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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역사 독립 연구소

136. [요약] 항일 독립운동과 중국 공산혁명의 개고기

중국 공산당

인류 역사 상 개를 가축으로 먹은 문명은 중국 황하 문명이 유일하다. 이에 반해 나머지 3대 문명은 개를 사랑하고 숭배했다. 단군을 이은 한민족은 개 숭배 문명권에 속했지만 조선 시대 중화사대주의자들은 한민족이 황화 문명에 속한다고 믿었다. 

단군을 믿은 한민족은 개를 사랑하고 숭배한 증거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와 흉노는 같은 문화를 공유했으며 개가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고대 개고기 문명과 개 숭배 문명 중 한민족은 개 숭배 문명에 속했다>

이에 비해 같은 시기 중국 한족 왕조(진나라, 한나라 등)는 개고기와 개 피가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고구려, 흉노, 선비로 이어지는 기마 유목 민족이 한 편이었고 한나라 및 중국 한족 왕조가 한 편이었다. 

개 숭배 문명과 개고기 문명은 서로 대립관계였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은 고대 중국인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믿으며 복날이면 액막이를 하기 위해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개에 대한 인식 차이>

조상의 적을 조상으로 기리는 이런 현상은 조선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은 단군부터 고려까지 이어온 한민족의 정체성을 깡그리 바꿔 버렸다. 조선 후기 중국 대륙을 다스린 청왕조 역시 중국 한족의 정체성을 뒤흔들었다. 

조선과 청 왕조는 고대 개식용 문명과 개 숭배 문명 지역을 맞바꾼 것처럼 굴었다. 고대 중국인이 개고기를 먹은 중국을 다스린 청 왕조는 개 숭배 문화를 더 열심히 퍼트렸다.   

<조선과 청 고대 개고기 문명 개 숭배 문명이 뒤바뀜 >

개 숭배 문명권인 한반도를 지배한 조선 왕조는 한민족에게 개 식용 문화를 퍼트리려 갖은 노력을 했다. 조선은 고려를 포함한 모든 한국 왕조를 혐오했는데 특히 신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청 왕조를 증오했다. 


개를 사랑하고 숭배한 청 왕조에 대한 복수인지 조선을 개고기 문명권으로 편입시키려는 빅픽쳐였는지 모르겠지만 전보다 더 심하게 백성들에게 개고기 먹기를 강요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복날 개고기다. 


<민족 역사 속 유일하게 개 식용 정책을 편 조선>

그러나 이미 수 천년동안 단군(텡그리) 신앙으로 대변되는 알타이 샤먼을 믿은 한민족은 굶어죽을 지언정 개를 잡아먹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 말기까지 복날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조선에서 가장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제한되었다. 


<1907년까지 조선에서 개고기는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만 먹도록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모든 상황은 1910년 조선 왕조가 망해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1911년 청 왕조까지 멸망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청 왕조 멸망과 동시에 청 왕조가 강력하게 실시하던 개 도살금지법도 폐지되었다.  

청 왕조에 분노한 중국 사람들은 개가 마치 청 왕조 황제나 되는 것처럼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실제 페키니즈, 시추 등의 사자개는 청 황실을 상징했다. 


<도광제와 황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은 페키니즈, 청, 1800년>

청 왕조가 망하는 순간 황실 사람들은 청 황실견을 모두 죽여 정통성을 보존하려 했지만 영국 군인들 손에 의해 서양에 전해졌다. 구출된 몇 마리 황실 견 외의 모든 중국 개들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본격적으로 개고기 용 가축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개 도살을 청 왕조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개고기 먹는 관습을 잊은 중국인에게 개고기 먹기를 강요했다. 개고기는 중국 공산당의 상징이 되었다.  


청 왕조의 상징이던 소중한 개는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개고기용 가축으로 취급받았다. 하필 청 왕조에 반대하고 일제를 포함한 모든 서양 제국주의 국가도 개고기에 반해했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제국주의 국가

개는 청 왕조와 모든 제국주의 국가의 상징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중국 공산당은 고대 중국의 개고기 문명을 재건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청나라 요리집 아서원, 오마이뉴스, 2019년 2월 16일>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개고기를 반청 운동, 반 제국주의 운동,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중국 공산당식 사상을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개고기로 중국공산당과 한민족이이 하나된다는 의미였다. 


