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8. 중국 조선 총독부 조선 왕조, 개고기는 전통?

AnDant 2019. 3. 5. 12:00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사실 고구려 국가체제가 그대로 이어진 건 발해다.

어쨌든 이 주장대로라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중국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는 태조 이성계>

이해가 가는가? 왜 뜬금없이 고려 다음에 중국인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됐는지? 중국인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세운 것이 조선 왕조다. 중국의 조선 식민지 총독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명나라가 부모 나라이며 공자가 신이고 개고기가 전통 음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지배층인 양반과 백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장 보고 돌아오는 조선 양반 가족, 1900년>

조선 지배층은 예를 행하는 곳이 바로 중국이며 조선 땅은 중국인에게 가르침을 받아 예를 아는 곳이라고 했다. 즉, 자기들은 교화된 중국인이고 조선은 교화된 중국 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믿는 걸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정신병이다. 정신병적 중국 집착은 생명 경시 사상으로 이어졌다. 예(유교)를 모르는 대다수 백성은 오랑캐 상태, 즉 짐승이었다.  

<1960년 대한민국 문맹률이 78%라고 한 국가기록원>

1960년대 한글도 모르는 문맹률이 78%였다. 한자는 한글보다 몇 천 배 외우기 힘들다. 조선 시대 문맹률은 몇 %였을까? 약 10%의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90% 조선인은 가축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 물론 나쁘다. 하지만 영악한 그들은 조선 왕조의 부패, 모순, 무능을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것뿐이다. 중화사관으로 무장한 조선 왕조는 부패했고 무능했으며 모순 투성이였다.

<상위 10%안에 든 양반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 1910년>

조선은 고려 왕족만 몰살 시킨 게 아니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지워버렸다. 한민족 정통성 지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개고기를 조선의 전통이라고 대중에게 세뇌했다.

이런 소시오패스적 생명관이 이황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을 반인륜적인 노예 상인으로 만들었다. 조선 말기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노예)였다고 한다.

<정선이 그린 이황의 도산서원>

갑오경장으로 신분이 철폐된 것은 500년 동안 내려온 노비 문서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명나라 왕자의 『활인심법』을 자기 책인 양 출판해 조선에 개소주를 퍼트린 이황은 비열한 노예상인이었다.

정확히는 조선의 언론, 교육, 출판의 기능을 담당한 서원을 장악한 똑똑한 노예 상이었다. 그런 이중성과 사악함이 조선 양반들의 모습이었다. 노비제도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조선의 특징이라고?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라는 사실은 부끄럽다. 역사 상 모든 국가에는 노예 계층이 존재했다. 그러나 서양 제국주의 국가나 미국처럼  주로 침략국 백성이나 불법적인 인신매매로 충당했다.  

노예에서 왕비가 된 오스만 왕국의 예처럼 신분 해방에도 융통성도 있었다. 조선처럼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사람의 절반을 노예로 부린 왕조는 없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서자 차별법이었다.

<재가금지법이 있던 양반 과부와 교미 중인 개, 조선, 혜원, 18세기>

양반은 세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여노비를 강간하는 건 무제한 자유였다. 첩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천민이었다. 엄마가 노비면 아빠가 양반이어도 자식은 노비였다.

본처는 첩이나 여노비를 질투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든 강상죄로 죽일 수 있었다. 부모 한 쪽이 노비이면 자식까지 대대손손 노비로 만드는 제도는 역사 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잔인한 신분제도다. 

<임진왜란(1592~1598년)>

 
결국 이 신분 제도로 인해 조선 양반들은 숙원인 붕당정치를 할 수 있었다. 붕당정치 체제 안에서 개인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100명의 인재가 있어도 당의 의견이 정해지면 오직 당의 의견에 따를 뿐이다. 

중종의 조카, 그것도 서출인 천 것이 왕이 되었다는 콤플렉스로 인해서인지 선조는 중국에도 없던 붕당 정치를 허락했다. 또 멍청한 판단을 해 임진왜란을 초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601년>

아들 광해군을 견제한 찌질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막사발에 반해서 국보로 남겼다는 등의 국뽕 선동은 집어치우고 이성적으로 임진왜란을 살펴보자. 

임진왜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 도발 사인을 보냈다. 조선에서는 전쟁 가능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사신까지 보내 확인했다. 

<부산을 침공하는 일본군, 1592년>

붕당정치에 의해 동인과 서인에서 한 사람씩 공평하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북한과 비핵화 협의를 하는데 민주당과 자유당에서 한 사람씩 보내 회담을 한 거다.

송나라 사신 수행원 서긍의 예처럼 사신 맞이 행사와 환영 연회 같은 걸 하며 친선교류인 척 뒤로를 염탐을 했을 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조선을 우습게 봤을지 상상이 간다.

<죽인 숫자대로 돈을 받아야 해서 베어간 조선인의 코와 귀 무덤>


더 어처구니없는 건 동인과 서인 대표는 돌아와 각각 딴 소리를 했다는 거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원수처럼 싸워도 북한 문제에는 한 목소리를 낸다.

동인과 서인은 국가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도 서로를 반대했다. 정세분석? 그 딴 거 없다. 결국 파워 센 당의 주장이 채택되어 일본은 전쟁 할 생각이 없다로 결론 났다. 얼마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