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개고기 15

206. (인터뷰 기사) 개 도축장 철거 2년…국내 개고기 음식점, 어디서 유통된 고기 파나

초복, 중복이 지났는데 어째 조용~~하네요. 작년까지의 그 떠들썩한 육견협회의 개잡이 놀음이 없어요. 그러고보니 동물보호단체도 다른 해와 다르게 조용했던 거 같습니다. 아마 그거겠죠.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행사를 하긴 했는데 언론에서 실어주고 안 실어주고의 차이. 그런 의미에서 올해 복날을 앞두고 에포크타임즈 코리아에서 뜻 깊은 기사를 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뜻 깊은 기사였습니다.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나온 개고기에 대한 다른 시각이거든요. 사실 제가 기사 내달라고 애걸복걸 하기는 했어요. 이름도 막 지워달라고 징징 거리고. 제가 글은 되게 싸납게 써도 실은 되게 징징거리는 타입입니다. 신비주의를 고수해야 해요. 제 주장의 요점은 이겁니다. 개고기는 우리 문화가 아니다. 중국공..

개고기 문제 2020.08.04

137. [요약] 한국전쟁 후 좌파의 개고기 적화 운동

현재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먹는 국가는 한국이다. 그 한국인의 대표는 조선족이다. 재외동포법으로 인해 조선족이 모든 한국인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족은 중국인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중국인이 되었다. 황당하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그렇다. 중국인인 조선족이 한국인의 대표가 되는 근현대사의 과정은 고구마 백 개 쯤 먹은 것같은 답답함의 연속이다. 이 황당한 일의 원인은 개고기 전통론이다.개고기로 조선족과 한국인이 하나되어 중국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1911년까지 중국과 한반도에 대중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현상은 없었다. 중국과 한반도 모두 개는 그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몰래 숨어서 먹는 불결한 음식이었다. 모든 것은 개를 사랑한 청 왕조가 멸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

중국 공산당 2019.10.17

134. 중국공산은 개고기로 한민족을 지배하나?

고대 신성한 개를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교역을 했다. 교역을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다. 교역과 전쟁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왕족이 되었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는 기마 유목 민족이 되었고 페르시아, 이란, 터키,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는 에트루리안으로 대표되는 해양 교역 세력이 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를 사랑하고 특정한 개를 왕의 상징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마 유목민족은 개를 사랑한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강력한 금기였다. 고대 스키타이, 흉노, 선비, 고구려, 백제, 신라, 돌궐, 위그르, 몽골, 거란, 여진, 고려, 청, 조선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오직 고대 중국 한족만이 개를 가축으로 키워 잡아먹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

중국 공산당 2019.10.10

100. 개 먹는 조선족이 한국을 무시하는 이유?

법무부와 외교부 자료를 쭉 보면 조선족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해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언론에서 조선족을 다룰 때 즐겨 사용되는 수식어이기도 하다. 조선족 스스로 자신들은 한반도 조선인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순응하고 있을 때 만주로 가 독립 운동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비약해서 해석을 하면 한국을 무시하거나 탓하게 된다. 중국의 조선족과 북한 주민은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제 와 일제에 대항해 싸우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남한은 미제와 일제에 기생해서 꿀을 빨았다는 거다. 남한은 물질적으로는 부유해졌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미제와 일제에 의해 오염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즉, 개고기를 먹는 조선족만이 ..

중국 공산당 2019.07.18

90. 개고기와 주체 사상의 나라, 북한

북한의 대표 음식은 개고기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 북한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대표 음식은 개고기라고. 사실 맞는 말이다. 북한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개고기”다.북한에서 개고기를 대표 음식으로 자랑하는 이유는 김일성에 있다. 김일성 자신이 개고기 중독이라고 할 만큼 개고기를 좋아했고 그런 김일성이 북한을 만들었다. 즉, 북한은 김일성 그 자체고 북한의 문화는 개고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김일성이 만든 주체 사상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쇄국 정책의 바탕이 되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기생한 구 소련과 중국이 원조를 끊어버리자 북한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개방을 하느냐, 쇄국을 고수하느냐?!북한은 쇄국 정책을 택했다. 국제사회와 한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으면서 말이다. ..