한반도는 중국 공산당의 속국이었다. 역사와 민족을 팔아넘기는 매국노 짓이라고? 공산주의자에서 역사와 민족은 중요하지 않다. 공산혁명에 필요하다면 역사 왜곡쯤 할 수도 있다. 개고기? 먹을 수도 있다. 이게 공산주의식 마인드다.  


<개고기 전통으로 보는 만주 독립운동과 조선족의 중국 공산화 논리>

한반도에 중국식 공산주의 사상이 침투되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조선인은 공산주의가 뭔지 잘 몰랐다. 서양 선진 문물 중 하나 정도로 이해한 지식인들도 많았다. 

당연히 한반도 개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고 일본 놈이 쳐들어오고 천지개벽하는 상황에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사회 각 분야에 침투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개고기를 먹으면서 말이다. 


<1921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개고기 역사 공정 >

공산혁명에 가담을 했는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1910년 이후 한반도에서 선교 활동을 보장받은 천주교와 개신교도 열심히 개고기를 먹었다. 

조선 시대까지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개고기를 거부한 조선의 백성들은 '서양 종교, '신문물' '교육, 의료', '독립운동' 등의 엄청난 대업에 압도되어 전통을 잊고 개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개고기 식용으로 보는 조선족의  625남침과 문화 침략 과정>

 

이렇게 해서 개고기로 고문당하며 조선 왕조에 항의한 동학 농민군은 복날 개고기를 먹은 것으로 역사가 왜곡되었다. 일부 가난한 사람만 먹던 개고기를 일본 학생이 놀리자 화를 내며 싸우다 동맹휴학까지 한 학생만세 운동의 의미도 퇴색되어 학생 운동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모조리 가져 갔다는 점이다. 한국 독립운동하면 조선족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만주의 독립운동 정신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중국 공산주의를 따른다는 의미다. 

132. 개 식용은 반청복명 운동, 중국 공산화 운동

조선

개고기는 중국 문화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청나라가 아니다. , 당 왕조 이전의 고대 중국과 명나라,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에는 1392년 건국된 조선도 포함된다

1392년 고려인은 조선인이 되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추종하며 순수 한족 중국 왕조를 조선에 재연하고자 했다. 우리 조상인 고려인이 조선인이 되었고 명나라 인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선 지배층은 패닉에 빠졌다.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개에 대한 기본 인식 차이>

조선 건국 이념 상 명나라와 함께 망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망하는 대신 조선은 이중정책을 썼다. 청나라에게는 복종한다고 약속해놓고 조선 안에서는 배신자를 색출하며 내부 단속을 했다. 그래서 광해군이 제거되었고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이 몰살되었다

진짜 명나라 대신 청나라를 택하는 순간 조선 시대 지배층은 즉시 제거되었다그 결과 모든 조선 시대 지배층은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도 오직 명나라만 추종하게 되었다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은 후에도 명나라 사랑은 변치 않았다


<비밀 명나라 복원 운동을 하던 조선의 왕은 청 나라 사신이 오면 성 밖까지 나가 마중을 해야 했다, 18세기>

일제 황국 신민이 된 조선인은 여전히 몰래 마지막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 후기 이후 형성된 기이한 소중화주의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자 중국 공산당 추종으로 이어졌다. 왜 그런가?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중국 대륙에서는 진짜 한족 중국을 복원하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진짜 중국이 명나라라고 믿은 중국인은 국민당이 되었고 중국 공산당이라고 믿은 사람들은 공산당이 되었다


<아편전쟁에서 청 왕조가 패배하기 전까지 티베트탄 스패니얼 계열의 사자 개는 오직 청 황족만 만지고 볼 수 있었다, 1899년>

이 시기 황국 신민이 된 조선인 중 일제에 의해 독립해 명나라인이 될 것인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조선 독립운동 파벌이 형성되었다.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각 지역 군벌이든 너도나도 개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도 개고기를 먹었다개고기를 먹는 것은 명나라 복원 운동이자 청나라 반대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 땅에도 해당되었다


<민족 역사 속 유일하게 개 식용 정책을 편 조선>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도 개를 죽이며 명나라를 부활시키려는 세력이 있었다조선 후기 지배층이었다조선 후기에도 개고기를 먹는 것은 명나라 부흥운동이자 청나라 반대 운동이었다

