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11

84.천주교의 개사랑 독재 Vs 북한의 개고기 독재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개고기 비난에 대해 반박할 때 외국 어디도 먹고 어디도 먹는다는 식으로 핑계를 댄다. 개고기를 먹는다고 주장하는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와 스위스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와 서양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서양사는 또한 이슬람사와 미국사, 청사와도 연결된다. 종교 개혁 이후 천주교와 청나라 역사는 조선 역사와도 연결된다. 병자 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 가족들이 조선에서 몰살당한 이야기와도 관련 있다. 이 길고 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키는 에트루리안이다. 천주교(로마 카톨릭) 토대는 에트루리안이고 종교 개혁 이전 서양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로마 지배층은 에트루리안 문화를 그대로 가져왔다. 수 천 년 전 개 무덤을 만들 정도로 (특정)개를 ..

유럽사 2019.06.04

83. 로마 - 카톨릭의 개 숭배 원조는 에트루리안

사극을 볼 때 느끼는 안타까운 고증 실수가 있다. 청자가 없던 시기가 배경인데도 떡 하니 청자가 나오거나 도자기가 없던 시대인데도 도자기로 된 다기 세트가 나오는 걸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왕족이라고 다 도자기를 쓴 건 아니다. 도자기는 인간이 섭씨 1000도 이상의 화력을 만들수 있게 된 후에야 만들어졌다. 섭씨 1000도 이상의 화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첨단 과학이 사용되었다. 도자기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도 직결된다. 도자기가 발명되기 전 지배층은 토기를 사용했다. 일반 백성은 잘 해야 투박한 질그릇 정도 사용했다. 신석기 시대를 예로 들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토기 한 번 구경 못하고 죽은 인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에트루리안도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유물을 남겼다. 완성도 높은 에트루리안 청동..

유럽사 2019.06.01

81. 개 머리를 한 인어, 스킬라

보통 많은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관점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에트루리안을 빼놓았기 때문이다.심지어 때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처럼 취급되기도 하는 에트루리안은 로마제국에게 정복 당하기 전까지 그리스-로마 지역을 비롯한 지중해의 지배자였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만들었으며 흉노와 교류했다 대항해 시대가 오기 전까지 (혹은 그 후에도) 그리스-로마를 차지한 민족은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했다. 해양무역권을 장악하면? 중계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지중해 무역권을 두고 피 튀기는 경쟁이 벌어졌다. 해양기술이 발전하기 전 고대인은 연안을 따라서만 항해했다. 연안을 벗어나 ..

유럽사 2019.05.28

79. 로마 장군은 왜 개와 여인을 끌고 왔을까?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추앙받는 한니발 장군으로 유명한 포에니 전쟁은 흔히 로마 제국과 아프리카 국가인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단순한 아프리카 야만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페키니아인이었다. 페키니아가 누구인가? 우리의 늑도 섬 개 무덤 유적과 마찬가지로 개 무덤 유적을 남긴 그 페키니아다. 기원전 600~500년 페키니아의 지배층은 개 무덤과 강아지 모양 토우를 남겼다. 이 페키니아가 로마와 유럽으로 전해진 에트루리안 문화와 관련 깊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264년부터 120년 동안 벌어진 로마와 카르타고(페키티아) 사이의 전쟁은 결국 지중해 해상무역권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중아아시아든 지중해든 무역권은 돈이었고 곧 패권이었다. 당시 그리스와 로마는 에트루리안이라고 하는 지..

유럽사 2019.05.23

78. 왜 성모 마리아는 개를 안고 있었을까?

한국 천주교는 천주교 역사 상 유일하게 개고기를 전통으로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먹는 조직이다. 원래 천주교에서는 개를 신성하게 여겼다. 유럽사는 곧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역사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종교 개혁 이전의 천주교와 종교 개혁 후의 개신교를 설명하면서 유럽사도 함께 알아볼 것이다.유럽사는 곧 이슬람사, 미국사와도 이어진다. 복잡다단한 이 역사들 속에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개고기 안 먹는다. 한국 기독교만 먹는다.” 유럽 예술에서는 성모마리아와 개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 개혁 전과 후 형식이 조금 달라진다. 종교 개혁 전에는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혹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와 강아지 혹은 성모마리아와 개가 함께 묘사되었다. 이 성모마리아 ..

