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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조선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구역 별로 분리되어 살던 한양 모습, 1900년 1월 1일>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급제였다집안에 3대 째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에서 제외되었으니 남자 양반은 죽자 사자 글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개고기를 먹은 양반은 상가집에 갈 수 없었다, 1900년 1월 1일>

대신 양반가 아녀자들이 뒷구멍으로 알바를 구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럼 지지리도 가난했던 남산골샌님들은 복날 개고기를 먹었을까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양반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였다.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집안 제사는 물론 마을 제사, 산신제, 기우제 등등 모든 제사를 못 지냈다. 장례식에도 못 갔고 아기가 태어난 집에도 못 갔다양반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중 제사를 지내지 않은 양반은 오직 천주교 신자였다.


<개고기 술은 한반도에 남긴 퇴계 이황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양반을 제외하고 양반이 개고기를 먹은 기록은 퇴계 이황 정도로 한정된다도산서원이라는 조선 최고 권력 기관을 소유한 이황은 개고기 술인 무술주를 담가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도산 서원의 면세 혜택을 바탕으로 노비 장사를 해 떼돈을 번 퇴계 이황은 명나라 왕자 주권이 쓴 활인심방을 표지만 바꿔서 출판했다. 번역을 했다느니 필사를 했다느니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책 표지에 자기 이름만 써서 냈다. 


<명나라 왕주 주권이 쓴 구선활인심법,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국에 개고기 술을 퍼트린 이 황이 노비 장사에 열을 올린 건 자기도 한양 권문세가처럼 부를 누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선 말기 한양 양반 라 불리는 가문이 소유한 부의 수준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양 양반는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본사 같은 개념이었다. 전국에 걸쳐 소유한 어마어마하게 넓은 장원에서 나오는 수확물이 한양 양반 저택으로 모였다. 조선 시대에는 쌀, 보리, , 심지어 명태까지 화폐 단위로 간주되었다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늘린 이황,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화폐(엽전)가 있었지만 실물 시장은 물물 교환으로 돌아갔다. 뭐든 수확물을 가진 사람이 부자였다. 부의 근원은 땅이었다. 조선 시대 거부를 묘사할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소유한 장원에는 주인 양반 의 성 씨를 딴 노비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었다어마어마한 농지에서 수확물을 생산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이 노예(노비)였다


<가슴을 드러낸 여자 노비 혹은 양민, 1900년 1월 1일>

성이 없는 가축과 같은 신분인 노비는 보통 주인인 양반 집 성을 따라 집성촌을 이뤄 외거 노비로 살았다양반 가 저택 안에서 살면서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주인이 집과 땅을 내줘서(빌려줘서) 저택 밖 노비 집성촌에서 살게 해주는 식이었다

집 안 노비인 내거 노비는 크게 여자 노비, 남자 노비로 나뉘었고 각각의 구역, 역할에 따라 노비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예를 들어 안잠자기라는 여자 노비가 있었다. 구들이 깔리지 않은 윗방에서 먹고 자며 주로 바닥청소만 하는 노비였다


<1593년 당시 젊은 여자 노비 한 명 가격이 목면 25필, 중앙일보, 2018년 9월 15일>

요즘으로 치면 로봇 청소기다. 그런 이유로 보통 안잠자기는 안채에만 두었다점잖은 가문에서 사랑채 청소는 안방마님이나 딸, 며느리가 직접 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별당도 그 댁 따님인 아가씨가 머무는 거처가 아니라 첩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별당을 만들 정도의 재력가라면 본처와 첩이 얼굴을 마주보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별당 수가 곧 첩실 수였다. 어느 댁 저택에 별당이 열 채라면 첩이 열 명이라는 소리였다. 각각의 별당에도 노비가 딸려 있었다.


