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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조선 공주, 청 황실의 정비가 되다

조선

효종이 송시열의 바지사장이 된 이유는 조카 대신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약점이 많았다. 그래서 효종이 죽고 대비가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피터지며 싸워야 했다.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청 왕조 3대 황제가 될 뻔한 섭정 왕 도르곤이 돌연사 하지만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앉은 개를 새긴 인장,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700~550년>

17세기 망하는 대신 운 좋게 살아난 조선 왕조에게 가장 거슬리는 상대는 역시 청나라였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는 개고기로 대변되는 정체성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개가 목숨을 살려줘 훗날 청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과 같은 이야기 구조다. 신성한 개가 하늘이 정한 새 지도자(황제)를 선택했다는 소리다.

<당 황실 여인의 신발을 물어뜯는 랩독(소매 개), 8세기>

누르하치는 개를 죽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개를 사랑했다. 신발 물어뜯은 당나라 황실 개와 마찬가지로 청 황실에도 황족만 만질 수 있는 사자개(페키니즈, 시추, 라사압소 등)가 있었다.

황족 외에 이 개들을 보는 사람은 죽였다. 청나라에서 개를 죽이는 건 불법이었다. 개고기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다. 똑같이 신농이 쓴 『본초』에서 시작된 한의학이었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판 『신농본초』에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개고기 조리법을 쓴 안동 장 씨의 음식디미방, 조선, 1670년>

"고대에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먹는 것조차 부끄러워진 개고기" 라고 말이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세손들이 줄줄이 죽은 후 효종으로 즉위한 전직 봉림대군은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했다.

특히 『본초』의 99%를 베낀 『동의보감』에 의하면 개고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이렇게 다른 조선과 청이었지만 알고보면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2대 황제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이 섭정을 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초상

누르하치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자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는 도르곤은 효종에게 조선 공주를 자신의 정비로 맞고 싶다는 청혼을 했다. 효종은 한나라 유방이 양녀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 것처럼 신하의 딸을 양녀 삼아 도르곤에게 보냈다.

한나라 공주는 중전(좌부인)이 될 수 없었다. 아들도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엄마가 왕비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효종의 양녀는 도르곤의 정실(적복진)이 되었다. 적복진이 되었다는 것은 아들이 정식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다.

<건륭제 황후의 초상, 청, 19세기 >

또 역대 청나라 황후와 같이 이런 초상화를 그릴 자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모든 기마 유목 왕조에게는 정실부인이 될 수 있는 왕비 부족이 있었다.

‘황제의 딸’이나 ‘미월전’ 같은 청 왕조 시대 드라마를 보면 황제는 끊임없이 수녀를 선발해 후궁을 채워 넣는다. 그 많은 수녀들이 모두 왕비 부족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여인들이었다.

 

청 왕조 시대 적복진(황후)이 된다는 것은 황후 부족이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었다. 도르곤은 조선 공주가 데려간 궁녀까지 측복진(후궁의 품계)으로 삼았다. 

아내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겠지만 황실 내명부의 권력 투쟁 관점에서 본다면 정실의 시녀를 후궁으로 삼는 건 정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배려였다. 같은 부족의 두 여자가 한 편을 먹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냥감을 모는 사냥 개를 그린 호렵도, 청, 19세기>

그런데 암살을 당했는지 진짜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죽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도르곤은 섭정이 된 후 얼마 후 요절했다. 르곤이 장수했다면 17세기 이후 조선에는 고려 말 기황후 일족을 능가하는 새로운 권력층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와 조선 지배층에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도르곤이 죽으면서 조선 공주도 청 황실에서 찬밥이 되었고 조선에 돌아온 후 환향녀 취급을 받으며 아주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사자 개를 조각한 수정 인장, 청, 17세기>

누르하치가 처음 후금을 통일하고 조선에  통교를 청했을 때는 형제의 나라로 외교를 맺자고 했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후 외교 관계는 군신 관계로 격하되었다. 

