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그려진 12세기 프랑스 십자가는 프랑스 왕족이 소장하던 예수님 Reliquary(성체함)을 장식한 십자가일 가능성이 높다. 성체함이란 예수님의 신체 일부를 보관하는 용기를 말한다.
<유월절에 양 피로 개 집에 부적을 써주는 남자와 밥 먹는 개, 프랑스, 1160~1170년>
불교에서 부처님 사리를 신성시하며 사리함을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천주교에서도 예수님 성체함을 숭배하며 아름답게 치장했다.
천주교 국가의 귀족과 왕들은 성골함을 지키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 혹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는 표시 정도로 여겼다. 중세 유럽에서 "우리 집에 성체함 있어" 그랬다면 그 집은 왕을 배출하는 왕족이었다.
<고려 시대 부처님 사리함, 국립중앙박물관>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성체함을 가지고 있다면 왕권을 이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왕족들은 마치 미래의 왕좌를 찾듯, 보물찾기를 하듯 성체를 찾아 다녔다.
애초 목적이 약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로마 지역(특히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을 심하게 약탈한 십자군 기사단이 애타게 찾던 것이 예수님의 성체였다는 설이 있다.
<거룩한 가시왕관 성체함, 프랑스, 1390년대>
세계적으로 히트한 『다빈치코드』는 예수님의 가족사를 둘러싼 천주교 내의 음모를 다룬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벌써 1980년대 유럽을 휩쓴 『성혈과 성배』라는 책과 아주 비슷하다.
<고대 페르시아 금장식 중 날개 달린 개, 기원전 5~4세기>
성혈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 이걸 예수님 후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예수님 피 한 방울이 묻은 천 조각조차 예수님의 성체였다.
중세 시대 성골함은 예수님 몸이 스쳐 지나갔을 법한 물건이라도 구해서 보석함을 만들어 장식한 것이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성체함을 감싼 비단 직물 무늬 중 날개달린 개, 스페인, 12세기>
15세기 종교 개혁 이전까지 카톨릭 국가(구교)에서 만든 성체함에는 거의 대부분 '개'가 그려져 있었다. 10세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상아로 만든 성체함을 보자. 정면에 떡 하니 개 두 마리가 있다.
<개와 새가 그려진 성체함, 상아, 북부 이탈리아, 10세기>
개 위에는 새도 있다. 기독교가 정식으로 국교로 채택되기 전부터 로마에서는 이미 날개 달린 개 신앙을 믿고 있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지역을 다스리던 에트루리안과 관련 깊어 보인다.
3세기 로마 제국의 대리석 관을 보면 황족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가족들과 개가 지켜보고 있다. 또 아이의 대리석 석관 측면에는 날개 달린 개가 새겨져있다.
<임종직전의 어린 소녀와 개가 그려진 대리석 석관, 로마, 200~220년>
개가 죽음이나 죽은 후 관을 지킨다는 개념은 에트루리안 시대부터 로마 제국 시대까지 지배층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니 10세기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 성체함에 개와 새가 나타난 것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에트루리안 비석 임종 순간, 로마, 기원전 490-470년>
그런데 11세기 이후 프랑스 왕조에서 만든 성체함에서는 거의 100퍼센트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개가 그려졌다. 그 중 일부가 유월절 개 집에 양 피 부적을 그려주는 모습이 그려진 십자가다.
<임종직전의 어린 소녀가 그려진 대리석 석관 측면, 로마, 200~220년>
14세기 프랑스 발부아 왕조 가문에서 예수님의 가시나무 관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정확히는 가시 한 개) 특별히 제작한 성체함이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성체함 뒷면을 보자.
<거룩한 가시유물 성체함 중 뒷면의 성 크리스토퍼, 프랑스, 1390년>
성인 미카엘과 성인 크리스토퍼가 있다. 성인 미카엘은 용을 죽이고 있다. 미카엘은 프랑스 국왕을 지키는 수호성인이었다. 중세 시대 용은 악마였다. 개가 용을 물리쳤다면 개는 성인이다.
<악마를 죽이는 성인 미카엘, 1475~1500년>
성인 크리스토퍼는 고대 안티오크 교회에서 개 머리를 한 성인이었다. 개 머리를 한 성인이 아기 예수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성체함 뒷면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성체함에 보관되었다던 가시나무 관의 일부 (가시 한 개)는 어디에서 왔을까?
<개 머리를 한 성인 크리스토퍼(기원전 3세기), 러시아 정교회, 17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1239년 십자군군대가 한창 약탈하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썼다고 추정되는 가시덤풀을 샀다.
십자군 전쟁 중 가시나무 관을 사는데 성공한 루이 9세는 가시나무 관을 로마 교황청에 선물했다. 로마 교황청은 가시나무 관의 가시를 하나 하나 해체해서 프랑스 주요 왕족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루이 9세의 가시나무 관 증정식과 해체식,1239년 추정, 1490년 발행>
보물로 화려하게 치장한 성체함을 만든 발부아 왕조의 조상도 그 때 가시 하나를 받는데 성공한 유력 왕족 중 한 명이었다. 가시나무관에서 가시를 해체하는 작업은 루이 9세기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 고위 성직자가 직접 주재했다.
<가시나무 성체함, 1170년>
교황 혹은 추기경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고위 성직자가 직접 가시나무 관 증정식과 해체식을 주재한 점과 이미 1170년에도 가시나무 관을 보관하기 위한 성체함이 있던 점으로 보아 예수님이 쓰신 가시나무 관은 반드시 찾아야 하는 성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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