<기생인지 첩입지 모를 여인이 살던 조선 시대 상류층의 방, 1900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한 개의 한양 양반 가문이 소유한 노비 수는 전국 적으로 수 천~수 만 명에 이렀다. 결국 조선은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였다. 이 노비들을 관리하는 상위 직급도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노비들 중 똑똑한 인간은 회계, 경영, 대외 활동(일종의 정치), 자치(내부 경찰) 등의 전문 분야에서 일했다. 수 천, 수만 명의 노비들을 전문직 노비가 관리한 것이다. 주인 대감이나 마님은 상급 노비들만 상대했다


<삼복 더위에 농사를 짓는 백성들과 개, 조선 김홍도 풍속도첩, 19~20세기 초>

, 그럼 이 많은 노비들이 모두 복날이면 개를 끌고 나가 잡아먹었을까? 아니. 일제 시대에 태어난 한양 권문세가의 후손 분 증언에 의하면 복날 개를 먹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 분은 아예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 분의 유모들 중 한 명은 몰락한 가문 출신의 양반이었는데, 개는 조상신이니 절대 먹으면 안 된다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귀신 쫓는 개로 믿은 삽살개, 1743년>

역시 일제 시대에 태어난 명망 있는 개성 양반가 후손 분의 증언도 비슷했다.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거나 노비들에게 먹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고 하셨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르신들 중에 오직 1960년대까지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는 분만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분은 복날 개고기를 먹는 것은 전통이라고 열변을 토하셨다.

 

58. 백제는 일본을 지배했나? 만주는?

한국 속 유목사

임나일본부설, 한반도 일본 지배설은 별 의미 없다고 본다. 아마 당시 한반도와 일본을 지배한 계층은 기마 유목 왕조인 제 3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기마 유목 왕조의 국제 커넥션이 6~7세기 중국 선비족 왕조와 백제, 신라, 일본을 반가사유상으로 연결해주었을 수 있다. 

특유의 기마 유목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신성한 개를 믿는 관념이다. 신성한 개는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믿은 알타이 샤먼 즉 텡그리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날개 달린 개 신앙과 한민족의 치우 신앙>


텡그리 신앙은 빛을 믿는 신앙이다. 빛의 종교에서 개는 신의 사자이거나 신 그 자체, 혹은 지상의 왕을 상징한다. 하늘에 있는 신이므로 개에게는 날개가 있다. 날개 달린 개는 곧 신이다. 날개 달린 신성한 개를 믿은 지역을 보자. 

중앙아시아 대륙으로 국한해서 봤을 때 고대 중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포함된다. 이 고대 빛의 종교는 고대 4대 문명권에서 각자 다른 신앙으로 발전했다. 중국 황하 문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개와 개고기로 보는 세계 5대 문명권>

패권을 장악한 기마 유목 왕조에게는 왕조를 상징하는 신성한 개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지배층에게도 신성한 개가 있었다. 그 신성한 개가 티베트탄 마스티프에서 유래되는 마스티프 계열의 사자 개다.

신라 왕조에서 왕족만 키울 수 있던 삽살개는 단군과 함께 제단에 모셔진 신성한 개였다. 그 신성한 삽살개를 일본 만주군은 개 가죽 군복으로 만들어 멸종시켰다. 그런데도 현재 한국인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산수도깨비 문양 벽돌, 백제, 6세기 추정>

또 삽살개가 단군과 함께 할 정도로 신성했다는 사실과 신라 왕족들만 키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삽살개든 뭐든 한국에 사는 모든 개는 언제든 때려잡아 먹을 수 있는 식자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심한 비약이라고?

애지중지 키우던 내 개를 이웃이 납치해 때려죽여 먹어도 고작 벌금 몇 푼만 내면 되는 되는 것이 현재 한국 실정이다. 신성한 개를 둘러싼 고대 기마 유목 왕조와 한반도, 일본의 역학 관계는 당나라가 멸망 하면서 깨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


신라 성골 시대가 막을 내리고 진골 시대를 연 통일신라가 국풍(신라 문화)를 버리고 화풍(중국 문화)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한반도의 중국화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망한 왕조의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낙랑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대사 학계는 고구려, 신라, 백제 영토가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속 시원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520~534년, 국보>

홍산문명권에서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면서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 한국 왕조 영토에 만주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제기 되었지만 국뽕이라고 비난받았다.

정작 국뽕 한 사발 마신 건 중화사상을 발전시킨 고대 중국인인데 말이다. 분명한 것은 통일신라 영토가 고구려, 백제, 신라 땅을 합친 것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 땅은 그대로 발해가 가져갔다. 그럼 백제 영토는?

 <7세 통일신라 이후 국제 관계와 개에 대한 개념

663년 백제가 멸망하고 그 지배층은 어디로 갔을까? 의자왕과 삼천궁녀처럼 전부 다 물에 퐁당했을까? 나라를 잃으면 왕이 목을 잘리는 것은 중국 농경민적인 관점이다. 