 
명 왕조와 청 왕조의 조공관계는 분명히 다르다. 명 왕조는 조공 관계의 나라를 형제의 관계니, 군신의 관계니 하고 나누지 않았다. 똑같은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였다.

 

<인장 모양 은제 사자 개 조각상, 청  17세기> 

청 왕조가 조공관계에서 형제의 나라라고 한 것은 기마 유목 왕조 파트너라는 의미였다. 조선도 몽골, 티베트, 위그르와 같이 기마 유목 왕조 동료로 끼어준다는 소리다.

청이 위그르를 응징한 것은 일종의 서열 싸움 같은 거였다. 이런 역학 관계를 모른 인조와 조선 지배층은 오랑캐와 강제로 형제가 될 수는 없다며 전쟁을 불사했다.

<자금성으로 돌아오는 강희제 행렬, 청, 1689>

조선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고려조차 원이 사나운 공주들을 파견해 지배했다고 억울해했으니 조선이 기마 유목 왕조의 외교 관계에 무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지한 조선을 상대로 청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배려를 했다. 병자호란 후 포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사실 상 청 황실은 종친 대접을 했다. 조선 공주는 청 황실 섭정의 정실이 되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조선, 1745-1806>

만주족의 경우 남자는 얼마든지 첩을 둘 수 있었지만 정실은 언제나 만주족이었다. 만주족이 아니면 만주족과 동일한 수준의 부족 여인이어야 했다. 군신관계로 격하되었을지언정 청 왕조에게 조선 왕실이 그랬던 것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청 황실이 신라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한민족과 동질성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신라에서 통일신라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졌으니 결국 한 뿌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30. 양귀비와 신발 물어뜯는 당나라 황실 개

중국 속 유목사

신라와 밀접한 관계인 당나라에는 개 전용 사원이 있었다고 했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양귀비일 것이다. 지난 갑자기 실종이 되어 세계의 관심을 받은 판빙빙이 주연한 양귀비를 보면 궁정 여인이 나오는 장면은 쇄골 아래부터 화면이 잘려있다


제작진은 나름 충실하게 당나라 시대 의복을 고증 했는데 결과물이 너무 외설스러워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거액을 투자한 제작진 측은 화면에서 여성의 가슴 바로 위를 자르는 방법을 택했다

<바둑 두는 당나라 미인, 7~10세기>

따지고 보면 가녀린 판빙빙 몸매 자체가 고증 실패다당나라 시대 여성 복식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항아리처럼 둥근 몸매와 터질듯이 풍만한 가슴, 통통한 볼을 가진 여인이 미인이었다

당 대 최고 미인 양귀비 자태는 아마 많이 포동포동 했 것이다말타는 양귀비 그림만 봐도 육중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진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송 시대 그려진 당 황실 연회 그림을 보자.

<양귀비와 현종의 연애를 그린 오대 혹은 북송 시대 그림 10~12세기 >

다른 궁정 여인들은 사랑이 이뤄지길 기원하며 칠월칠석 연회를 즐기고 있는데 양귀비로 추정되는 여주인은 자고 있다. 저 위로 살짝 문을 열어주는 시종들이 보인다. 

한밤중에 현종이 몰래 찾아와 자는 양귀비를 시녀가 깨우는 장면이다. 이렇게 역사에 남을 만큼 티 나게 물고 빨던 현종은 반란군을 피해 도망치던 중에 제 손으로 양귀비를 죽였다

<말 타는 양귀비와 지켜보는 현종, 13세기>

호위부대가 저 여자 안 죽이면 당신 안 데려간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755 도망치던 현종 행렬 그림을 보면 행렬 뒤쪽에 죽은 모습의 현종이 보인다. 방금 양귀비를 죽인 현종이다

행렬 앞에는 주인 없이 빈 안장을 태운 말 한 마리가 있다. 양귀비가 타던 말이다. 호위부대가 결사거부할 만큼 양귀비는 현종 말년에 나라를 망하게 요물로 욕을 먹었다.  