북한 2019.06.25

87. 북한 개고기 만병통치설이 생긴 이유도 김일성

김일성은 여름휴가 동안 먹을 ‘김일성 황구’를 평양 중이 목장에서 포태리 별장까지 비행기로 공수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겨 무장군인들이 지키며 키우던 ‘김일성 황구’를 외부에 내보내게 되었다. 여름 별장 옆에 중이 목장의 개 농장 지부를 만든 것이다. 포태리 인근 주민 중 일부가 차출되어 개 농장으로 일을 하러 갔고 평양보다 관리가 허술 한 탓에 김일성 황구에 대한 정보가 외부에 유출되었다. 처음 김일성 황구에 대한 뉴스를 접했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대명천지에 “누런 개가 가장 몸에 좋다”는 조선 시대 기록(사실은 신석기 시대 중국 기록)을 철썩같이 믿어 눈알까지 노란 누렁이를 만들어내는 미친 집단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어려운 것을 김일성은 해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

북한 2019.06.11

86. 김일성은 살아있는 강아지 피까지 마셨나?

북한 주민들은 굶어죽는 시기에도 김일성 황구 강아지들은 수의사들의 검진을 받으며 수입산 통조림(성분표를 보면 그다지 권할만 하지는 않지만)을 먹으며 신나게 살았다. 기껏해야 8달에서 10달 살면 많이 살았지만 말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8개월에서 10개월 사이의 김일성 황구 암컷 강아지만 먹었다. 북한은 김일성 부자 전용 개 농장을 꽤나 체계적으로 운영했다. 북한에서 만든 개농장은 인류가 두 번째로 만든 개농장이 아닐까 싶다. 가장 처음 개 농장을 만든 사례는 북한보다 500년 앞선 아즈텍 - 마야인이었다. 그들은 개를 죽음과 관련된 신으로 여겼지만 개 농장을 만들어 치와와의 조상으로 알려진 테치치를 잡아먹었다. 사실 아즈텍 마야 인이 만든 개농장은 개 우리에 가깝다. 서양의 축산 농장 시스템을 개농장에..

북한 2019.06.08

85. 김일성이 먹을 개를 본 자, 사형에 처한다

청나라에 반발한 마오쩌둥은 개고기 먹는 관습이 거의 사라진 중국 대륙에 다시 개고기 열풍을 불어 넣었다. 김일성 이전 북한의 권력은 천도교 세력에 있었다. 천도교는 개고기를 금지한다.그렇다고 김일성이 천도교 세력에 대한 반발로 개고기를 먹은 것 같지는 않다. 중국 공산당 출신 김일성은 진심으로 개고기를 좋아했다. 김일성을 신으로 모시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세계10대 종교에 포함된다. 북한은 변형된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인 동시에 종교국가다. 중세 카톨릭 독재 시대에 유럽에서 교황이 전지전능한 권력을 휘둘렀듯이 북한에서 김일성은 신이자 교황이었다. 그런 김일성이 하루에 두 끼는 반드시 개고기를 먹을 정도로 좋아했으니 국가 기관이 총 동원되어 개고기를 찬양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서 개고기 전통론이 생겨난 이..

북한 2019.06.06

55. 만주족을 학살한 범인은...조선족? (2)

조선족이 본격적으로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1945년 이후다. 조선족의 개고기 전통은 만주족이 학살된 후 만주에 새로 생긴 식문화다. 20.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중심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내전을 하던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은 일시 휴전을 하고 손을 잡았다. 그들의 적은 일본군이었다. 여기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도 합세해 가열차게 일제와 싸웠다. 만주를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 + 중국 국민당 +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연합체가 형성된 것이다. 일제는 만주족과 손을 잡았다. 친일과 반일로 나뉘어 만주인과 일본인이 한 편이었고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 조선독립운동가들이 한 편이었다. 21. 국˙공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복잡한 조선 독립운동가 계파 중 중국 공산당 파가 만주..

중국 공산당 2019.03.21

49. 조선의 중국 사대주의와 만주 벌판 개장사

선조와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 국경으로 튀었다. 당연히 명나라가 망명을 허락할 거라고 여겼지만 끝내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 나라로 섬긴다고 설레발을 떨더니 실제로는 총독부 관리 취급도 못 받은 것이다. 조선 백성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소년과 개, 신광현, 19세기, 조선>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도 전쟁사에서 임진왜란과 같은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성주가 도망을 친 상황에서 농민과 노예들이 곡괭이 들고 적과 싸운 격이다. 그 난리 통에 선조는 또 다 늙은 나이에 어린 정비를 맞아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의병들과 함께 싸워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광해군을 중국 조선 총독부는 견제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광해군은 서자라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2019.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