말 타고 배 타고 이동하는 것이 업인 유목민은 여차하면 튈 수 있다. 백제의 경우 중국 대륙과 요서 지방,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교역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국제 교역로를 따라 배 타고 도망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매 사냥하는 거란 혹은 몽골 족, 9~10세기>

전 왕조의 모든 왕족을 다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전 왕족을 전멸시킨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 튈 놈은 튀고 남을 놈은 남고 잡힐 놈은 잡히는 것이 유목 왕조의 특성이다. 

도망치는 전 왕조의 왕족은 언제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끊임없이 왕조 부흥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전 왕조 부흥 운동을 일으키지 않은 건 고려가 유일했다. 왜? 이성계가 다 죽였으니까. 


<날개 달린 개와 피닉스 신앙 지역>

자, 그럼 어디로 튀었나? 우리 역사학계는 멸망한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지배했다는 가설은 신나게 떠든다. 그런데 중국 대륙이나 요서 지방으로 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또 입을 다문다. 

중국으로 튀어서 거기를 휘젖고 다녔을 가능성 자체가 국뽕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중국만 나오면 국뽕이라는 이름으로 입을 틀어막는지 모르겠다. (중국 뽕을 말아 드셨나?)

<백제의 산수봉황무늬 벽돌, 6세기 추정>

백제 지배층이 중국 북부나 만주 지역으로 갔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기존 기마 유목 왕조와 합류하거나 또 다른 왕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존 왕조에 합류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결혼이다. 같은 기마 유목 왕족이니 적어도 결혼 상대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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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개 전용 사원이 있던 당나라

한국 속 유목사

삼국 유목 전통을 가장 충실히 지켰고 신라 왕족만 키울 있는 삽살개가 있던 것으로 보아 신라는 명백히 개숭(배하는)파였다. 성골이 끝나는 시점인 7세기까지는 개고기 먹을 일이 없었다.  


통일신라의 국교는 불교였다. 10세기에 세워진 고려도 불교였다. 역시 개 먹을 일이 없다. 가끔 선승인 뭐니 하며 개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는 땡중이 있다. 헛소리다. 부처님이 콕 찝어 개는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통일신라, 719년 , 국립중앙박물관>


적어도 14세기 건국된 조선 시대 전까지 우리 민족에게 개고기라는 단어는 불길한 단어였다그렇다면 신라는 당나라와 일본에 굳이 개를 배에 실어 보냈을까?  


신라 계림로 황금 보검처럼 국교 차원에서 나라 왕족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정세 공식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라 황금보검과 유사한 황금장식이 발견된 카자흐스탄>


신라 황금 보검과 같은 양식은  세계에서 극소수 지역에서만 출토된다. 신라, 로마이집트흉노서아시아중앙아시아 등이다특히 지금의 카자흐스탄에서는 신라 계림로 보검 손잡이 장식과 똑같은 장식이 발견되었다


일단 신라와 카자흐스탄이 관련 있다는 얘기다극동의 신라 수도 경주에서  중앙아시아와 흉노가 사용하던 황금보검이 발굴 되었는지 몰라 한국사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한다뭐가 수수께끼라는 건지 모르겠다.  


<기마 인물 모양 토기, 신라, 국보,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계림로 황금보검이 발견된 무덤에서는 기마 인물형 토기와 수레 모양 토기도 같이 나왔다. 신라 왕조가 유목 왕조인 것이다. 고대부터 카자흐스탄 지역은 투르크와 관계 깊다한나라 유방이 흉노에게 공주를 바치던 기원전 2세기에는 오손이 지배했다. 


오손  곤막은 늑대가 키운 아이였다돌궐과 위그르에서는 늑대가 신이었다왕은 늑대머리 깃발을 휘날렸다. 투르크 인은 개가 인간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믿었다유목민은 조상이 누구냐에 따라 적과 친구가 분명하게 나뉜다고 했다



기마유목 왕조에는 마치 옥새와도 같은 신성한 개가 있었다삽살개는 신라 왕족의 상징이다. 8세기 신라 김교각 스님이 당나라 건너갈 삽살개를 데려간 이유는 그가 왕족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당나라 중심지인 안휘성)에서 김교각 스님은 삽살개와 함께 추앙받는다같은 숭배 문화권에 같은 늑대 혈통 왕족이니 친선의 의미로 쪽에서는 황금보검을, 저 쪽에는 개를 보낸 것이다


<당나라 황실을 그린 당인궁악도 속 페키니즈, 836~907년>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도 황실에서만 키울 수 있는 사자 개가 있었다. 페키니즈다. 신성한 개 개념과 유물의 유사성 외에도 신라 자체가 투르크 계라는 설이 있다.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봤을 그럴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청나라 황제 건륭제도 청 왕조 조상은 신라인이라고 했다. 사실 신라가 흉노 계인지 투르크 계인지 따지는   숭배 문명권에서 봤을  무의미하다어차피 형이냐 동생이냐 차이다. 

