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왜 조선은 개고기를 강요했나? 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44. 왜 조선은 개고기를 강요했나?

조선

18세기 김홍도가 중국 도교에서 팔선 중 하나로 모시던 한상자를 그린 사실로 보아 조선 지배층도 명나라 도교의 트렌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 여신인 서왕모가 사자 개를 타고 나타난다고 믿던 명나라 도교와 달리 조선은 당 이전 도교 서적만 골라 출판했다. 마약인 한식산을 먹으며 개고기를 약으로 잡아먹던 시기의 중국 도교만을 고집해 받아들인 것이다.  

<김홍도의 신선도, 조선, 18세기>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온 나라가 피폐해진 17세기 이후 중국의 한의학과 도교 서적을 많이 출판했다. 그 때까지 중국에 존재한 개고기에 관한 모든 내용을 총망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2004년 대한민국 인재들이 모여 개고기 합법화를 위한 정책을 연구한 것처럼 조선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 지배층은 왕조가 지속된 내내 개고기는 우리 전통이고 우리는 중국인이라고 떠들어댔다.

<한국정책학회의 식용견 위생처리를 위한 정책 연구, 2004>

이런 내용들이 일제 시대와 해방 후 북한의 김일성, 197·80년대 남한의 운동권 세대를 거치면서 한국인 개고기 전통론의 근거가 되었다. 조선은 시작부터가 괴이한 왕조였다.

유교를 국교로, 공자를 신으로 모시며 시작된 조선 왕조는 중국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명나라가 왜 우리 조상의 부모나라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는가? 이해가 안 된다면 억지로라도 이해를 해야 했다.

<주자의 초상>

그렇지 않으면 삼 대가 처형되었다. 조선은 모든 것은 오직 2000년 전 주나라 혹은 춘추전국 시대의 중국이 기준이 되어 만들어졌다.

주나라 혹은 춘추전국 시대의 중국을 이어받은 나라가 송나라와 명나라였으니 송의 주자학을 따라 배우고 명나라의 국가 체제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유교의 덕목을 붓글씨로 쓴 병풍, 조선, 20세기>

고대 청동기 중국인은 개를 잡아먹었다. 사람도 잡아먹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후기 백성들도 개고기와 사람 고기를 먹어야했다.

고대 중국인은 좀비처럼 서로를 잡아먹으며 자기들만 인간이라는 중화사상을 주장했다. 조선 지배층도 유교의 도를 행하는 자만 인간으로 취급하며 소중화주의를 주장했다.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수레와 20세기 초 조선의 가마>

소중화주의는 조선은 작은 중국이라는 의미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대 청동기 중국은 쇄국을 했다. 조선도 쇄국을 했다. 국경을 봉쇄하고 전국의 도로를 없앴다.

조선 개국 전까지 고려 전역에는 도로가 깔려 있었다. 거란족이 빈번하게 개성 근처까지 쳐들어올 수 있던 이유가 잘 정비된 도로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려는 도로가 발달했다.

 

조선에는 공식적으로 도로가 없었다. 믿어지는가? 도로가 없었기에 수레나 마차가 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양반들은 사람이 드는 가마를 탔다. 고구려인조차 수레를 탔는데 말이다. 한강에도 다리가 없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와 같이 왕이 한강을 건너야 할 때는 나룻배를 이어 임시 다리를 만들었다가 다시 해체했다. ? 교역이 활발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1900년 미국이 세워준 한강 철교가 한강의 첫 다리였다.

<미국이 건설한 한강철교, 1900>

쇄국 정책을 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쇄국 정책을 편 건 섬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부분적으로 섬을 개방하긴 했으나 일본도 공식적으로 쇄국정책을 펴는 나라였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과 달리 전국에 도로가 발달했다.

일본에는 아직도 수 백 년 된 도로, 수로, 다리가 많이 남아 있다. 상업도 발달했다. 오사카가 일본의 부엌이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였다. 상인과 기술자는 천민이 아니었다.

<일본의 거리 모습 스케치, 1874>

 

고려 시대에는 대동강까지 아랍 상단 배가 들어올 정도로 경제와 교역이 발달했다. 그러나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고려의 모든 상점을 닫게 했다.

장사가 법으로 금지된 것이다. 어제까지 멀쩡히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천민이 되었다. 상인은 농민보다도 신분이 아래였다. 조선에서 육의전 상인들을 제외한 장사는 공식적으로 불법이었다.

<조선의 시장, 1911>

일본은 세금을 쌀로 받았다. 조선은 왕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세금을 특정 물건으로 받았다. 공물로 내야 하는 물품이 정해지면 어김없이 가격이 폭등했다.

 

부자(양반)가 매점매석을 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도 백성들은 그 물건을 사서 나라에 바쳐야 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부자(양반)는 더 부자가 됐고 가난한 사람(백성)은 더 가난해졌다. 이게 조선의 시스템이었다.

<농민이 살던 움막, 조선, 1900>

세금을 쌀로 통일해서 땅을 가진 지주들이 내게 하자는 조세법인 대동법은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실행되지 못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성기를 잘라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그나마 살 길이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양반은 왕실 장례식 복장을 삼 년 입네, 일 년 입네 하는 문제로 치고 받으며 시를 읊었다. 조선이 오백 년 동안 썩어가는 동안 지배층은 굶어 죽는 백성들에게 개고기는 우리 전통이니 먹으라고 했다.

<바둑 두는 조선의 양반, 1904>

공자가 개고기를 좋아했고 조선은 공자의 뜻을 받아 세워진 나라니 조선인도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한 것이 조선 양반들의 논리였다.

조선 개국 이래 양반들은 이런 식으로 개 먹() 파가 될 것을 강요했다. 실제 조선에서 최초로 복날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도 한양 양반집 머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