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42. 소 돼지는 먹는데 개고기는 왜 안돼요?

AnDant 2019. 2. 16. 12:00

개고기를 약으로 쓴 초기 도사들의 사기 행각은 너무 빨리 들통 났다. 휴거를 외치며 빌딩에서 뛰어낸 사람처럼 불로초를 먹은 진시황도 죽은 것이다.

그러자 도사들은 서양의 연금술사처럼 자신들이 금(금단)을 만들 수 있다고 공언했다. 당시 황제들이 먹은 금단은 우황청심환처럼 금박을 입힌 환약인 환약일 것이다.

<금을 만드는 연금술사, 영국, 1750~1810년>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이상한 풀(불로초)을 먹거나 영약(금단)을 먹고 초절정 고수가 된다. 황제들이 먹었을 때 기력이 반짝 회복된 걸로 봐서는 스테로이스 성분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 한국 일일 드라마에서 불로장생약처럼 등장하던 일부 공진단에도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 있다. 스테로이드는 운동선수 금지 약물이다. 무엇보다 금단에는 수은이 들어 있었다.

<숯 바구니를 든 금단 도사, 원, 1351~1400년>

비싼 금단을 사먹은 황제와 부호들은 수은 중독 증상으로 죽었다. 그러자 도사들은 한식산을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떠들었다. 6세기 북제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면 귀족들이 한식산을 술에 섞어 마시고 있다.


중독성이 강한 한식산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머리가 맑아지고 체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귀족들이 대낮부터 벌거벗고 있다. 딱 봐도 한두 번 벗어본 폼이 아니다. 

 <양자화의 북제교서도 중 한식산 마시는 사대부 혹은 귀족, 6세기>

훌훌 옷을 벗어던질 정도로 몸에서 열이 나고 견딜수 없던 것이다. 갈증이 나 술을 퍼마시다 알코올 중독이 되거나 미쳐서 죽었다. 선비족 왕가 고 씨 패밀리처럼 말이다.

한식산마저 마약성 독약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도사들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살아남기 위해 중국 도교는 변해야했다. 때마침 중국 내부 사정도 변하고 있었다. 

 <물약을 비우는 도사와 여의를 든 불멸의 황제, 명, 1573-1620>

고구려한테 패배한 후 멸망한 수 왕조 대신 들어선 당 왕조 치세 동안 중국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번성했다. 자잘한 전쟁과 자연재해는 있었지만 몇 백 년 간 큰 전쟁이 없던 덕분에 백성들은 적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호탄산 옥을 당나라 전역에 유통시킨 소그드 상인과 돌궐, 위그르 인들은 교역을 발전시켰다. 경제가 윤택해지고 생활수준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이공린이 모사한 8세기  괵국부인 유춘도, 송, 12세기>

 

백성들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해도 돈이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채식 위주의 불교와 경교, 마니교 등도 중국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이 모든 요인들로 인해 상류층 중심의 중국 도교는 백성 중심 도교로 변하기 시작했다.


허무맹랑한 불로장생약은 집어치우고 수련만 하면 누구나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황제한테 금단을 파는 것보다 일반 신도들을 상대로 헌금을 받는 것이 더 남는 장사였다.

 

<지팡이 든 노인과 신성한 나무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좁쌀 한 말도 잘만 모으면 성을 살 수 있었다. ‘개 머리를 한 새’를 믿는 빛의 종교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만 하면 통할 수 있는 시대가 드디어 온 것이다.

중국 도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빛의 종교 교리의 포인트는 빛이 어둠을 이기고 광명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백성 중심의 도교가 되자 도교의 가르침도 쉽고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었다. 

<불새 청동 거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빛의 종교에서 개 혹은 개 머리를 한 새는 신이나 지상의 왕을 상징했다. 혹은 죽은 영혼을 신성한 산(천국)으로 안내하는 신의 사자였다. 좌우지간 개는 먹으면 안 되었다.


“그래, 신의 섭리가 뭔가?”라는 왕의 질문에 답해야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소 돼지는 되는데 개는 왜 안 되는데요? 도(개 새 신의 뜻)가 뭔데요?”라고 묻는 백성들의 질문에 찰떡같이 답해야 했다.

<당나라 개 도자기, 7~10세기>

일단 광명의 영역이 신선 세계라는 데까지는 대중에게 이해를 시켜둔 상태였다. “신선 세계에는 어떻게 들어가는데요?”라는 질문에도 백성들 입장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나라에 돈이 돈다 해도 대다수 백성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가난했다. 거지같은 현실을 벗어나려면 신선이 되어야 한다는데 그게 언제 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무덤 벽화 속 저택과 불새, 북제, 6세기>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당장 오늘 일 수도 있었고 삼십 년 후일 수도 있었고 재수 없으면 영영 못 될 수도 있었다. 황제한테 한 것처럼 “이 약만 잡숴봐”라며 약을 팔수도 없었다.

어떻게 인내심 없는 백성들을 교화(선동)해서 좁쌀 한 말이라도 받아낼 것인가? 4~6세기까지는 죽을 때까지 고사리만 먹더라도 산속에 틀어박혀 고고하게 살자는 청담사상 같은 도교도 통했다.  

<4세기 왕희지가 시회에서 유상곡수를 즐기는 장면, 명>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결론은 트렌드였다. 당 대가 되면서 중국 도교는 “일단 믿어봐, 믿으면 부자 돼. 자식이 출세 해.” 이런 식의 세속적인 교리를 폈다.

신선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돈만 생겨도 백성들은 바랄 게 없었다. 도교가 일반 백성들의 믿음을 얻은 것은 도교 교단이 발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러 교단이 생긴 걸 보면 백성 친화적인 도교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