<조상이 신라인이라고 한 청나라 황제 건륭제 (1735-1796)>



수컷 늑대와 인간 여자가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들이 흉노다반이 늑대다.  흉노인 남자가 다시 암컷 늑대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 투르크다. 4분의 3 늑대 혈통이다. 더 신성하다


흉노와 투르크는 누가  잘났냐 피터지게 싸웠겠지만 이리 메치나 저리 메치나 어차피 둘 다 개숭(배하는)파다신라가 황금 보검을 주고 받은 6세기~8세기 카자흐스탄은 투르크인 돌궐과 위그르가 지배했다

<당나라에서 활동한 중앙아시아 사람들, 7세기~10세기>


돌궐과 위그르는 당시 사실 당나라를 지배했다당나라는 왕조 시작부터 돌궐과 함께 했다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리던 돌궐이 망한 후에는 역시 늑대 머리 깃발을 휘날린 위그르 군대가 왕조를 지켜주었다. 


왕조와 돌궐-위그르는 마치 바지사장과 주인 같은 관계였던 것 같다돌궐의 도움으로 시작된 왕조는 위그르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당 궁정에서는 지금의 폴로 게임을 즐겼다. 


당나라 유물 중에는 유독 중앙아시아 서역인 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당나라에는  10  정도의 마니교도 살았다. 소그드 상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서역인이다


<폴로 게임을 즐기는 당나라 귀족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합쳐진 종교다. 개를 신으로 받드는 조로아스터교와 당시 머리 성인을 믿은 기독교가 만났다 정신으로 개고기를 먹었을까? 마니교 수장은 돌궐과 위그르를 움직여 당나라 황제를 쥐락펴락했다


마니 교도가 아니더라도 당시 당나라에는 개 먹는 중국 한족 풍습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수행 중심의 불교와 도교가 유행하면서 채식을 권장했기 때문이다마니교불교도교 모두 개고기를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교의 권선서 내용을 조각한 당나라 시대 주택 난간, 7세기~10세기>



베이징에는 병든 반려견의 건강을 기원하는 전용 도교 사원이 있었다이런 당나라에 개고기 개를 비싼 배에 실어 수출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당시 일본 역시 개고기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6~8세기 일본은 아스카 시대였다


일본의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쇼토쿠 태자가 야심차게 불교를 국가 정책으로 밀고 있었다국가의 인재를 모아 당나라 불교를 배우러 보내던 일본 황실에서 개고기  개를 굳이 배로 수입 했을까? 


<호류지에서 강의하는 일본 쇼토쿠 태자>


먹을 널린 황족이 일본 역사를 통틀어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신석기인인 조몬인과 에타 족밖에 없다에타 족은 일본 불가촉천민이다. 신라의 개고기 일본 수출설은 뇌수술을 당한 중화사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없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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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신라가 일본에 개고기를 수출했다고?

한국 속 유목사

2001 개고기 불간섭 선언 이후 한겨레, 오마이뉴스, 중앙일보, MBC 언론이 하나가 되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조상이 농경민이라면 신라 토우 인형에게는 고대 애니미즘적 의미밖에 부여할 없다


다복을 기원하는 고대 토속 신앙의 상징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신라가 유목 왕조였다면 실제 신라의 문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행위는 신성한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유목민의 도덕은 농경민과 달랐다


<지난 천 년 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힌 칭기즈칸>


유목민은 일상이 전쟁이었다. 약탈혼도 흔했다. 태어난 아이를 두고 애가 맞아?”라고 따지는 불가능했다. 칭기즈칸 아들 이름은 주치다. 손님이라는 뜻이다. 칭기즈칸 부인이 납치당한 기간에 생긴 아이였다. 


