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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킹덤 속 사람들은 왜 인육을 먹었나?

명나라 도교를 수입한 조선은 개고기를 먹으라는 공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랐다. 부모의 나라였지만 공자를 신으로 모신 입장에서 개고기 문제 만큼은 명나라가 틀린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틀린 건 조선이었다. 춘추전국 시대 선비는 평민과 귀족 사이에 낀 중인 같은 신분이었다. 그런 선비가 붕당을 만드는 건 처형을 당할 만큼 큰 중죄였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선비가 당을 만든 예는 없었다. 선비가 권력의 장악한 예가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선 역시 16세기 명종 대까지만 해도 사사로이 당을 만들면 처형을 당했다. 명종의 조카 중에서도 어미가 천한 선조가 왕이 되면서 그 금기가 깨졌다. 조선은 유교 역사 상 최초로 선비질로 붕당을 만든 나라였다. 남송의 '절함도'는 왕에게 충언을 올리는 강직한 충신을 그..

조선 2019.02.28

개를 가축으로 포함시킨 고시 없애는 방법

1. 전 세계 북한과 우리나라에만 있는 개 농장. 개를 가축으로 포함시킨 농림부 고시부터 없애야 합니다. 어떻게? 동물보호법을 개정해야 하나요? 2. 동보법 개정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개 농장, 강아지 농장은 농림부에서 관리합니다. 축산법 상 개는 가축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꼼수를 부렸습니다. 3. 농림부 장관이 시행규칙을 만들어 개를 가축에 포함 시켰고 이게 우리나라 개 농장, 강아지 농장을 합법으로 만들어줬습니다. 4. 축산법에는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한다고 해놓고 시행규칙을 만들었네요? 그게 그겁니다. 농림축산식품부령 = 장관 명령 = 시행규칙 = 고시 5 . 이거 없애는 방법? 완전 간단합니다. 6. 행정 소송을 하면 됩니다. 행정 소송은 장관의 명령으로 손해를 ..

개고기 문제 2019.02.26

45. 공자로 개혁? 초장부터 망조 든 조선

조선 양반들은 왜 멀쩡한 도로를 갈아엎고 가게 문을 닫게 했을까? 왜 뜬금없이 청동기 시대 공자를 물고 빨았을까? 미쳐서? 이기적이어서? 나름 치밀한 정치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지랭이 천 것 한나라 유방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공자의 유교를 국가 정책으로 만들었다. 조선도 빈약한 통치 기반을 대체할 새 시스템이 필요했고 2000년 전 학문인 유교를 새 국가 시스템으로 삼았다. 그게 조선의 비극이었다. 이동수단만 봐도 1500년 전 고구려 수레가 조선 가마보다는 발달된 것처럼 보인다. 2000년 묵은 학설로 개혁을 하고자 했으니 초장부터 망조가 든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동·서양을 불문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과 괴리된 삶을 산다. 신라 땅 어느 구석에 살던 아낙은 신라 성골 여인이 사용한 황금 귀..

조선 2019.02.23

44. 왜 조선은 개고기를 강요했나?

18세기 김홍도가 중국 도교에서 팔선 중 하나로 모시던 한상자를 그린 사실로 보아 조선 지배층도 명나라 도교의 트렌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 여신인 서왕모가 사자 개를 타고 나타난다고 믿던 명나라 도교와 달리 조선은 당 이전 도교 서적만 골라 출판했다. 마약인 한식산을 먹으며 개고기를 약으로 잡아먹던 시기의 중국 도교만을 고집해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온 나라가 피폐해진 17세기 이후 중국의 한의학과 도교 서적을 많이 출판했다. 그 때까지 중국에 존재한 개고기에 관한 모든 내용을 총망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2004년 대한민국 인재들이 모여 개고기 합법화를 위한 정책을 연구한 것처럼 조선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

조선 2019.02.21

43 개고기 대신 로또 기원, 명나라 도교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약 60년 동안 중국 대륙은 선비족 미친 고 씨 패밀리 가 날뛰던 남북조 시대보다 더 정신없었다.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북부에는 다섯 개 왕조가, 중국 남부에는 열 개 왕조가 들어서는 오대십국 시대가 된 것이다. 나라가 망했다 세워지는 혼란기였으니 중국 사람들은 다시 개고기를 먹었을까? 스위스 산간벽지 사람들처럼 정말 굶주린 사람들은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정서는 이미 몇 백 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당 왕조와 함께 경교와 마니교가 망했어도 아직 불교와 도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대십국 시대부터 청 왕조가 망하는 순간까지 중국 도교에서는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개고기를 먹으면 죽어서 벌을 받는다고도 믿었다. 중국 도교 트렌드가 ..

