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3

116. 18세기 고양이 대학살과 개소주 이황

조선 시대 양반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 굶주린 노비는 개고기를 먹었다. 인공위성 파편에 맞아 죽을 확률로 말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일부 한국인들이 왜곡하여 개고기 식용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복날, 가난한 농민, 개고기’는 선한 전통이고 ‘부자, 양반, 친일파, 독재자’는 악이라는 단순 무식한 대립 구도로 몬 것이다. 복날 개고기 식용을 통해 가난한 노비(노동자, 프롤레테리아)와 양반(부자, 부르주아)의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조선 시대 개를 때려잡아 개고기를 먹은 것은 개를 조상신으로 여긴 양반에 대한 증오의 표출이다. 이는 개를 청 왕조의 상징으로 여겨 개를 때려잡아 먹는 고대 중국 식습관을 되살린 중국공산당과 같은 논리다. 또한 18세기 프랑스 방직공장에서 일어난 고양이 대학..

조선 2019.08.24

113. 복날 개고기 먹은 노비가 독립운동을?

모 명문가가 소유한 평창동 고택에는 사람 손으로 판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 아니라 진짜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아주 큰 호수였다고 했다. 그럼 혹시 일제 식 신식 건물이었냐고 물었더니 99간 전통 한옥이었다고 했다. 조선 시대부터 그 댁에서는 대대로 호수에 배를 띄우고 탁 트인 평창동 전망을 즐겼던 것이다. 말 그대로 신선놀음이다. 또 다른 명문가에서는 일제시대에 북해도에서 유제품만 공수해 오던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북해도까지 배로 드나들던 그 직원의 유일한 업무는 우유와 치즈를 떨어뜨리지 않고 사 오는 일이었다. 대략 통학 열차에서 일본 학생과 한국 학생이 개고기를 두고 싸움을 하다 전국 동맹학생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일반 백성들은 꽁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이었다. 가장 가난하고..

조선 2019.08.17

112. 개는 조상신이니 먹지 마! 조선 시대 양반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한양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계급, 직종 별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살았다.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 주위 중 물 좋고 경치 좋은 구역은 잘 나가는 권문세가들이 살았다. 지금의 평창동은 조선 시대에도 특권층이 모여 살던 구역이었다. 배산임수 조건에 맞는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양반 중에서도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남산 등지에서 살았다. 남산골샌님이란 말이 생긴 이유도 지지리 가난한데 일은 안 하고 공자 왈 맹자 왈 꼬장꼬장 따지기나 하는 양반들이 남산골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순간 양반이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허름한 갓을 쓰고 책을 읽어야 했다. 양반이 돈을 벌 ..

조선 2019.08.15

101. 개고기는 조선 전통 아니야! 학생 만세운동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녹두꽃’은 동학을 배경으로 했다. 동학 운동을 하며 ‘죽창가’를 불렀다는 동학교도들은 관군에게 잡혀 개고기를 먹는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다.죽창가를 부른 동학교도들은 개고기를 반대했다는 의미다. 동학에서는 개고기를 절대 금지했다. 그러나 현재 죽창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동학의 개고기 반대 운동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죽창가를 부른 동학교도만 개고기를 금지했느냐? 일제 시대 학생 만세 운동의 계기가 개고기반대였다는 사실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단순히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에 분노한 한국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 동맹 휴학으로 번졌다고만 알려져 있다. 일제 시대 곡창 지대인 전라도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통학 기차는 일본인 ..

조선 2019.07.20

52. 개고기 먹인 조선, 마녀 사냥한 유럽

조선 지배층은 오랑캐 청나라의 신하 나라가 된 것이 수치라며 자살을 한다는 둥 난리를 쳤다. 그러나 청나라 사신이 오면 왕이 버선발로 달려가 맞은 것이 조선의 현실이었다. 이런 표리부동 한 짓을 한 이유는 단 하나다. 체제 유지. 공자의 중국을 이어 받았다며 고려 이전의 역사를 지워버린 조선은 중국이 없다면 존재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왕가끼리 통혼을 하자는 등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청과 거리를 두며 명나라 황제 제사라도 몰래 지내야 했다. 잘못했다가는 애써 지워버린 고려 이전의 한민족의 역사가 되살아날 판이었다. 더 이상은 못 살겠다, 반항하는 백성들을 찍어 누르는 수단으로도 소중화주의는 쓸만했다. 명나라까지 망했으니 이제 순수한 중국은 조선 하나 남았다는 것이 송시열이 주장한 소중화주의다. 소중화주의로..

