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105. 태프트 대통령을 무덤에 데리고 간 고종

AnDant 2019. 7. 30. 12:00

베트남과 중국, 그리고 한국은 개고기를 먹는 대표적인 나라다. 베트남과 중국은 두 중국과 관련 깊다. 베트남은 중국의 천 년 식민지였다. 한국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중국의 속국을 자처했다. 

1921년 중국이 공산화되었다는 사실은 베트남과 한국도 중국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지난 100년 간 한반도에서 변화한 개고기 식용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한 원인도 거기 있을 수 있다. 


<한나라 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화상석 중 개 잡는 모습>

개고기 식용은 곧 중국화다. 1911년 이후 중국화는 곧 중국 공산화를 의미한다. 1905년 미국 25대 부통령(1901), 26대(1901-1909)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는 필리핀, 일본, 청, 조선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 때부터 이미 세계 열강은 중국, 일본, 한반도의 역학관계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태후가 청나라 황족만 키울 수 있던 페키니즈까지 선물한 이유는 미국 사교계의 여왕인 이 어린 아가씨 수행원들이 내노라하는 미국 정계 거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사교계의 골치덩어리자 아이콘이던 앨리스 루즈벨트, 1902년> 

그 중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27대(1909~1913) 미국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도 있었다. 당시 군사 무관 신분이던 그는 인기있는 대통령의 철부지 딸을 내세워 동아시아 사전답사를 한 것이다. 

일본은 루즈벨트 대통령 딸과 태프트를 극진히 환영했다. 그들이 돌아간 후 메이지 천황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곰가죽 선물에 감사하며 앨리스 루즈벨트 양과 윌리엄 태프트 군사 무관을 극진히 대접했음을 알렸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메이지 천황의 친서, 1905년 11월 11일, 출처 : 시어도어 루즈벨트 센터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일본은 미국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멀쩡한 국가인지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의 평가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담겼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청도 나름 성의를 보였다. 

미국에서 봤을 때는 저 할망구가 뜬금없이 왜 국가 간 외교에서 강아지를 선물했을까 싶었겠지만(물론 서유럽 왕가에서는 친선의 의미로 개를 선물하기도 했다) 서태후에게 페키니즈는 옥새와도 같은 귀한 개였다. 


<서태후에게 페키니즈를 선물 받은 앨리스 루즈벹트 양와 수행원, 1905년>

나름 같은 급의 황족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앨리스 양에게 페키니스를 선물한 것이다. 조선은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고종은 루즈벨트 딸과 태프트 무관의 방문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고종은 앨리스와 태프트 (27대) 대통령을 1895년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 능에 데리고 가서 대접했다. 외교적 참사였다. 


<좀 날씬하긴 하지만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1857년 생)으로 추정되는 앨리스 루즈벹트 양의 수행 무관, 1905년>

아무리 역사책을 뒤져봐도 일국의 사신을 묘지에 데리고 가 밥을 먹였다는 기록은 없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 환갑 잔치를 사도세자 능 앞에 연 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 관계는 사이좋은 모자였다는 설과 정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 환갑 잔치를 묘지 앞에서 한 것은 정상이 아니다. 엿 먹으라는 거지. 


<일본 방문 후 고베 항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앨리스 루즈벨트 양과 태프트 대통령 일행, 1905년>

안 그래도 정조는 혜경궁 홍씨 환갑 잔치에 조선 왕가 역사 상 유일하게 개고기 요리를 올렸다. 개고기는 당시 가장 비천한 사람들만 먹던 음식으로 개고기는 진상 자체가 금지된 식재료였다. 

앨르스 양과 태프트 (27대) 대통령은 이미 메이지 천황이 열어준 근사한 무도회에 참석하고 온 후였다. "쟤는 나한테 무도회까지 열어주며 환영해줬는데 얘는 나를 무덤에 초대해 밥을 먹으라네? 것도 쟤가 죽인 사람 무덤에? 편 들어달라는 건가? 아님 엿 먹으라는 건가?" 


<명성황후 능 앞에서 열린 오찬에 참석한 후 단체 촬영을 한 앨리스 루즈벨트 양과 태프트(27대) 대통령 일행, 1905년>

상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태프트(27대) 대통령 일행은 달리 앉을 데가 없었는지 너도 엿 먹어보란 심보였는지 명성황후 능을 지키는 석상에 떡 하니 올라타 사진을 찍었다. 

조선의 왕궁과 고종에 대한 평가도 냄새가 난다는 등 부정적이었다. 루즈벨트 딸과 태프트 (27대)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으로 미국의 결정은 끝났다고 본다. 


<고종 면전에서 명성황후 능 석상에 올라탄 앨리스 루즈벨트 양, 1905년>

하필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 러시아 사이에 낀 조선은 좋든 싫든 간에 열강들의 패권 싸움에 낄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한참전부터 동아시아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외교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된 것이다. 

1917년에는 중국에 이어 러시아에서도 공산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가가 몰살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사라진 공주 아나스타샤로 유명한 로마노프 왕조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가였다. 


<제국주의 회의에서 발언하는 메이지 천황과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1903년>


로마노프 왕가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주장한 가짜 아나스타냐 공주가 유럽 사교계를 휩쓸고 있을 때 동아시아에서는 공산화 열풍이 불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한반도나 일본에도 공산주의 열풍이 유행처럼 불어닥쳤다. 

많은 조선인 지식인들과 일본인 지식인들도 선진 서양 문물인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했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왕조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었다. 한 마디로 잘 나갔다. 


<1917년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몰살된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


1876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천황에 열광한 상태였다.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만 하면 영원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1927년 일본의 금융대공황 전까지는 말이다. 

조선은 달랐다. 왕을 중심으로 장장 500년간 똘똘 뭉쳤지만 백성들 대부분이 굶어죽었다. 동학 농민 교도들이 개고기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간 후에도 조선은 변하지 않았다. 


<영국 아서 왕자에게 훈장을 받는 메이지 천황, 1906년>


나라가 망해버리자 백성들의 원망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지주 계급만 죽여 버리고 나머지 인민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공산주의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곧 독립 운동이었다.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사람들은독립운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