힘으로 청 왕조에 굴복해 복종은 하지만 속마음까지는 내주지 않겠다는 것이 조선 후기 지배충들이 가진 기본 이념이었다. 송시열이 주장한 소중화주의는 결국 반청 운동의 일환이었다


<청 나라에서 사자개는 오직 황족만 키울 수 있었다,  도자기, 청, 17~18세기>

이런 신념은 청 왕조가 다스리는 중국 대륙 안에 숨어 암약하던 명나라 복원 세력과 뜻을 같이 했다. 청 왕조에게 있어 조선은 반정부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다명나라를 부흥시키자는 중국 내 반청 세력과 조선의 반청 세력은 개를 죽였다

? 청 왕조가 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만약 청 왕조가 개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개 도살 금지법 같은 걸 만들지 않았다면 중국과 한국에 개고기 식용 악습은 농업혁명과 더불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청 왕조를 증오하며 개고기를 군량미로 사용한 중국 공산당 군대, 1930년>

하지만 하필 청 왕조는 개를 유독 사랑했다. 그것이 개를 둘러싼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청 시조인 누르하치의 목숨을 구해준 개는 모든 만주족에게 신성했다. 청 왕조에는 황족만 만지고 볼 수 있는 특별한 개가 있었다

그 개는 페키니즈, 시추, 라사압소로 불리는 사자개다. 페키니즈, 시추, 라사압소는 티베트 개다. 티베트, 청 왕조의 고향인 만주, 위그르, 몽골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 개를 죽이는 것은 지독한 금기다


<티베트와 위그르가 청나라에 복속된 이유는 같은 기마 유목 민족이기 때문>

지금도 오직 중국 한족만 이 지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 티베트, 만주, 위그르는 모두 청 왕조로 하나되어 있었다. 청 왕조는 이들 국가의 맏형 격이었다. 맏형인 청왕조가 중국 대륙을 다스리니 티베트, 위그르, 만주, 몽골도 형의 지배력 아래 들어가 함께, 파트너 자격으로 중국을 다스린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같은 문화와 종교를 가졌다는 동질성에 의해 가능했다. 티베트, 만주, 위그르, 몽골, 청은 같은 편이었고 개를 사랑했다이에 반해 중국 한족은 적이자 개고기 먹는 인간들이었다. 청 왕조는 다수의 적인 중국 한족을 소수의 만주족으로 다스렸다


<몽골의 샤먼 의식에 신성한 동물로 등장하는 몽골 전통개는 삽살개와 유전자가 99.9%동일하다>

티베트, 위그르, 몽골 등 다른 유목 왕조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개를 신성시한다 왕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들은 청 왕조의 동료였다. 개를 죽이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로 사랑한 청 왕조에 반대하려면? 개를 죽이면 되었다

개고기를 금지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게 반대한 586운동권들이 행한 방법과 같은 방법이었다. 20 세기 한국과 달리 청 왕조 시대 중국에서 개를 죽이다 걸리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고 불교와 도교의 영향으로 개고기를 먹는 관습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청 황제의 명으로 서양화가가 그린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개인 티베트탄 마스티프>

그런데 청 반대 세력은 조선 땅에도 있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중국 땅에서는 못 죽이는 개를 조선에서는 마음껏 죽일 수 있었다병자호란 후 조선 양반들은 개를 죽임으로써 청 왕조에 엿을 먹이고 굶어죽는 대중을 선동하는 치졸한 방법을 썼다

양반들이 (지들은 먹지도 않으면서) 글로 써서 우아하게 개를 죽여 개고기를 약과 식량으로 먹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실행했다. 이렇개 해서 조선의 개고기 역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개고기로 보는 조선 양반과 백성의 민족 의식 차이>

실제로 조선백성들이 고등어 구워 먹듯 개를 많이 먹어서 역사가 된 것이 아니다. 전직 고려인인 조선 백성은 한민족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한민족의 전통에 의하면 개는 먹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동물이다

티베트, 만주, 위그르, 몽골과 마찬가지로 한민족 역시 개가 죽음과 관련된 영물이라고 믿었다백성들의 생활과는 달리 조선 후기 지배층은 그동안 중국에서 출판된 고대 중국 의학서를 죄다 긁어모아 출판했고 이것이 조선의 역사로 둔갑했다


<김일성 황구라는 새 견종까지 만들어 낸 북한이 믿은 『동의보감』의 원 저자인 신농>

알곡인지 쭉정인지 가리지 않고 조선시대 출판된 책은 모두 조선의 역사로 취급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역사 인식 수준이다. , 중국 역사책이 조선 역사책이고 중국 역사가 조선 역사다

