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 유목사

41. 주나라 왕비가 흉노족인데 웬 중화사상 뽕?

AnDant 2019. 2. 14. 12:00

비단 찢을 때마다 왕을 홀리는 웃음을 지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포사는 결국 왕비 자리를 꿰찼다. 그러자 열 받은 전직 왕비가 북방 기마 유목민인 견융을 끌어들여 주 왕조를 멸망시켰다.


여자 하나 잘못 만나 나라가 망한 건 맞지만 정확히는 비단 찢다 망한 게 아니라 흉노의 침입으로 망한 것이다. 견융, 개 견 자를 쓰는 것부터 범상치 않다. 개를 섬기는 오랑캐, 즉 흉노다.

 

<흉노 혹은 선비족 인형, 기원전 4~3세기>


여불위와 진시황의 민족인 초나라 묘족도 조상이 개였다. 주 나라 마지막 왕이 쫓아낸 왕비 역시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중국 유물에 개와 불새와 같은 북방 기마 유목 왕조의 상징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나라부터 따지자면 모든 고대 중국 왕조가 북방 기마 유목민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셈이다. 날개달린 말과 신성한 나무, 그리고 불새는 전형적인 북방 기마 유목민의 상징이다. 

<불새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불새는 개 머리를 한 새 혹은 사자나 남자 얼굴을 한 새로도 변한다. 즉 신성한 나무와 빛의 왕국을 믿는 기마 유목 민족의 종교다.


한 왕조 유물 중에 신성한 나무 위에 앉은 불새를 활로 쏘는 남자 모습이 있는 걸로 봐서는 키푸로스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내부에 잔존한 흉노 세력을 마침내 몰아냈다고 선포한 것 같다. 

<한 왕조의 천마와 기원전 1세기 흉노의 천마>



쫓겨난 왕비의 한풀이로 주나라가 망하자 무려 550년 간 중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세워졌다 망했다는 춘추전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약 3년 여간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 국민이 얼마나 배고팠는지 떠올려 보자.

<불새를 겨냥하는 궁수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최소 그 상태로 550년을 서로 죽이며 지냈다면 살아남은 사람들 상태가 정상일 수 있을까? 재물 가진 지배층이야 살 길이 있다 쳐도 백성들은 달랐다.

육체적인 고통과 당장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처절한 배고픔 속에 지배층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당연했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중화사상 개념도>

그래서인지 이 시기 학자들은 중화사상을 퍼트렸다. “중국인 외의 모든 인간은 모두 짐승(오랑캐)! 그러니까 우리 중국 최고!” 라는 믿음이다. 이집트는 앗시리아와 싸웠고 고구려도 당나라와 싸웠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외교도 하고 교역도 했다. 중국 안은 인간 세계, 중국 밖은 짐승 세계라는 이분법적 믿음은 굶어 죽는 백성들에게 뽕 맞은 거 같은 정신적 만족감을 줄 수는 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는 중국인이니까 훗, 그나마 짐승 같은 저 놈들보다는 백 번 나아.”라고 자뻑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주나라 마지막 왕비가 정말 흉노족이라면 이 중화사상 뽕은 완전 헛소리다.

이런 선전·선동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것이 유교였고 그 대표 주자가 맹자와 공자였다. 늙어 죽을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한 공자는 한나라 유방이 유교를 국가 정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책, 청,  17~20세기>


중화사상 역시 20세기 모택동이 국가정책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것이다. 한편, 중화사상 뽕으로 버티던 550년의 춘추전국 시대를 흉노설이 떠도는 진시황이 통일 했지만 얼마 안 가 내란이 터졌다.

고대 중국 역사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내란 아니면 북방기마유목민이 쳐들어왔다. 결론은 중화사상 뽕이든 뭐든 백성들은 마음 편히 농사조차 짓지 못했다. 그래서? 또 굶어죽었다. 계속 굶어죽었다.

<부엌 목매달아 잡은 개 추정 탁본, 한, 기원전206~서기200년>

여차하면 짐 싸 짊어지고 멀리 떠날 수 있는 유목민과 달리 농경민인 중국인 농사를 못 지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식량이 부족하면 뭐든 먹는다.

쥐 고기도 먹고 개고기도 먹고 사람 고기도 먹는다. 산둥성에서는 책상 다리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중국 역사에는 가뭄이나 전쟁으로 성 안 인구가 반으로 줄었다는 기록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유민도, 명, 16~17세기>

 

시체를 먹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사냥해 잡아먹어 인구가 반으로  준 것이다. 한나라 유방이 적장의 고기를 먹거나 공자가 사람 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긴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당시 법 상 반드시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사람고기도 좋아했고 개고기도 좋아했다. (모택동도 개고기는 좋아했다)

<장막 안에서 여인과 함께 있는 황제, 한, 기원전 232 경 추정>

백성들은 미국 드라마 ‘워킹데이’ 속 좀비들처럼 서로를 잡아먹고 먹혔지만 지배층은 달랐다황금과 권력을 쥔 그들은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지금과 같은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헤맸고 황제들은 금단을 먹거나 한식산을 먹었다. 초기 도교 도사들의 주요 고객도 이 황제, 귀족, 부호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치료를 할 때나 만났다. 한의사도 겸한 그들은 개고기를 약으로 썼다. 

<목줄한 개 석상, 한, 1~2세기>

 

고대 개고기를 약으로 쓴 건 중국 한족만이 아니었다. 앞서 살펴봤듯 ‘개 새’를 믿은 지역 즉 개를 죽음의 신 아누비스로 숭배한 이집트, 여신 굴라와 신성한 개를 믿은 바빌로니아에서도 개고기를 약으로 썼다.

그러나 중국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신전의 관리 하에 아주 엄격히 개고기를 약으로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아무런 제제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개를 잡아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신농'의 처방대로 약으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