유럽사 2019.05.21

77. 사자왕 리처드의 뒤통수를 친 프랑스의 필립 2세

중세 유럽에서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영지 개념이 컸다. 영지는 귀족, 혹은 왕족의 가족 재산으로써 주인이 죽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거기 사는 백성들 운명도 소용돌이쳤다. 예를 들어 결혼 지참금으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통째로 가져오기도 했고 왕이 후계자(아들) 없이 죽는다면 프랑스 왕국 전체가 먼 남자 친척에서 상속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 유럽에서는 거대한 씨족 연합체가 성되었다. 대표적인 씨족 정치 연합체가 리처드 1세 집안인 앙주 제국이었다. 앙주 제국은 이탈리아 피렌체 산맥부터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포함한 현재 프랑스 영토의 3/2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까지 다스리던 대제국이었다. 앙주 제국의 상속자 중 한 명이자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 중 하나인 리처드 1세는 영국에서 전설처럼 전해..

유럽사 2019.05.11

76. 중세 유럽 예수님의 성체를 지킨 개

개가 그려진 12세기 프랑스 십자가는 프랑스 왕족이 소장하던 예수님 Reliquary(성체함)을 장식한 십자가일 가능성이 높다. 성체함이란 예수님의 신체 일부를 보관하는 용기를 말한다. 불교에서 부처님 사리를 신성시하며 사리함을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천주교에서도 예수님 성체함을 숭배하며 아름답게 치장했다. 천주교 국가의 귀족과 왕들은 성골함을 지키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 혹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는 표시 정도로 여겼다. 중세 유럽에서 "우리 집에 성체함 있어" 그랬다면 그 집은 왕을 배출하는 왕족이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성체함을 가지고 있다면 왕권을 이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왕족들은 마치 미래의 왕좌를 찾듯, 보물찾기를 하듯 성체를 찾아 다녔..

유럽사 2019.05.09

75. 중세 천주교 십자가에는 개가 있었다

교황이 짝지워주는대로 결혼을 했으니 지금도 모든 유럽 왕가는 친척이다. 국가 개념보다는 영지로 나눠지던 중세시대 제일 잘 나가던 친척은 지금으로 치면 프랑스, 이태리 왕가였다. 좀 떨어지는 친척은 스페인 반도, 영국, 독일이었다. 스페인 반도는 일부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국과 독일은 프랑스에 비교하면 시골 촌구석이었다. 프랑스, 이태리 사이에 낀 스위스는 지지리도 못 사는 친척이었다. 특히 넘어오기만 하면 준다는 이태리 왕위도 포기한 프랑스 왕이 있을 정도로 험난한 알프스 산간 지대에 사는 스위스인은 더 가난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그들은 치와와를 잡아먹은 아즈텍, 마야 문명 사람들처럼 알프스 눈 속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해주던 세인트버나드라도 잡아먹어야 했다.19세기 파리, 특히 프랑..

유럽사 2019.05.07

74.거대한 체스판 같던 중세유럽, 개고기는?

로마 교황청이 서유럽을 통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일종의 체스 게임이었다. 퀸(여왕)만 잡으면 되었다. 교황에게는 모든 카톨릭 국가(서유럽)의 황제 임명권이 있었다. 왕과 왕족의 결혼을 최종 허락하는 것도 교황이었다. 통치자의 결혼은 정치였다. 흉노 왕조 및 신라 황실에 왕족과 왕비족이 있던 것과 같은 시스템이다. 카톨릭(서유럽) 국가의 왕권을 장악한 교황청을 중심으로 거대한 피라미드 계급사회인 봉건제가 형성되었다. 교황청이 각 나라에 파견한 추기경은 왕을 견제하거나 혹은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음흉한 적은 추기경이다. 교황청의 지배를 받은 중세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것에 상징과 의미가 있었다. 그에 따라 이단이 결정되었다. 이단일 경우 불태워죽여 그 존재를 완전히 ..

유럽사 2019.05.04

73. 멀쩡한 이슬람 제국을 침략한 십자군 전쟁

서양에서 동양은 전통적으로 중국을 뜻했다. 중국의 비단은 이미 로마 시대부터 유럽에 팔렸다. 중국 비단과 물건은 중앙 아시아 육로와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다 인도를 알게 되었고 16세기 이후 일본도 알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이 만든 일본 도자기는 서양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당시 일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진출해 있었다. 비싼 중국 도자기 대신 값싼 일본 도자기를 수입해 팔던 업자들은 도자기를 싼 일본산 포장지에 주목했다. 풍속화를 그림으로 그려 판화로 찍어 팔던 우키요에였다. 현재 서양에서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17세기 이후 유럽에 유입된 우키요에에서 왔다. 우키요에 역시 조선인 화가가 관련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일본은 중국 상품의 ..

유럽사 2019.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