이렇게 해서 중국과 일체화된 조선의 개고기 역사는 만들어졌고 조선족과 북한의 김일성은 개고기가 보약이라고 믿게 되었다. 중국 조선족과 북한의 개고기 역사 인식은 1997년 이후 한국에 전파되어 오늘날 우리가 믿는 개고기 전통설과 개고기 만병통치설이 되었다. , 한국 개고기 문제의 원흉은 중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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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왜 조선족은 개고기를 먹게 되었나?(1)

중국 공산당

조선족은 현재 중국에서 개고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언제부터 개고기를 먹게 되었는지, 조선족과 한국의 개고기 식용 문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1. 청 왕조에는 개 도살 금지법이 있었다. ? 청 시조 누르하치의 생명의 은인이 개였다.

<도광제(1820~1850년)의 정귀비와 육황자, 청>

2. 중국 역사 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 만주족은 채 백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원만 만주에 남겨두고 중국 대륙으로 모두 이동해 중국을 다스렸다.

3. 청 왕조의 성지인 만주는 사람이 살지 않는 보호 구역이 되었다만주 출입 금지가 풀린 것은 1911년 청 왕조가 망한 후였다그전까지 만주는 허허벌판이었다.

<조선의 고종, 청의 서태후, 일본의 메이지 천황, 1905~1909년>

4.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청나라가 조선의 지배력을 상실했다. 일부 조선인 독립문을 세워 일제의 승리를 축하했다.


5. 1910년 한·일병합으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인은 조선 계 일본인,  일본인이 되었다.

<독립문, 조선, 1904년>

 

6. 1911년 청 왕조 멸망하자 영국은 청 황실 개를 납치해 품종개량을 해서 지금의 시추와 페키니즈, 라사압소로 만들었다.  만주족도 고향인 만주로 돌아갔지만 보호자(지배층)가 없었다

 

7. 만주족과 조선인(주로 독립운동가), 조선 계 일본인(조선인), 일본인(주로 독립군 잡는 순사),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 등이 섞여 있는 만주는 무법천지였고 언제든 갈등이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 살 무렵 푸이의 사진, 청, 1909년>


8. 조선의 독립운동가는 만주를 거점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 했다. 일제를 피해 혹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조선백성들 중 일부도 만주로 이동했다.


9. 청 멸망 후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싸우는 내전이 발생했다만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만주는 여전히 무법천지였다.

<도광제와 황실 가족들과 노는 페키니즈, 청, 1899년 11월 30일>


10. 중국공산당, 국민당 모두 청 왕조를 증오했다. 그래서인지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개고기를 먹었다모택동의 붉은 군대(공산당)의 경우 부족한 군량미 대신 먹였을 가능이 높다. 얘네들은 중국 내륙 산악 지대로 쫓겨가 아주 생고생을 하며 국민당과 싸웠다. 자금과 군수품이 풍부한 국민당 군대까지 개고기를 먹은 건 청 왕조에 대한 반발심이 크다.


11. ·송 이후 이후 중국 대륙에서 개고기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 많은 중국인 중 개고기는 거지나 먹는 음식이었지만 청 왕조 멸망을 계기로 중국에서 개고기 식용 문화가 되살아났다.  

<대만 원주민의 사냥 모습, 1750년>

12. 중국 공산당에 패해 중국에서 쫓겨나 정착한 대만을 점령한 중국 국민당은 대만에서도 개고기를 먹었다. 국민당이 학살한 대만 원주민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대만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것은 국민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후이다. 대만은 현재 아주 강력한 개고기 금지법을 실행하고 있다

13. 1931 여전히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는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일제가 일으킨 자작극이 남만주 철도 사변이다. 일제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계기로 만주 지역을 점령한다

<남만주 철도 사태를 조사하는 일본 전문가들, 1931년 9월>

 
14. 만주는 더럽게 춥다. 추위에 약한 일본군이 만주에서 견딜 수 있도록 일본군은  방한용 군복을 만들어야 했다일제는 조선 개의 가죽을 이용하기로 한다. 견피주식회사를 통해 묶어 놓은 개와 진돗개 외의 조선의 모든 개는 학살되었다. 이 때부터 한국인에게는 개를 묶어 놓아야 살릴 수 있다는 트라우마가 생긴다.