조선 시대처럼 정절을 잃었다고 여자를 죽이고 열녀문을 세워댔다가는 가문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귀한 늑대 피를 이어받은 초원의 왕족이라면 더욱 그랬다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따지기 전에 누가 애를 낳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수렵도 속 고구려 기마 무사와 개>


부족이 있으면 반드시 왕비 부족이 있는 이유다. 농경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용납할 없겠지만 신라는 유목 왕조였다. 신라 아니라 고구려, 백제  지배층은 유목 민족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가 들어서기  땅에 살았던 원주민은 반농반유목민이거나 농경민이었을 것이다. 신석기 한반도 유적에서 뼈와 돼지 뼈가 발견된것으로 보아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 한족처럼 개를 키워 잡아먹을 있다


<경기도 출토 돌도끼, 신석기 시대,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청동기와 철기 시대가 되면서 북방에서 쓸고 내려온 사람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중앙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이었다. 스키타이 이래 모든 기마 유목 국가에서 지배층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며 노예 계층은 농사를 지었다


돌로 농기구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 눈에는 청동기 무기를 지닌 기마 무사가 전쟁의 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신석기 농경민은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청동 도끼. 흉노, 기원전 13~10세기>


흉노, 고구려에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존재했다노예층이었다. 지배층은 말타는 무사였다. 말과 개는 세트다. 권력을 동원해야 지을 수 있는 고구려 고분에는 기마 무사와 함께 하는 개가 그려져 있다


 개가 저승가서 먹을 개고기라는 헛소리가 마치 정설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한나라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군대 이름은 ‘다물’이다. 옛 땅인 고조선을 찾는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원수인 한무제 눈에는 고구려 무덤 속 개가 도시락처럼 보였겠지만 고구려 고분 주인은 기마 유목민이었다. 들은 반려견이 저승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자라고 여겼다. 


기원전 1세기 경상남도 늑도에서 인간과 나란히 묻힌 무덤이 발견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늑도는 고대 무역항이었다유목민은 육로든 해로든 무역을 한다


<늑도에서 발견된 개 무덤 속  뼈, 한국일보 2016.07.27>


중앙아시아 초원에서는 말을 타고 해상에서는 배를 탄다.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던 이유다. 청동기 시대 이후 지배층이 바뀌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개숭(배하는)파였다. 


늑대의 피를 받고 신성한 개를 키우는 지배자 앞에서 전처럼 개를 잡아먹을  있을까앞서 신라 왕실은 성골 시대까지 모계 사회였다가 성골 시대가 끝나면서 부계 사회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신라의 유목 전통이 사라지고 중국화가 시작된 것이다


<개고기를 식량과 약으로 먹은 한나라 무제>


신라 왕조는 거의 동안 유지되었다고려까지 따지면 거의 오백년 세월 동안 지배층인 유목 왕조가 지킨  전통을 따랐다. 기마 유목민에게 개는 반려견일 뿐 아니라 죽음을 안내하는 영물이다. 절대 먹어서는 된다


개고기 금기는 동안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천 세월이다로마 기독교를 제외하고 서양문화를 없듯이 알타이 샤먼을 제외하고 한국문화를 논할 없다. 적어도 신라 천 년 동안 개고기는 먹을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 존재한 개고기 금지법>


역사적 사실이 이런데도 우리 학계와 언론은 마치 뇌수술을 당한 사람처럼 신라에서 개고기를 먹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신라가 일본과 당에 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다. 


개는 먹는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개를 배에 태워 보낸 신선한 개고기를 배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단지 개가 배를 탔기  때문에 배의 종착지에서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논리다. 하도 어이가 없어 신라, , 일본, 대표를 모아놓고 삼자 대면을 해야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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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요약] 개숭파에서 개먹파로 한국인 뇌 수술

한국 속 유목사

태초에 두 인간이 있었다. 개 먹는 인간과 개 숭배하는 인간. 개 먹(는 인간)파와 개 숭(배하는 인간)파는 단순한 식성 차이가 아니다. 수 천년 전 중앙아시아와 세계 4대 문명권에서 이는 아주 큰 차이였다. 개 먹는 인간과 개 숭배하는 인간은 절대 같을 수 없었다. 


<스키타이, 개 모양 황금 장식, 기원전 4~3세기>

특히 중아아시아와 중국 역사는 개 먹는 인간과 개 숭배하는 인간들의 투쟁이었다. 그 투쟁에서 우리 조상이 어느 편에 섰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뇌 수술을 당하기 전의 진짜 우리 역사이기 때문이다. 개 먹는 인간은 중국 한족이다. 늑대를 증오하는 민족이다. 