<755년 피난길에 양귀비를 죽이고 도망치는 현종,  남송(1127–1279)>

그런데 정말 나라를 망칠 만큼 사랑했는지 의심스럽다. 그랬다면 가차없이 죽이는 대신 호위부대를 죽이든지(불가능) 양귀비와 같이 자살을 했을 것 같다. 또 만약 그랬다 해도 당나라가 망한 건 양귀비 탓이 아니다

책임은 오너가 지는 법이다. 현종은 무능했고 뒷배인 위그르가 약해지자 국방과 경제가 무너지면서 나라가 망했다신라 선덕여왕에게 나비없는 모란 꽃 그림을 보내 모욕했다는 태종 이세민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소용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그르와 왕조는 쌍둥이 같은 관계였다당나라 군사는 위그르 기마 부대가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도 위그르 군대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경제는 위그르와 한팀인 소그드 상인이 맡았다. 위그르의 거점은 당시 실크로드를 장악한 쿠차왕국과 호탄 왕국이었다. 즉, 당나라의 군사와 경제 거점이 위그르 제국의 수도였다. 당나라는 시작부터 위그르 돌궐 기마부대 도움을 받았다

<실크로드 쿠차와 호탄 왕국에서 활약한 귀족 기마 무사, 6~7세기)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위그르는  왕조를 도와 줬을까? 학자들은 건국 초기 당 황실 세력이 투르크 계 유목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 왕조에는 황족만 키울 수 있던 사자개가 있었다. 8세기 자유로운 모습의 당 황실 여인을 보자.  

풍만한 자태에 편안한 모습이다. 한 쪽 신발을 벗어 무릎에 걸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벗어 놓은 신발 옆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고 강아지는 주인 신발을 신나게 물어뜯고 있다. 1300년 전에도 개는 주인 신발 물어 뜯기를 좋아했나 보다. 

<편안한 자세로 앉은 황실 여인과 개, 8세기>

이런 작은 개를 소매 속에 넣을 수 있는 개라 하여 랩독(Lapdog : 소매 개)이라 한다. 당나라 시대 황실 여인 소매 속에서 자란 이 개들은 페키니즈로 추정되는 사자개다. 사자개는 유목 왕조들 사이에서 마치 옥새와 같다 했다. 

당 건국 세력이 사자개를 키울 수 있던 유목 왕족인 것이다.  늑대 머리 깃발 휘날리던 돌궐이 망하고 역시 늑대머리 깃발 휘날리던 위그르가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자 당나라도 위그르 밑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당 황실 여인의 신발을 물어뜯는 강아지,  8세기>

변한 것은 종교 외에 거의 없었다현종 들어 당나라는 망하기 직전까지 적이 있다. 때마다 위구르 기마 부대가 출동해 구사일생 살아났다. 대가는 2 필의 비단과 당나라 공주였다.  

시기 강대국이던 티베트가 당나라 장안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위그르 기마 부대가 출동해 구해주었다. 대가는 역시 당나라 공주와 비단이었다 밖에도 위그르는 견마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고창 왕국 지역을 지나는 당나라 상인 행진 7~8세기  추정>

견마무역은 중국 비단과 초원의 말을 교환하는 무역이다. 장사를 누가 했다? 소그드 상인. 소그드 상인은 누구다? 마니교도. 위그르 국교는 뭐다? 마니교마니교의 근거지는 어디다? 위그르 제국인 쿠차와 호탄. 

당나라 비단은 거미줄처럼 촘촘한 소그드 유통 망을 타고 중앙아시아와 유럽(비잔틴 제국)으로 팔려나갔다 왕조의 모든 국가 시스템이 위그르, 소그드와 얽혀있었다하나가 무너졌고 나머지도 우르르 망했을 뿐이다.  양귀비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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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신라가 일본에 개고기를 수출했다고?

