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무덤 벽화 속 무사와 고구려 무덤 벽화 속 무사가 쌍둥이처럼 닮은 이유를 찾지 못해 당황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답은 간단하다. 선비족과 고구려 지배층은 같은 유목 문화를 공유했다. 유목 문화는 텡그리 신앙이며 늑대 신앙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수렵도 속 기마 무사. 5세기>
알타이 문화권에서는 고대부터 늑대를 신으로 믿었다. 기원 전부터 중국 한족은 늑대가 흉노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인에게 늑대는 적이었고 고 북방 유목민에게는 신이었다. 늑대 신앙은 텡그리 신앙, 즉 알타이 샤먼이었다.
알타이 문화권과 페르시아 문화권의 공통 지역에는 칸 텡그리 산이 있다. 칸 텡그리 봉우리는 카자흐스탄, 신장 위그르, 몽골, 키르기스스탄에 걸쳐 있다. 칸 텡그리 산봉우리 인접 지역은 스키타이, 흉노, 선비, 고구려, 돌궐,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이 활동한 지역이기도 하다.
<선비족 기마 무사>
텡그리 신앙, 즉 알타이 샤먼을 믿은 이들은 인종과 언어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같았다. 고구려와 흉노, 선비가 같은 이유다. 선비족 왕조가 중국 대륙에 세운 북제 왕조 유물인 용 장식은 기원전 6세기 경 스키타이 유물과 같은 양식이다.
기원전 2세기 경 우리나라 삼한과 낙랑지역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는 흉노의 금제 허리띠와 같다. 왜? 지배층이 같은 문화를 공유한 북방기마유목 왕조이기때문이다. 선비족과 고구려는 벽화 속 기마 무사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 연가7년명여래입상.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539년>
우리나라 국보인 고구려 불상 연가7년명여래입상은 선비족이 중국을 지배해 세운 북위의 불상과 매우 흡사하다. 연가7년명여래입상은 불상 뒷면 광배에 연가 7년이라고 새겨진 제작 연대로 인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구려 연가 7년은 539년이다. 백제의 불상 역시 선비족 북위의 불상과 닮았다.
<선비 북위 왕조 불상. 386~534>
우리나라 국보인 백제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3호는 선비족 왕조인 북위에서 만들어진 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았다. 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은 6세기에서 7세기 경 제작되었다. 선비족의 반가사유상은 6세기 초반에 제작되었다.
우리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은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한 점 있다.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일본 반가사유상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하필 한반도에만 존재하던 적송이었다. 그러자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쾌재를 불렀다.
<백제. 금동여래반가사유상 83호. 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 반가사유상이 한국 산이냐, 일본 산이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왜 고구려와 선비 왕조, 백제와 선비 왕조, 백제와 일본의 불상들이 이렇게 닮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3호는 생동감 있는 손가락과 발가락 표현으로도 유명하다.
발견 당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3호는 왼쪽 발이 손상된 상태였다. 발은 대충 만들어 흉내를 냈어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발가락을 도저히 재연할 수 없어 뭉툭한 발가락이 되고 말았다. 제작 기법이 단절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손가락 제작 기법을 선비족 유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비 북제 왕조. 불상 일부인 손. 550–560>
손만 놓고 보면 같은 불상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중국 선비족 왕조, 고구려, 백제, 일본이 같은 시기 같은 발전시킨 불상 양식이 거의 같은 시기 모두 사라졌다. 마치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문명을 가진 무리가 확 치고 들어왔다 연기처럼 사라진 중앙아시아 역사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다.
선비족 왕조의 여래입상과 비슷한 양식의 불상은 11세기 경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한 눈에 보아도 조악하기 그지없다. 백제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비슷한 수준의 불상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통일신라의 석불, 고려의 철불은 장엄하나 섬세하지 않다.
<선비 북위 왕조. 반가사유상. 6세기 초>
이처럼 불교 유물을 통해 선비, 고구려, 백제, 일본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비족과 고구려는 한 형제와 같이 닮았으니 선비족 왕조 유물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선비족 왕조는 불교가 국교였다.
매 사냥을 했으며 페르시아 개를 신성하게 여겼다. 왕가의 무덤은 신성한 개가 지켰다. 고구려 인구의 3분의 1이나 되었다는 대간은 중국 측 기록처럼 놀고 먹는 백수가 아니라 기마 무사였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 그려진 개는 수호신이다. 이런 고구려가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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