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36. 중국 불교에 채식을 넣은 양나라 무제

AnDant 2019. 1. 31. 12:00

부처님은 인도-페르시안 혈통을 가진 왕자였다. 페르시아의 파르티안 제국에서 불교가 성행한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지정학적으로 불교는 반드시 파르티안(안식국)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전해졌다

 

고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히말라야 산맥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페르시아 지배층이 인도로 침입한 루트와 반대로 인도에서 페르시아(파르티안 제국)로 전해졌다 

 <파르티안 제국에서 발견된 그릇 속의 파르티안 기마법, 5세기>

 

인도파키스탄페르시아 순이다고대 파키스탄 지역에 있던 쿠샨 왕조에서는 불교, 힌두교와 함께 그리스 신들까지 잡다하게 믿었다. 한 때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를 받은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간다라 문화라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뽀글머리를 한 불상이 간다라 양식이다. 불교는 간다라 문화의 쿠샨 왕국에서 파르티안으로, 파르티안에서 다시 지중해와 흑해로 전해지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5~6세기 불교의 전파 경로>

 

중 중앙아시아 라인이 8세기 신라 스님 혜초가 천축국(인도)를 여행한 경로다. 혜초 스님은 인도를 여행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파르티안 제국은 불교의 단순 경유지가 아니었다

불교 전파에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파르티안 출신 승려들이 없었다면 중국 불교는 없었을 것이다. 파르티안 승려들은 몇 세기에 걸쳐 산스크리스트 어로 된 불경을 서역어와 중국어로 번역했다 

<비로자나불,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르티안 출신 승려들이 열심히 불경을 번역하고 있을 때 마니가 태어났다. 마니의 어머니는 파르티안 제국에서 아주 높은 신분이었다. 그리고 마니는 채식을 했다

7세기 페르시아와 함께 사라진 조로아스터교를 제외한다면 마니교와 엮인 종교는 모두 채식을 했다. 4세기 이후 마니교는 로마와 페르시아 양쪽에서 아주 심한 탄압을 받았다 

<마니교의 예배 모습, 8~9세기 추정>

 

마니교는 사방이 적이었다. 그래서 불교와 경교로 위장을 한 듯 하다파르티안 승려들이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조에는 없던 채식이라는 양념이 들어간 이유일 것이다.

 

중국 불교는 파르티안 승려들이 중국어 불경을 완성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6세기 양나라 무제 때 일이다. 나라 망하는 줄도 모르고 양무제는 불교에 심취했다. 이 시기 중국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파르티안 기마법의 선비족 무사, 4세기>

 

중국은 역사를 통틀어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인간은 많은데 먹을 게 없다면 21세기 베네수엘라 꼴이 날 수 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 사람 잡아먹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 이유다

한나라 유방도 사람 고기를 먹었고 공자님은 사람 고기로 만든 젓갈을 특히 즐겼다. 유비·관우·장비로 유명한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삼국 시대가 끝나자 중국 대륙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중국 북쪽을 다섯 오랑캐(기마 유목 왕조)가 지배한 것이다. 무려 16개 왕조를 번갈아 세웠다 하여 516국 시대라 한다. 그나마 남쪽은 한족 왕조가 지배했는데 하나같이 비실비실 했다. 북부의 다섯 오랑캐를 선비족이 정리해버리자 남북조 시대가 된다

<쌍영총의 거마행렬도, 고구려, 5세기 후반>

 

중국 북부를 지배한 선비족 왕조는 서로 치고받느라 바빴다. 서위와 동위로 나뉘더니 서위는 다시 북주가 되고 동위는 북제가 되었다왕조 이름은 바뀌었어도 황제 성은 하나였다

고구려 고 씨라는 설이 있는 고 씨 패밀리였다. 선비족과 고구려는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선비족 왕조에서 고구려인은 활약을 했다. 물론 백제인과 신라인도 선비족 왕조 조정에서 일했다 

<두 마리 사자(개) 위에 앉은 부처, 북위, 5세기 후반~6세기>

 

그러므로 선비족 왕조에 대해 살펴보면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다. 비록 고구려 고 씨라는 설이 부끄러울 정도로 선비족 왕조가 미친 짓을 많이 했지만 말이다.

파르티안 제국을 거쳐 온 불교를 믿은 고 씨 패밀리는 고기도 잘 먹고 사람도 잘 죽였다갓난아기를 개 먹이로 줄 정도였다. 당시 북조에 살던 중국 한족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낙타를 탄 사람, 북위 혹은 북제, 6세기>

 

미친 고 씨 패밀리로부터 고통 받는 동족을 해방시켜 주어야 할 남조의 한족 왕조도 신통치 않았다중국 남부가 유목 왕조에게 지배당하지 않은 건 실력이 아니라 운이었다.

복잡한 지형이 말을 타는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가 유목민에게 지배를 당하는 건 몽골인이 이슬람에서 끌고 온 기술자들이 공성 기계를 만들고 난 후의 일이다.

 <3세기 오랑캐에게 시집간 후 구출된 한족 여인을 그린 그림, 15세기>

 

천혜의 요새에서 남부 한족 왕조는 오랑캐에게 북부를 뺏긴 분노를 시와 문장으로 곱씹으며 서로 치고 받았다. 그 와중에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저지른 양 나라 무제가 등극했다.  

황제가 되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는지 양무제는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어느 날 갑자기 승려육식금지 법안을 만들더니 자기도 고기를 안 먹었다 

<양나라 무제, 7세기>

 

어라? 황제가 고기를 안 먹네? 눈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어째 저도 고기가 안 땡기네요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양나라 신하들도 줄줄이 채식을 하게 되었고 채식요리가 발전하게 되었다

불교 교리에는 개고기와 사람고기는 절대 먹지 말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략 이 시기부터 중국 대륙 전체에서 황하 문명 시대부터 약과 식량으로 먹어온 개고기를 꺼리는 풍토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