한국 속 유목사

2001 개고기 불간섭 선언 이후 한겨레, 오마이뉴스, 중앙일보, MBC 언론이 하나가 되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조상이 농경민이라면 신라 토우 인형에게는 고대 애니미즘적 의미밖에 부여할 없다


다복을 기원하는 고대 토속 신앙의 상징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신라가 유목 왕조였다면 실제 신라의 문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행위는 신성한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유목민의 도덕은 농경민과 달랐다


<지난 천 년 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힌 칭기즈칸>


유목민은 일상이 전쟁이었다. 약탈혼도 흔했다. 태어난 아이를 두고 애가 맞아?”라고 따지는 불가능했다. 칭기즈칸 아들 이름은 주치다. 손님이라는 뜻이다. 칭기즈칸 부인이 납치당한 기간에 생긴 아이였다. 


조선 시대처럼 정절을 잃었다고 여자를 죽이고 열녀문을 세워댔다가는 가문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귀한 늑대 피를 이어받은 초원의 왕족이라면 더욱 그랬다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따지기 전에 누가 애를 낳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수렵도 속 고구려 기마 무사와 개>


부족이 있으면 반드시 왕비 부족이 있는 이유다. 농경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용납할 없겠지만 신라는 유목 왕조였다. 신라 아니라 고구려, 백제  지배층은 유목 민족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가 들어서기  땅에 살았던 원주민은 반농반유목민이거나 농경민이었을 것이다. 신석기 한반도 유적에서 뼈와 돼지 뼈가 발견된것으로 보아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 한족처럼 개를 키워 잡아먹을 있다


<경기도 출토 돌도끼, 신석기 시대,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청동기와 철기 시대가 되면서 북방에서 쓸고 내려온 사람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중앙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이었다. 스키타이 이래 모든 기마 유목 국가에서 지배층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며 노예 계층은 농사를 지었다


돌로 농기구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 눈에는 청동기 무기를 지닌 기마 무사가 전쟁의 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신석기 농경민은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청동 도끼. 흉노, 기원전 13~10세기>


흉노, 고구려에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존재했다노예층이었다. 지배층은 말타는 무사였다. 말과 개는 세트다. 권력을 동원해야 지을 수 있는 고구려 고분에는 기마 무사와 함께 하는 개가 그려져 있다


 개가 저승가서 먹을 개고기라는 헛소리가 마치 정설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한나라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군대 이름은 ‘다물’이다. 옛 땅인 고조선을 찾는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원수인 한무제 눈에는 고구려 무덤 속 개가 도시락처럼 보였겠지만 고구려 고분 주인은 기마 유목민이었다. 들은 반려견이 저승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자라고 여겼다. 


기원전 1세기 경상남도 늑도에서 인간과 나란히 묻힌 무덤이 발견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늑도는 고대 무역항이었다유목민은 육로든 해로든 무역을 한다


<늑도에서 발견된 개 무덤 속  뼈, 한국일보 2016.07.27>


중앙아시아 초원에서는 말을 타고 해상에서는 배를 탄다.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던 이유다. 청동기 시대 이후 지배층이 바뀌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개숭(배하는)파였다. 


늑대의 피를 받고 신성한 개를 키우는 지배자 앞에서 전처럼 개를 잡아먹을  있을까앞서 신라 왕실은 성골 시대까지 모계 사회였다가 성골 시대가 끝나면서 부계 사회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신라의 유목 전통이 사라지고 중국화가 시작된 것이다


<개고기를 식량과 약으로 먹은 한나라 무제>


신라 왕조는 거의 동안 유지되었다고려까지 따지면 거의 오백년 세월 동안 지배층인 유목 왕조가 지킨  전통을 따랐다. 기마 유목민에게 개는 반려견일 뿐 아니라 죽음을 안내하는 영물이다. 절대 먹어서는 된다


개고기 금기는 동안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천 세월이다로마 기독교를 제외하고 서양문화를 없듯이 알타이 샤먼을 제외하고 한국문화를 논할 없다. 적어도 신라 천 년 동안 개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 존재한 개고기 금지법>


역사적 사실이 이런데도 우리 학계와 언론은 마치 뇌수술을 당한 사람처럼 신라에서 개고기를 먹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신라가 일본과 당에 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다. 