종교 2019.02.19

42. 소 돼지는 먹는데 개고기는 왜 안돼요?

개고기를 약으로 쓴 초기 도사들의 사기 행각은 너무 빨리 들통 났다. 휴거를 외치며 빌딩에서 뛰어낸 사람처럼 불로초를 먹은 진시황도 죽은 것이다. 그러자 도사들은 서양의 연금술사처럼 자신들이 금(금단)을 만들 수 있다고 공언했다. 당시 황제들이 먹은 금단은 우황청심환처럼 금박을 입힌 환약인 환약일 것이다.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이상한 풀(불로초)을 먹거나 영약(금단)을 먹고 초절정 고수가 된다. 황제들이 먹었을 때 기력이 반짝 회복된 걸로 봐서는 스테로이스 성분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 한국 일일 드라마에서 불로장생약처럼 등장하던 일부 공진단에도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 있다. 스테로이드는 운동선수 금지 약물이다. 무엇보다 금단에는 수은이 들어 있었다. 비싼 금단을 사먹은 황제와 부호들은 ..

종교 2019.02.16

41. 주나라 왕비가 흉노족인데 웬 중화사상 뽕?

비단 찢을 때마다 왕을 홀리는 웃음을 지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포사는 결국 왕비 자리를 꿰찼다. 그러자 열 받은 전직 왕비가 북방 기마 유목민인 견융을 끌어들여 주 왕조를 멸망시켰다. 여자 하나 잘못 만나 나라가 망한 건 맞지만 정확히는 비단 찢다 망한 게 아니라 흉노의 침입으로 망한 것이다. 견융, 개 견 자를 쓰는 것부터 범상치 않다. 개를 섬기는 오랑캐, 즉 흉노다. 여불위와 진시황의 민족인 초나라 묘족도 조상이 개였다. 주 나라 마지막 왕이 쫓아낸 왕비 역시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중국 유물에 개와 불새와 같은 북방 기마 유목 왕조의 상징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나라부터 따지자면 모든 고대 중국 왕조가 북방 기마 유목민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셈이다. 날개달린 말과 신성..

40. 중국의 식인풍습과 빛의 종교 '개 새'

빛의 종교 속 ‘개 새’ 개념은 진· 한 시대 중국 대륙에도 전해졌다. 그게 중국 도교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에 단절되어 있었어도 중국 한족 지배층은 끊임없이 중국 외부와 전쟁 혹은 교류를 해야 했다. 문화와 종교도 그렇게 조금씩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도덕경』이란 글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났을까? 노자조차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확실치 않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중국 도교도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인간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그 돌파구는 신선이 되어 신선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개 새’를 믿는 빛의 종교는 고통과 죽음이 없는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고 결국 마침내 빛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주요..

종교 2019.02.12

39. 아르미안의 네 딸들 속 '개 머리 새'

여불위가 진시황 아버지라면 진시황도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문란한 성생활으로 악명 높은 진시황 엄마는 억울하다. 왕성한 성생활을 통해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은 기마유목민의 미덕이었다. 그래서인지 진시황 시대 유물을 보면 티베트탄 마스티프 석상이 있다. 사자개는 유목 왕조에게는 마치 옥새와도 같다 했다. 이런 개 석상이 중국 진왕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생뚱맞다. 진 왕조가 받은 석상이거나 과거 초나라 영토 안에 사자 개 석상을 가진 유목 왕족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든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를 열 받게 했다. 흉노를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 흉노의 침입을 더 초래했다. 그 전까지는 겨울이 되어 천랑성(늑대의별 혹은 개의 별)이 뜨면 풀이 얼어 죽..

종교 2019.02.09

38. 개 (머리를 한) 새와 진시황 개 자식 설

중국 도교는 신선이 되어 도원경에 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승과 저승 말고 제 3세계인 선계가 있고 그 곳이 무릉도원이다. 고구려 도교과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았느니 고구려 고유의 도교라느니 설이 분분하지만 죽음에 대한 관념으로 본다면 중국 도교와 고구려 도교는 분명히 달랐다. 고구려인은 선계에 갈 필요가 없다. 저승에 가서도 현세와 똑같은 삶을 산다고 믿었다. 현재 32평 아파트에 산다면 별 일 없는 한 저승에 가서도 32층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렸을 고구려 지배층의 경우 저승이 곧 천국이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저승가서 살 집 계약서였다.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요구사항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에 개를 그린 건 이사갈 때 키우던 개도 데려가는 것과 같다..

종교 2019.02.07