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 후손도 유공자?
1894년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후손을 국가 유공자로 지정한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소속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유족 등록 업무를 시작하고 동학 후손에게 보상금을 준다고 하는데 정작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1890년 대 서울 남대문>
1894년이면 고종 대 일이다. 아직 호랑이 사냥군이 있었고 호랑이가 담배를 핀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1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학에 대한 진짜 진실을 아는 사람은 남한 북한 모두 전멸하다시피 했다. 진짜 진실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개고기다. 동학군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 발포 모습>
이게 198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모습이다. 이들과 싸운 동학농민군이 왜 떼죽음을 당했는지 사진 한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이라며 헛소리를 하던 조선 후기, 백성들은 굶주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민란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 지배층의 모습은 이랬다.
<1904년 조선 선비들>
갓 쓰고 중국 책만 읽었다. 이들 지배층에 대항한 민란 중 동학은 자잘한 다른 민란들과 달랐다. 조선 왕조를 거의 끝장낼 위기에 몰아 넣었고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되었다. 동학군의 전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동학은 조선 왕조를 무너뜨렸나?
휘몰아치는 국제 정세 속에 동학군의 봉기가 엄청난 역효과를 초래한 것이다. 당시 동학교단에서는 전봉준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는 의견이 있다.
<1894년 체포된 전봉준이 압송되는 모습>
모든 동학교도가 전봉준의 무장 봉기에 100% 찬성한 게 아니라 동학교도 중 일부가 동학농민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동학 정신과 동학 농민 봉기를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는 편이 진짜 동학 정신을 파악하기 쉬울 수 있다. 무교(알타이 샤먼), 불교, 유교, 천주교 등 그때까지 한반도에 존재한 모든 종교를 집대성한 동학은 조선 후기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대다수 백성은 노비였다.
<1910년 조선의 선비>
‘사람이 하늘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는 주장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그 때까지 조선은 남자 양반만을 위한 나라였다. 조선 시대 지배층인 선비들은 글을 읽었다. 글만, 읽었다. 현실세계와는 동 떨어진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았다.
중국인이 되고 싶어한 조선 양반들
그들만의 리그는 중국이었다. 그들은 중국인이 되고 싶어했다. 백성들은? 단군을 모시는 조선인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과 백성은 사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완전 달랐다. 개고기에 대한 사고도 그랬다.
양반은 고대 중국 전통인 개고기를 권장했고 백성은 거부했다. 친중파 양반이 조선인 백성을 수탈하는 구조인 조선에서 백성도 사람이고 여자도 사람이고 아이도 사람이라는 교리는 혁명적이었다. 이게 진짜 동학 정신이다. 단군 정신.
<개고기로 보는 조선 양반과 백성의 민족 의식 차이>
당연히 동학군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조선 양반(지배층)은 조병갑이라는 희대의 탐관오리의 횡포로 인해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군의 무장봉기를 제압하지 못한 청에 군사 원조를 요청할 정도로 무력했다.
<1984년 조선 해역에서 청일전쟁 중인 일본 해군과 청 해군>
오라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군도 따라 들어와 어영부영 눌러앉더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 조정을 장악해버렸다. 왜 조선 바다에서 일본 군함과 청 해군이 싸웠는지 궁금한가? 우리 땅에서 둘이 싸웠기 때문이다.
개고기 먹인 양반, 거부한 백성
조선은 또 다시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조선 백성들이 지배층과 괴리되어 있던 것처럼 동학 농민군도 동학 지도부와 괴리되어 있었다. 즉, 조선 조정이나 동학 농민군부나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 백성과 동학 농민군은 개고기를 거부했다.
<동학 농민 봉기의 지도자 전봉준>
지도자라면 응당 전쟁을 할 경우 아군의 피해를 따져가며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그게 장수다. 1894년 일본 군사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바란다. 이런 압도적인 열세 속에 동학군 지도부는 일본군 철수를 주장하며 다시 2차 혁명을 일으켰다.
부적을 가슴에 붙이면 총알이 뚫지 못한다는 믿음 때문인가? 화약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약 30만∼50만 명의 동학군을 학살했다. 동학농민군은 그저 농민, 봇짐장수, 옹기 장수 등 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동학 참여 계층이었을 1900년 조선의 나무 장수>
이런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인 동학교도 중 무장 봉기에 찬성한 일부 숫자가 50만 명 정도였다. 전체 동학교도 수는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적어도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만 약 30만∼50만 명이 동학을 믿었던 것이다.
동학 정신은 개고기 금지
동학을 계승했다는 보천교의 경우 당시 조선 인구의 25%가 정기적으로 돈(쌀)을 내는 진성 신자였다. 역시 동학을 계승했다는 천도교의 경우 해방 후 약 800만 명이 신자였다. 적어도 800만 명은 절대, 죽어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학 참여 계층이었을 1904년 조선의 옹기장수>
동학 농민군의 경우 중심세력은 가난한 소농, 빈농, 소상, 유랑민들이었다. 그들은 농경민족의 후손답게 「동국세시기」에 나온 내용처럼 삼복이면 개장국을 먹었을까?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삼복에 개고기를 먹는 기원은 중국 한족 기록인 『사기』인데? 조선 백성이 중국 전통을 따랐다고? 이런 발상 자체가 친중파 조선 양반들의 뇌피셜이다. 양반은 중국인이 되고 싶어했고 백성들은 거부했다니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중 동국세시기>
그게 조선의 얼이었고 동학 정신이었다. 오히려 동학 농민군은 개고기를 아주 강하게 금지했다. 운명의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동학 장군은 절대 개고기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 왜 그랬을까?
동학 경전 『동경대전』에서 먹지 말라고 한 ‘네 발 달린 동물’이 개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연히 동학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도 동학 정신 운운하려면 적어도 개고기만은 먹으면 안 된다.
개고기 먹는 고문을 당한 동학교도
동학 농민 봉기에 참가한 생존자 증언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당시 포로로 잡힌 동학교도들은 개고기를 먹는 고문을 당했다. 누구에게? 관군에게. 관군은 개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동학은 종교이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천주교와 같은 사교였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에게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게 해 신앙을 버리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고문을 했다. 진실은 이런데 동학에 관한 역사는 정반대로 왜곡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으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1898년 체포된 동학의 제 2대 교주 최시형>
'개고기 반대'인 동학 정신을 '개고기 사랑'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그런 거다. 콜롯세움에 끌려간 시리아 안티오크 파 기독교도가 사자에 의해 순교하지 않고 십자가를 밟고 살아났다는 식으로 역사 왜곡.
동학을 계승했다면 당연히 개고기 금지
기독교 신자라면 십자가를 밟으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지금 상황이다. 너무 심한 비약이라고? 개고기를 금지하는 신앙의 신자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 신앙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1894~1895년 청일전쟁의 포로가 된 청나라 군사와 조선 관군>
동학교도 대부분은 복날 논에서 일한 피지배계층이었다. 복날 개고기가 전통이라고 떠드는 것은 동학교도가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과 같은 헛소리다. 동학군의 적인 조병갑의 증손녀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 비서관을 지냈다.
노무현 정부를 계승했다는 현 정부는 동학 농민군 후손 국가 유공자 지정한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개고기 금지한 동학을 개고기 먹은 동학으로 왜곡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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