개는 먹는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개를 배에 태워 보낸 신선한 개고기를 배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단지 개가 배를 탔기  때문에 배의 종착지에서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논리다. 하도 어이가 없어 신라, , 일본, 대표를 모아놓고 삼자 대면을 해야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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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요약] 개숭파에서 개먹파로 한국인 뇌 수술

한국 속 유목사

태초에 두 인간이 있었다. 개 먹는 인간과 개 숭배하는 인간. 개 먹(는 인간)파와 개 숭(배하는 인간)파는 단순한 식성 차이가 아니다. 수 천년 전 중앙아시아와 세계 4대 문명권에서 이는 아주 큰 차이였다. 개 먹는 인간과 개 숭배하는 인간은 절대 같을 수 없었다. 


<스키타이, 개 모양 황금 장식, 기원전 4~3세기>

특히 중아아시아와 중국 역사는 개 먹는 인간과 개 숭배하는 인간들의 투쟁이었다. 그 투쟁에서 우리 조상이 어느 편에 섰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뇌 수술을 당하기 전의 진짜 우리 역사이기 때문이다. 개 먹는 인간은 중국 한족이다. 늑대를 증오하는 민족이다. 


<한 왕조의 강아지 옥조각. 기원전 206년~기원후220년>


개 숭배하는 인간은 중국 한족의 적이다. 천랑성이 뜨면 약탈을 하는 기마 유목 민족이다. 늑대를 숭배하는 민족이다. 스키타이,페르시아로마, 흉노단군 조선, 고구려(백제, 신라)선비통일신라, 돌궐위그르고려, 몽골여진거란청이다.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 늑대와 개를 숭배한 이들은 수 천 년에 걸쳐 거대한 기마 유목 문명을 이루었다. 


<고구려 무덤 벽화 백희기악도 중 산책하는 개. 5세기>


20세기 역사학자들은 글을 사용하지 않고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 민족이 문명을 이루지 못했다고 정의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인 현재, 발굴된 유물로 판단한 결과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민족이 거대한 문명을 이루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기원전 2세기 경 시집가는 왕소군을 맞이하는 흉노의 개>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기마 유목 문명이라고 칭하기로 하겠다.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 문명은 텡그리 문명이자 늑대 문명, 개 숭배 문명이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어려운 유목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 왕조 강아지 도자기. 7~10세기>


◆ 기마유목 문명의 정체성은 텡그리다.  

◆ 텡그리는 단군이다. 알타이 샤먼이다. 하늘 신앙이다.  절대 신이다. 자연의 섭리이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왕이다. 늑대다. 

◆ 기마유목 문명권에서 개는 죽음의 세계를 관장한다. 죽음의 신이다. 

◆ 텡그리의 대리자인 왕(족)은 마치 옥새와 같은 사자개를 키울 자격이 있었다.

◆ 사재개는 티베트탄 마스티프, 페르시안 마스티프, 몽골리안 마스티프, 삽살개, 파사구, 페키니즈, 라사압소, 시추이다. 유전자가 같다. 

◆ 인종과 시대를 초월한 개 숭배 문명권이 존재했다. 이집트와 사나이 반도, 페르시아 만과 이란고원, 로마 제국, 인도 대륙 북부, 알타이- 시베리아 지역, 중앙아시아, 티베트, 위그르, 몽골,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하나의 벨트로 이어졌다.   