<한 왕조의 강아지 옥조각. 기원전 206년~기원후220년>


개 숭배하는 인간은 중국 한족의 적이다. 천랑성이 뜨면 약탈을 하는 기마 유목 민족이다. 늑대를 숭배하는 민족이다. 스키타이,페르시아로마, 흉노단군 조선, 고구려(백제, 신라)선비통일신라, 돌궐위그르고려, 몽골여진거란청이다.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 늑대와 개를 숭배한 이들은 수 천 년에 걸쳐 거대한 기마 유목 문명을 이루었다. 


<고구려 무덤 벽화 백희기악도 중 산책하는 개. 5세기>


20세기 역사학자들은 글을 사용하지 않고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 민족이 문명을 이루지 못했다고 정의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인 현재, 발굴된 유물로 판단한 결과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민족이 거대한 문명을 이루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기원전 2세기 경 시집가는 왕소군을 맞이하는 흉노의 개>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기마 유목 문명이라고 칭하기로 하겠다. 중앙아시아 기마 유목 문명은 텡그리 문명이자 늑대 문명, 개 숭배 문명이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어려운 유목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 왕조 강아지 도자기. 7~10세기>


◆ 기마유목 문명의 정체성은 텡그리다.  

◆ 텡그리는 단군이다. 알타이 샤먼이다. 하늘 신앙이다.  절대 신이다. 자연의 섭리이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왕이다. 늑대다. 

◆ 기마유목 문명권에서 개는 죽음의 세계를 관장한다. 죽음의 신이다. 

◆ 텡그리의 대리자인 왕(족)은 마치 옥새와 같은 사자개를 키울 자격이 있었다.

◆ 사재개는 티베트탄 마스티프, 페르시안 마스티프, 몽골리안 마스티프, 삽살개, 파사구, 페키니즈, 라사압소, 시추이다. 유전자가 같다. 

◆ 인종과 시대를 초월한 개 숭배 문명권이 존재했다. 이집트와 사나이 반도, 페르시아 만과 이란고원, 로마 제국, 인도 대륙 북부, 알타이- 시베리아 지역, 중앙아시아, 티베트, 위그르, 몽골,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하나의 벨트로 이어졌다.   

◆ 스키타이페르시아흉노, 로마, 단군 조선, 고구려(백제, 신라)선비통일신라, 돌궐위그르고려, 몽골여진거란청은 공통의 개 숭배 문명권을 건설했다. 

◆ 개 숭배 문명권에서 개고기는 강력하게 금지된다. 


<요나라 무덤 벽화 속 티베트탄 테리어. 907~1125년>


조선 이전까지 한민족은 개 숭배 문명권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말기 동학 신자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고, 고종의 특사인 헐버트는 개고기가 조선에서 엄격히 제한된 음식이었다고 했으며, 일제의 조선가축통계를 보면 개는 가축이 아니었고, 1954 이승만 정권 당시 개고기 금지법이 있었다. 


 <고려 지장보살삼존도 중 삽살개. 14세기>


우리 조상은 개먹(는 인간)파가 아니었다. 개 숭(배하는 인간)파였다. 그렇다면 누가 ? ? 우리를 개먹파로 만들었을까? 누가 가짜 개고기 전통론을 만들었을까? 


2001년 12월 중국인이 되고싶어 안달이 난 정치인과 각계 각층의 주요 인사들이 뛰쳐나와 ‘개고기 불간섭 선언’을 하기 609년에 이미 범죄는 시작되었다. 


<청 왕조 티베트탄 마스티프 은 조각. 17세기>


1392년 조선 건국 후 우리 역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조작되었다. 조선인이 스스로 단군은 오랑캐라고 욕을 했다. 교화되어 중국화 된 지배층 외의 모든 조선인은 짐승이었다. 


마치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과도 같던 파괴적인 역사 조작의 마무리는 세뇌작업이었다. 개고기는 전통 음식이자 약이라고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개먹파가 되었다. 


<닝마파 불교 수도원에서 신으로 모시는 개. 티베트. 18~ 19세기>


자학과 조작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수술 수준의 역사 조작이 있기 전인 진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의 역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이전의 우리 역사는 유목사로 분류해야 한다. 이제부터 한국 속 유목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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