조선 2019.03.14

51. 조선 공주, 청 황실의 정비가 되다

효종이 송시열의 바지사장이 된 이유는 조카 대신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약점이 많았다. 그래서 효종이 죽고 대비가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피터지며 싸워야 했다.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청 왕조 3대 황제가 될 뻔한 섭정 왕 도르곤이 돌연사 하지만 않았다면 조선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17세기 망하는 대신 운 좋게 살아난 조선 왕조에게 가장 거슬리는 상대는 역시 청나라였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는 개고기로 대변되는 정체성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개가 목숨을 살려줘 훗날 청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과 같은 이야기 구조다. 신성한 개가 하늘이 정한 새 지도자..

조선 2019.03.12

50. 소현세자는 왜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나?

청나라는 인조를 생포해 머리를 찧게 하는 항복을 받는 선에서 병자호란을 끝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로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청나라가 다른 전쟁에서 한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초원의 패권을 다툴 당시 몽골족 남자는 설령 아기일지라도 죽였다. 죽일 때도 그냥 안 죽였다. 나무 말에 앉힌 후 정수리부터 정을 박아 죽였다. 적에게 공포심을 주는 사형 퍼포먼스다. 반역을 꾀한 위그르를 응징하고 끌고 온 포로들 행진을 보면 당시 청 왕조가 포로취급을 어떻게 했는지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포로들을 동물원 구경거리로 삼았다. 인조는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 원래대로라면 인조도 청나라로 끌려가 저 꼴을 당했어야 했다. 심지어 위그르는 저 굴욕을 당하고 2년 뒤, 건륭제에..

조선 2019.03.09

48. 중국 조선 총독부 조선 왕조, 개고기는 전통?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사실 고구려 국가체제가 그대로 이어진 건 발해다. 어쨌든 이 주장대로라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중국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이해가 가는가? 왜 뜬금없이 고려 다음에 중국인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됐는지? 중국인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세운 것이 조선 왕조다. 중국의 조선 식민지 총독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명나라가 부모 나라이며 공자가 신이고 개고기가 전통 음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지배층인 양반과 백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선 지배층은 예를 행하는 곳이 바로 중국이며 조선 땅은 중국인에게 가르침을 받아 예를 아는 곳이라고 했다. 즉, 자기들은 ..

조선 2019.03.05

46. 킹덤 속 사람들은 왜 인육을 먹었나?

명나라 도교를 수입한 조선은 개고기를 먹으라는 공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랐다. 부모의 나라였지만 공자를 신으로 모신 입장에서 개고기 문제 만큼은 명나라가 틀린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틀린 건 조선이었다. 춘추전국 시대 선비는 평민과 귀족 사이에 낀 중인 같은 신분이었다. 그런 선비가 붕당을 만드는 건 처형을 당할 만큼 큰 중죄였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선비가 당을 만든 예는 없었다. 선비가 권력의 장악한 예가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선 역시 16세기 명종 대까지만 해도 사사로이 당을 만들면 처형을 당했다. 명종의 조카 중에서도 어미가 천한 선조가 왕이 되면서 그 금기가 깨졌다. 조선은 유교 역사 상 최초로 선비질로 붕당을 만든 나라였다. 남송의 '절함도'는 왕에게 충언을 올리는 강직한 충신을 그..

조선 2019.02.28

45. 공자로 개혁? 초장부터 망조 든 조선

조선 양반들은 왜 멀쩡한 도로를 갈아엎고 가게 문을 닫게 했을까? 왜 뜬금없이 청동기 시대 공자를 물고 빨았을까? 미쳐서? 이기적이어서? 나름 치밀한 정치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지랭이 천 것 한나라 유방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공자의 유교를 국가 정책으로 만들었다. 조선도 빈약한 통치 기반을 대체할 새 시스템이 필요했고 2000년 전 학문인 유교를 새 국가 시스템으로 삼았다. 그게 조선의 비극이었다. 이동수단만 봐도 1500년 전 고구려 수레가 조선 가마보다는 발달된 것처럼 보인다. 2000년 묵은 학설로 개혁을 하고자 했으니 초장부터 망조가 든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동·서양을 불문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과 괴리된 삶을 산다. 신라 땅 어느 구석에 살던 아낙은 신라 성골 여인이 사용한 황금 귀..

조선 2019.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