◆ 스키타이페르시아흉노, 로마, 단군 조선, 고구려(백제, 신라)선비통일신라, 돌궐위그르고려, 몽골여진거란청은 공통의 개 숭배 문명권을 건설했다. 

◆ 개 숭배 문명권에서 개고기는 강력하게 금지된다. 


<요나라 무덤 벽화 속 티베트탄 테리어. 907~1125년>


조선 이전까지 한민족은 개 숭배 문명권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말기 동학 신자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고, 고종의 특사인 헐버트는 개고기가 조선에서 엄격히 제한된 음식이었다고 했으며, 일제의 조선가축통계를 보면 개는 가축이 아니었고, 1954 이승만 정권 당시 개고기 금지법이 있었다. 


 <고려 지장보살삼존도 중 삽살개. 14세기>


우리 조상은 개먹(는 인간)파가 아니었다. 개 숭(배하는 인간)파였다. 그렇다면 누가 ? ? 우리를 개먹파로 만들었을까? 누가 가짜 개고기 전통론을 만들었을까? 


2001년 12월 중국인이 되고싶어 안달이 난 정치인과 각계 각층의 주요 인사들이 뛰쳐나와 ‘개고기 불간섭 선언’을 하기 609년에 이미 범죄는 시작되었다. 


<청 왕조 티베트탄 마스티프 은 조각. 17세기>


1392년 조선 건국 후 우리 역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조작되었다. 조선인이 스스로 단군은 오랑캐라고 욕을 했다. 교화되어 중국화 된 지배층 외의 모든 조선인은 짐승이었다. 


마치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과도 같던 파괴적인 역사 조작의 마무리는 세뇌작업이었다. 개고기는 전통 음식이자 약이라고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개먹파가 되었다. 


<닝마파 불교 수도원에서 신으로 모시는 개. 티베트. 18~ 19세기>


자학과 조작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수술 수준의 역사 조작이 있기 전인 진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의 역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이전의 우리 역사는 유목사로 분류해야 한다. 이제부터 한국 속 유목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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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주인의 영혼을 지키는 개

유목사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정체성을  마디로 표현한다면 '텡그리(하늘)'라고    있다. 텡그리는 하늘이자 신이자 자연의 섭리이며 왕이며 늑대이다.  텡그리 신앙은 신성한  신앙과도 연결된다하늘의 아들 자격으로 지상을 다스리는 지배자는 신성한 품종의 개를 키울 자격이 있었다

 개가 티베트탄 마스티프바빌로니안 마스티프페르시안 마스티프몽골리안 마스티프파사구삽살개이다 개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유전자는 일치한다티베트탄 마스티프는 사자개란 의미이다.


< 왕조의 티베트탄 마스티프 은 조각. 17세기>


티베트의 라사압소페키니즈티베트탄 테리어시추와 역시 티베트  개로 사자개라는 의미이다신라 시대 왕족만이 삽살개를 키울  있던 이유이다신성한 개와 신성한 유목 왕조의 혈통이 만난 것이다


신성한 품종의 개를 키울  없던 평민 유목민들도 개를 신성하게 여겼다고향으로 보내주는 존재가 개라고 믿은 것이다그들이 믿은 고향은 주로 신성한 산으로 구현된다. 신성한 산은 실재하는 산일수도 있고 죽어서 가는 북망산일 수도 있다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


죽어서 가는 산까지 안내하는 안내자가 개이다. 그런 개를 먹을 수가 없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고향과 조상은 그들의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왕족이든 평민이든 간에  이동을 했고 몇일을 말을 달려야 가족이 아닌 타인을 만날  있었다


고향이 어디인가 묻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었다초원  신분 확인법이었다. 10대조 조상까지 기본으로 외웠다옆집에 누가 살고 뒷집에 누가 사는지  아는 농경민이라면 이해할  없겠지만 유목민에게는 그게 상식이었다