15. 신라시대 왕족만 키울 수 있던 신성한 삽살개는 만주 일본군 군복이 되어 멸종되었다

<일제에 의해 도살되기 직전의 조선 토종 개, 1941년>

16. 1932년 청 왕조 마지막 황제 푸이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일제가 만주에 만주국을 세웠다괴뢰국이라는 비웃음을 당했지만 어쨌든 법적으로 만주는 청 황실 소유였고 볶아 먹든 지져먹든 푸이 마음이었다. 이때부터 만주인은 일본인이었고 일본인은 조선인이었다. , 만주족 = 일본인 = 조선인 이 된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들과 싸웠다.


17.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제는 만주국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대규모로 이주시켰다. 조선인은 일본인이었으니 공식적으로 만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이다. 주로 조선 계 일본인이 조선족의 조상이다.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과 개, 1920년>


18. 조선족 즉, 일제 시대 조선계 일본인은 왜 개고기를 먹게 되었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평안도나 황해도 지역 조선인이 만주로 많이 이동했다. 열명에 한 명이 굶어죽던 조선 시대에도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으로 악명높은 이 지역은 양반조차 개가죽으로 갓을 만들어 쓴다고 조롱을 당했다. 조선에서도 가장 개고기 친화적인 지역이기는 했다.

19. 하지만 만주의 조선족이 본격적으로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중국공산당과 관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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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조선 공주, 청 황실의 정비가 되다

조선

효종이 송시열의 바지사장이 된 이유는 조카 대신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약점이 많았다. 그래서 효종이 죽고 대비가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피터지며 싸워야 했다.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청 왕조 3대 황제가 될 뻔한 섭정 왕 도르곤이 돌연사 하지만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앉은 개를 새긴 인장,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700~550년>

17세기 망하는 대신 운 좋게 살아난 조선 왕조에게 가장 거슬리는 상대는 역시 청나라였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는 개고기로 대변되는 정체성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개가 목숨을 살려줘 훗날 청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과 같은 이야기 구조다. 신성한 개가 하늘이 정한 새 지도자(황제)를 선택했다는 소리다.

<당 황실 여인의 신발을 물어뜯는 랩독(소매 개), 8세기>

누르하치는 개를 죽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개를 사랑했다. 신발 물어뜯은 당나라 황실 개와 마찬가지로 청 황실에도 황족만 만질 수 있는 사자개(페키니즈, 시추, 라사압소 등)가 있었다.

황족 외에 이 개들을 보는 사람은 죽였다. 청나라에서 개를 죽이는 건 불법이었다. 개고기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다. 똑같이 신농이 쓴 『본초』에서 시작된 한의학이었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판 『신농본초』에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개고기 조리법을 쓴 안동 장 씨의 음식디미방, 조선, 1670년>

"고대에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먹는 것조차 부끄러워진 개고기" 라고 말이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세손들이 줄줄이 죽은 후 효종으로 즉위한 전직 봉림대군은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했다.

특히 『본초』의 99%를 베낀 『동의보감』에 의하면 개고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이렇게 다른 조선과 청이었지만 알고보면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2대 황제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이 섭정을 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초상

누르하치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자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는 도르곤은 효종에게 조선 공주를 자신의 정비로 맞고 싶다는 청혼을 했다. 효종은 한나라 유방이 양녀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 것처럼 신하의 딸을 양녀 삼아 도르곤에게 보냈다.

한나라 공주는 중전(좌부인)이 될 수 없었다. 아들도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엄마가 왕비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효종의 양녀는 도르곤의 정실(적복진)이 되었다. 적복진이 되었다는 것은 아들이 정식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다.

<건륭제 황후의 초상, 청, 19세기 >

또 역대 청나라 황후와 같이 이런 초상화를 그릴 자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모든 기마 유목 왕조에게는 정실부인이 될 수 있는 왕비 부족이 있었다.

‘황제의 딸’이나 ‘미월전’ 같은 청 왕조 시대 드라마를 보면 황제는 끊임없이 수녀를 선발해 후궁을 채워 넣는다. 그 많은 수녀들이 모두 왕비 부족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여인들이었다.

 

청 왕조 시대 적복진(황후)이 된다는 것은 황후 부족이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었다. 도르곤은 조선 공주가 데려간 궁녀까지 측복진(후궁의 품계)으로 삼았다. 

