)이라는 삼박자가 딱딱 맞아 영국 식민지를 아편굴로 만들 수 있었다.   

<인도의 아편공장에서 아편을 개량하는 영국인, 1908년>

사실 영국군 뿐 아니라 미군, 일본군, 만주군도 아편 재배에 열을 올렸다. 미국에서 1950년대까지 살충제인 DDT를 만능치료제라고 믿은 것처럼 아편중독의 무서움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이집트 아슈트의 아편상인, Willam James Muller작, 1839년>

과연 그럴까? 영국 본토에서 아편을 죽음의 약으로 묘사하며 비판한 걸 보면 적어도 영국군은(만주군을 제외한 미군과 일본군도) 아편 중독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약(아편)을 파는 약방, 영국, 1814년>

알았든 몰랐든 결과적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와 함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약중독자들만 남았고 영국은 후루룩 짭짭, 손쉽게 식민 지배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