<몽골 샤먼 도구인 북에 그려진 붉은 산과 늑대>


유목민들은 절대 조상과 고향을 잊지 않았다티베트 고원에 실재했다는 파미르 문명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산이 그 고향이 파미르 고원일  .  직접 10대조 할아버지를 물어 고향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정신적인 고향도 중요했다


언젠가 죽어서라도 돌아갈 고향은 신성한 산이기도 했다고구려와 거의 같았다는 오환은 죽어서 붉은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몽골도 울란하드 즉 붉은  신성하게 여겼다붉은 산은 문명 이름이기도 하다


<고구려 고분 각저총  영혼인도견. 5세기 초반>


황하 문명이 발달하던 시기 혹은 그보다 훨씬  중국 화북 지방에서 발달한 문명에서 고도로 발달한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중국의 황하 문명과 전혀 다른  문명을 홍산 문화라고 한다.  '붉은 '  문명이다



붉은 산은 이슬람 세력이 멸망시킨 페르시아와도 관련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죽으면 알부르즈 산으로 간다고 믿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믿은 신성한 산은  텐산 산맥의 ' 텡그리봉우리처럼 실제 존재하는 산일 수도 있고 죽어서 가게  저승이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장례를 지낸 >


 길을 개가 함께 했다중아아시아 알타이 문명권에서 개는 살아서는 악마로부터 주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죽어서는 주인의 영혼을 신성한 산으로 안내했다. 알부르즈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네눈박이 개가 지키고 있다가 죽은 영혼을 천당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떨어뜨릴지 결정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많은 개들이 무덤 주인과 함께 그려진 이유이다. 생전에 키우던 반려견을 영혼의 수호자로 그린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 황하 문명이 아닌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과 비슷한 이유이다.  식품영양학과 교수의 말처럼 살아 생전 잡아먹은 개를 식량 삼아 무덤에 그려넣은  아니라는 소리이다


<고구려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 539년.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 


조선 시대 이후 우리나라 고대왕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고구려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중국 대륙에 정착한 선비족 왕조를 참고하면 된다선비족은 5 16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북부 중국을 지배했다. 


선비족 왕조 계보는 북위에서 서위( 서위→ 북주), 동위(동위→북제)로 이어졌다. 선비족 왕조가 짧고 강렬하게 중국을 지배하면서 중국 대륙 내에서는 개고기 식용 문화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중국 역사에 파사구(페르시아 마스티프)가 등장하는 시기다. 


<중국 선비족 왕조 북위. 금동불입상.386–534년>


선비족 지배층은 고구려 지배층과 같았다고 한다.  선비족 왕조는 서역에서 전해진 불교를 믿었는데 북방 기마 유목민 특유의 불상에는 사자개가 단골로 등장한다. 선비족이 세운 중국 왕조인 북위((386–534)의 불상은 우리나라 국보인  연가7년명여래입상(539년)과 양식이 동일하다. 

  

선비족 왕조인 북위 혹은 북제 지배층 무덤에서는 무덤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개가 출토되었다. 고구려 인이 믿은 사후 세계를 지키는 영혼인도견과 같은 역할로 한 것이다. 사자처럼 보이는 갈기로 인해 서양 학자들은 이 동물의 정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이 동물이 개라고 생각한다. 


<중국 선비족 왕조인 북위 혹은 북제. 무덤을 지키는 . 6세기>


유목 왕조에서 키우던 티베트 산 개는 모두 사자개로 불렸다. 앙증맞은 시추조차 사자개였다. 투르크 계 왕조가 사용한 국기인 늑대 머리 깃발 속 늑대가 후대에 사자머리를 한 용으로 변형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개에게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자 모양을 합성한 것이다. 


티베트탄 마스티프로 보이는 개들은 중국 역사에서 파사구(페르시안 )라고 불렸다부처님 세계(저 세상)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는 역할을 하다당시 비단 필을 호가한 먹이로 북제의 어느 미친 왕족은  살아있는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던져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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