아내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딱 뛸 일이겠지만 황실 내명부의 권력 투쟁 관점에서 본다면 정실의 시녀를 후궁으로 삼는 건 정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배려였다. 같은 부족의 두 여자가 한 편을 먹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냥감을 모는 사냥 개를 그린 호렵도, 청, 19세기>

그런데 암살을 당했는지 진짜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죽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도르곤은 섭정이 된 후 얼마 후 요절했다. 르곤이 장수했다면 17세기 이후 조선에는 고려 말 기황후 일족을 능가하는 새로운 권력층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와 조선 지배층에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도르곤이 죽으면서 조선 공주도 청 황실에서 찬밥이 되었고 조선에 돌아온 후 환향녀 취급을 받으며 아주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사자 개를 조각한 수정 인장, 청, 17세기>

누르하치가 처음 후금을 통일하고 조선에  통교를 청했을 때는 형제의 나라로 외교를 맺자고 했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후 외교 관계는 군신 관계로 격하되었다. 

 
명 왕조와 청 왕조의 조공관계는 분명히 다르다. 명 왕조는 조공 관계의 나라를 형제의 관계니, 군신의 관계니 하고 나누지 않았다. 똑같은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였다.

 

<인장 모양 은제 사자 개 조각상, 청  17세기> 

청 왕조가 조공관계에서 형제의 나라라고 한 것은 기마 유목 왕조 파트너라는 의미였다. 조선도 몽골, 티베트, 위그르와 같이 기마 유목 왕조 동료로 끼어준다는 소리다.

청이 위그르를 응징한 것은 일종의 서열 싸움 같은 거였다. 이런 역학 관계를 모른 인조와 조선 지배층은 오랑캐와 강제로 형제가 될 수는 없다며 전쟁을 불사했다.

<자금성으로 돌아오는 강희제 행렬, 청, 1689>

조선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고려조차 원이 사나운 공주들을 파견해 지배했다고 억울해했으니 조선이 기마 유목 왕조의 외교 관계에 무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지한 조선을 상대로 청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배려를 했다. 병자호란 후 포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사실 상 청 황실은 종친 대접을 했다. 조선 공주는 청 황실 섭정의 정실이 되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조선, 1745-1806>

만주족의 경우 남자는 얼마든지 첩을 둘 수 있었지만 정실은 언제나 만주족이었다. 만주족이 아니면 만주족과 동일한 수준의 부족 여인이어야 했다. 군신관계로 격하되었을지언정 청 왕조에게 조선 왕실이 그랬던 것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청 황실이 신라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한민족과 동질성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신라에서 통일신라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졌으니 결국 한 뿌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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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양귀비와 신발 물어뜯는 당나라 황실 개

중국 속 유목사

신라와 밀접한 관계인 당나라에는 개 전용 사원이 있었다고 했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양귀비일 것이다. 지난 갑자기 실종이 되어 세계의 관심을 받은 판빙빙이 주연한 양귀비를 보면 궁정 여인이 나오는 장면은 쇄골 아래부터 화면이 잘려있다


제작진은 나름 충실하게 당나라 시대 의복을 고증 했는데 결과물이 너무 외설스러워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거액을 투자한 제작진 측은 화면에서 여성의 가슴 바로 위를 자르는 방법을 택했다

<바둑 두는 당나라 미인, 7~10세기>

따지고 보면 가녀린 판빙빙 몸매 자체가 고증 실패다당나라 시대 여성 복식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항아리처럼 둥근 몸매와 터질듯이 풍만한 가슴, 통통한 볼을 가진 여인이 미인이었다

당 대 최고 미인 양귀비 자태는 아마 많이 포동포동 했 것이다말타는 양귀비 그림만 봐도 육중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진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송 시대 그려진 당 황실 연회 그림을 보자.

<양귀비와 현종의 연애를 그린 오대 혹은 북송 시대 그림 10~12세기 >

다른 궁정 여인들은 사랑이 이뤄지길 기원하며 칠월칠석 연회를 즐기고 있는데 양귀비로 추정되는 여주인은 자고 있다. 저 위로 살짝 문을 열어주는 시종들이 보인다. 

한밤중에 현종이 몰래 찾아와 자는 양귀비를 시녀가 깨우는 장면이다. 이렇게 역사에 남을 만큼 티 나게 물고 빨던 현종은 반란군을 피해 도망치던 중에 제 손으로 양귀비를 죽였다

<말 타는 양귀비와 지켜보는 현종, 13세기>

호위부대가 저 여자 안 죽이면 당신 안 데려간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755 도망치던 현종 행렬 그림을 보면 행렬 뒤쪽에 죽은 모습의 현종이 보인다. 방금 양귀비를 죽인 현종이다

행렬 앞에는 주인 없이 빈 안장을 태운 말 한 마리가 있다. 양귀비가 타던 말이다. 호위부대가 결사거부할 만큼 양귀비는 현종 말년에 나라를 망하게 요물로 욕을 먹었다.  

<755년 피난길에 양귀비를 죽이고 도망치는 현종,  남송(1127–1279)>

그런데 정말 나라를 망칠 만큼 사랑했는지 의심스럽다. 그랬다면 가차없이 죽이는 대신 호위부대를 죽이든지(불가능) 양귀비와 같이 자살을 했을 것 같다. 또 만약 그랬다 해도 당나라가 망한 건 양귀비 탓이 아니다

책임은 오너가 지는 법이다. 현종은 무능했고 뒷배인 위그르가 약해지자 국방과 경제가 무너지면서 나라가 망했다신라 선덕여왕에게 나비없는 모란 꽃 그림을 보내 모욕했다는 태종 이세민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소용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그르와 왕조는 쌍둥이 같은 관계였다당나라 군사는 위그르 기마 부대가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도 위그르 군대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경제는 위그르와 한팀인 소그드 상인이 맡았다. 위그르의 거점은 당시 실크로드를 장악한 쿠차왕국과 호탄 왕국이었다. 즉, 당나라의 군사와 경제 거점이 위그르 제국의 수도였다. 당나라는 시작부터 위그르 돌궐 기마부대 도움을 받았다

<실크로드 쿠차와 호탄 왕국에서 활약한 귀족 기마 무사, 6~7세기)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위그르는  왕조를 도와 줬을까? 학자들은 건국 초기 당 황실 세력이 투르크 계 유목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 왕조에는 황족만 키울 수 있던 사자개가 있었다. 8세기 자유로운 모습의 당 황실 여인을 보자.  

풍만한 자태에 편안한 모습이다. 한 쪽 신발을 벗어 무릎에 걸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벗어 놓은 신발 옆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고 강아지는 주인 신발을 신나게 물어뜯고 있다. 1300년 전에도 개는 주인 신발 물어 뜯기를 좋아했나 보다. 

<편안한 자세로 앉은 황실 여인과 개, 8세기>

이런 작은 개를 소매 속에 넣을 수 있는 개라 하여 랩독(Lapdog : 소매 개)이라 한다. 당나라 시대 황실 여인 소매 속에서 자란 이 개들은 페키니즈로 추정되는 사자개다. 사자개는 유목 왕조들 사이에서 마치 옥새와 같다 했다. 

당 건국 세력이 사자개를 키울 수 있던 유목 왕족인 것이다.  늑대 머리 깃발 휘날리던 돌궐이 망하고 역시 늑대머리 깃발 휘날리던 위그르가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자 당나라도 위그르 밑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당 황실 여인의 신발을 물어뜯는 강아지,  8세기>

변한 것은 종교 외에 거의 없었다현종 들어 당나라는 망하기 직전까지 적이 있다. 때마다 위구르 기마 부대가 출동해 구사일생 살아났다. 대가는 2 필의 비단과 당나라 공주였다.  

시기 강대국이던 티베트가 당나라 장안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위그르 기마 부대가 출동해 구해주었다. 대가는 역시 당나라 공주와 비단이었다 밖에도 위그르는 견마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고창 왕국 지역을 지나는 당나라 상인 행진 7~8세기  추정>

견마무역은 중국 비단과 초원의 말을 교환하는 무역이다. 장사를 누가 했다? 소그드 상인. 소그드 상인은 누구다? 마니교도. 위그르 국교는 뭐다? 마니교마니교의 근거지는 어디다? 위그르 제국인 쿠차와 호탄. 

당나라 비단은 거미줄처럼 촘촘한 소그드 유통 망을 타고 중앙아시아와 유럽(비잔틴 제국)으로 팔려나갔다 왕조의 모든 국가 시스템이 위그르, 소그드와 얽혀있었다하나가 무너졌고 나머지도 우르르 망했을 뿐이다.  양귀비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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